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 14일, 전남대학교 인문학연구소의 주최로 "눈오는 밤에 듣는 인문학 이야기" 첫 번째 세미나가 진행되었다. "삼국사기를 위한 변명"이라는 주제로 전남대 사학과 이강래 교수가 발표를, 전북대 사학과 하태규 교수가 사회를 맡았다.

"역사가와 역사서의 긴밀한 의미 관계를 논의의 전제로 삼아, 번영과 위기의 시대, 좌절된 정치가와 실패한 역사가, 그리고 고대 역사의 자료 원천과 현실 비판의 인식 매개물이라는 중층적 위상을 추적하여, [삼국사기]에 대한 정당한 이해를 겨냥한다." 는 전체적인 틀 안에서 발표가 진행되었고, 이후 질의응답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발표자 이강래 교수는 "[삼국사기]가 한국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만 이용되어 왔지만, 그 자체에 대한 해명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밝혔고, "역사는 사실의 문제보다는 의미부여 혹은 사관의 문제라는 선언에는 공감하나, 사실에 대한 정확한 검증을 홀대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라고 이야기했다. 또한,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무리하면서 그는 "국사학계, 특히 고대사 연구의 대중에 대한 복무가 부실한 틈에, 저널리즘에 의한 고대사 논증이 취약하면서도 창궐하게 되었다."지적하고, "치열한 연구와 동시에 대중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면서 인문학 첫번째 이야기를 마쳤다.

논의의 주요 내용을 발표문을 토대로 요약하여 싣는다.

[삼국사기]를 위한 변명

1. 변명의 이유

- 시공간적으로 고대 삼국의 전부 혹은 일부를 서술 대상으로 공유하는 다른 문헌들이 있으며, 그들이 전하는 정보와 [삼국사기]의 그것이 종종 상충한다는 것이다.
- 삼국 관련 고고학에서 거두어진 물질 자료의 지표적 정보 가운데는 [삼국사기] 문맥과의 괴리를 설득력있게 극복하지 못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 [삼국사기]는 사료와 사관의 두 측면에서 모두 한국의 고대를 적실하게 혹은 객관적으로 아우르지 못했거나 아마 의도적으로 변질시켰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처럼 세 가지 범주의 회의론은 한결같이 삼국시대를 매개하는 [삼국사기]의 절대 비중, 즉 그에 버금가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현실을 역설적인 맥락에서 수긍하고 있는 셈이다.

2. 중층의 의미관계

끝내 유의할 것은 [삼국사기]의 자체 논리이며, 그에 내재된 자체 인식이라고 본다. 이를 위해 현재적 관점의 정당한 강조가 현재적 이해에 따른 과거사의 변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데 주의할 필요가 있다.

- [삼국사기]가 편찬된 12세기가 가지는 번영과 위기의 양면성과 그에 대한 주요 대한의 상충이 우선 살펴져야 한다.
- [삼국사기] 편찬 주체가 대유한 정치가로서의 속성과 역사가로서의 지향이 분별되어야 비로소 [삼국사기]의 두 영역, 즉 사실과 사론의 준별이 가능해질 것이다.
- 서술 재료가 된 국내외 자료들 속에 잠복해 있는 수많은 층위 또한 세심하게 가려내야 한다.

3. 정치가와 역사가

인종대에 최고의 실력자 가운데 하나였던 그로서는 현실 모순과 예고된 파국의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여기에 그의 삶과 활동이 단순한 개인의 영욕에 그칠 수 없는 까닭이 있으며, [삼국사기]를 이해할 때 그의 삶에 대한 조망이 동반되어야 할 당위가 있다.

아마 김부식에게 ’사실’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역사를 서술하면서 스스로 비록 믿을 수 없지만 채택해 서술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절제를 요구하는 사항이다. 바로 그 절제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야말로 기록 존중의 정신이었다. 반면에 이 기록 존중이 최소한의 고증마저 포기한 맹목적 경향으로 치우칠 때 초래되는 폐해 또한 만만치 않다. 요컨대 [삼국사기] 편찬자들을 정당한 사료 비판 의식을 결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4. 사실과 사론

여하튼 [삼국사기] 편찬은 기존 역사 자료들의 한계를 극복하고 삼국 시대사에 대한 새로운 종합을 의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가 매개하는 고대의 마당에 들어서기 위하여 숙고해야 할 조건은 아직 남아 있다. 우선 [삼국사기]에 담긴 고대는 마땅히 고려 지식 관료들의 시각을 경유한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더구나 문제는 그들 또한 통일기 신라인들의 관점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독자들은 12세기와 7세기라는 두 전환기 현실이 덧씌운 편향을 깊이 경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삼국 당대에 시도된 왕조사의 자국 중심주의 역시 정돈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독자들의 질문은 언제나 성급하고 공세적인 반면, [삼국사기]는 너무나 빈약한 정보와 지루한 규범을 반복할 뿐이다. [삼국사기]의 난맥 앞에 독자들은 종종 자의적인 해석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물론 [삼국사기]라는 프리즘을 경유한 고대의 의미 맥락은 수용자의 관심 여하에 따라 분방하게 펼쳐질 것이다. 이 해석의 다의성은 고대의 총합으로서 [삼국사기]가 마땅히 감임해야 할 바이거니와, 다만 해석 이전의 본래 문맥을 간과하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이 우선해야 옳다.

5. 제안과 전망

[삼국사기]는 삼국시대를 설명하는 ’본사’인 동시에 12세기 중엽 고려 왕조의 위기에 대해 김부식이 제안한 하나의 ’대안’이었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삼국사기]의 고대 인식 즉 삼국의 ’본사’라는 데 절대 주안한다. 이 때 [삼국사기]가 제시하는 사료의 숱한 착종과 자기 모순은 그에 기반하여 고대를 복원하는 일에 늘 불안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정밀한 사료 비판의 정신이 견지되어야 할 까닭이 있다.

12세기 현실 속에서 모색되고 갈등한 주요 대안의 두 축은 언제든지 새로운 생명력으로 다시 점검될 수 있다. 판단의 기준은 변화하는 현실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현상에 대한 적확한 분석과 반성이야말로 대안의 적실성을 가름할 것이며, 그 적실성은 실천 가능성 여하로 검증될 것이다. 선언적 명분에 불과한 자주와 실천력이 실종된 개혁은 시대 구성원을 호도하는 선동이 아닐 수 없음을 환기한다. 현실에 얼마나 굳건히 착근하고 있느냐가 이상의 고도를 결정하다고 믿는다. 실로 지난 백년의 [삼국사기]론에는 논의 주체와 논의 대상 사이에 크나큰 격절이 의연히 메꾸어지지 않았다는 반성이야말로 삼국사기를 위한 변명의 조건이었던 셈이다.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