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러 금요일마다 화순의 한 공부방에 간다. 어느 날 내가 버스를 타러 후문 쪽으로 가다가 용지에 한 꼬마 아이가 빠진 걸 봤다고 하자. 나는 연못에 들어가서 아이를 구해야 할까? 옷이 젖을 테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 공부방 수업은 취소해야 할 것이다. 즉 나에게 손해가 따른다. 하지만 내가 구하지 않으면 아이는 죽을 수도 있는데 그 정도 손해가 대수인가? ‘우리는 타인이 나쁜 일을 겪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치를 희생이, 그가 겪을 고통에 비할 수 없이 작다면 말이다.’ 호주의 윤리학자 피터 싱어의 주장이다.
  물론 ‘비할 수 없이 작다’는 게 어느 정도 수준인지 규정하기가 쉽지 않기는 하다. 어떤 남자가 나를 연모한 나머지 상사병으로 죽어간다 치자. 그는 한 번만 나를 만나는 게 소원이고 소원을 이루면 살아날 수 있다고 치자. 나는 동성애 취향도 아니고 기말이라 바쁘기도 하지만, 그를 만나주는 수고는 그의 생명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것이니 나는 소원을 들어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소원이 나와 결혼하는 것이라면 어떨까? 죽음에 비하면 결혼은 작은 일일 수 있겠지만, 글쎄? 죽음이라는 그의 고통에 비할 수 없이 작은, 그래서 내가 감내할 수 있는 희생은 어디까지일까? 데이트 한 번? 키스? 또는 그 이상?
  그러나 ‘최대 수준의 희생’이 불분명하다면 일단 ‘최소 수준의 희생’부터 실행에 옮기면 안 될까? 공부방 학생들에게 물었다. “여러분이 학교에 돈을 만원쯤 두고 왔다면 누가 집어가기 전에 얼른 되찾으러 돌아가겠죠. 만약 50원을 두고 왔다면? 귀찮아서 안 가고 그냥 버리는 셈 칠 거에요. 그럼 최대한 얼마까지 버리는 셈 칠 수 있을까요?” 누군가 5백원이라고 답했다. “우리가 열 명이니까 5백원씩 버린다 치면, 우리는 5천원 정도는 버릴 수 있는 셈이네요.
  아프리카를 비롯한 긴급구호 지역에서 기아 상태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2주 동안 영양죽을 먹이는 데 드는 비용이 만원이라는 거 알아요? 우리가 버리는 돈을 두 번만 모으면 한 아이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거죠. 우리가 기아들을 위해 그 정도 돈을 쓰지 않는다는 건, 연못에 빠져 죽어가는 아이를 모른 척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치러야 할 희생이 보잘 것 없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차이가 있다면 연못에 빠진 아이의 고통은 눈 앞에 보이는 반면 굶어 죽어가는 아이의 고통은 그렇지 않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타인의 고통에 응하기 위해서는 감성뿐 아니라 의지도 필요하다. 감성은 눈앞의 대상에 의해 자극됨으로써 동요하지만, 어느 때건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며 그들의 존재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능동적인 의지의 운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평화로워 보이는 것은 고통받는 이들이 없는 까닭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들을 보려는 의지가 없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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