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어떤 불변의 진리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능동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아니 그보다 먼저, 인간이 오직 능동적으로만 살아가는 일은 가능할까? 능동성은 주체성과 맞물리는 말로 수동성과 대비되는 말처럼 보인다. 수동적이라는 것은 나 아닌 것에서 영향 받음을, 자기 자신 속에 머물 수 없음을, 나 아닌 것에 머물며 그 무엇인가에 당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내가 능동적이기를 포기했을 때 수동적으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 능동적이고자 했지만, 수동적으로 되는 수밖에 없는 때도 있는 것이다. 수동성은 삶 속에는 인간이 혹은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영역이 있음에 대한 표시이기도 하다. 수동성이 나의 능동성 혹은 주체성이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영역의 바깥을 의미한다면,수동성은 능동성의 긍정적 의미에 반대되는 부정적 의미로만 해석될 수 없다. 그때 수동성은 나의 바깥, 타자들의 지평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한에서 내가 수동적이 된다는 것은 오직 나 자신으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와의 마주침, 그와의 어떤 관계맺음을 의미한다. 그 관계를 통해 나는 나 아닌 것들과 만나고 또 앓게 된다. 나는 절대로 너를 알 수 없다는 너의 고통을 알 수 없다는 자각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 맺었기 때문에 너를 알기 위해 네 속으로 너의 고통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너를 앓을 수밖에 없다는 그 어쩔 수 없음의 표현이 바로 수동성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오직 이 앓음 속에서, 수동성 속에서만 더 깊어지고 넓어진다. 그렇다면 이 수동성은 내가 추구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능동적으로 수동성을 추구할 수 있을까? 수동성의 영역이 내가 어찌해볼 수 없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그것이 나에게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내 것이 아닌, 나의 노력만으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너를 알고 싶다고 우겨보아도 네가 마음을 열어주지 않으면 네가 내밀어 주는 손이 없이는 절대 나는 너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너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고, 내가 너의 고통을 안다고 말해보아도, 나의 노력만으로는 너의 고통을 알 수도 덜어줄 수도 없다. 그러나 그 어쩔 수 없음에 대한 자각은 결코 능동성의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 앞에 서는 것, 수동성의 문 앞에, 나 아닌 것 앞에, ‘너’ 앞에 서는 것은 오직 나의 능동성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열려있는 일, 인내하는 일 뿐이다. 그러므로 김수영의 말처럼, ‘결코 서둘지 말라’. 그러나 애가 타는 것은 괜찮다. 애타게, 간절하게,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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