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동구 운림동에 위치한 우제길미술관에서는 2004년부터 해마다 판화워크숍이 열린다. 동시대 미술의 흐름 속에서 소외되고 있는 판화장르에 새로운 가능성 제시하고, 국내경제위기 이후 급속도로 위축되어 버린 판화계를 활성화하기 위한 취지로 열리는 이번 행사는 올해도 5회를 맞이하며 어김없이 성황리에 열렸다.

이번에 초대된 손님은 프랑스의 판화작가 티부흐 뤽(Thiburs Luc) 씨. 티부흐 뤽 씨는 프랑스 노르망디 출생으로 루앙미술학교를 졸업, 5회의 개인전과 프랑스를 비롯해 스페인, 벨기에, 폴란드, 네덜란드 등에서 열린 단체전에 다수 참여한 작가다.

생-모흐 판화비엔날레와 제5회 디뉴 레 뱅 국제판화비엔날레 등에서 수상한 바 있으며 국내외적으로 인정받는 작가이다. 그는 판화의 전통적 기법과 재료가 주는 한계로부터 탈피를 시도하여, 동 시대의 최첨단 디지털 테크놀로지 이용하고 '솔바노플라스티(solvanoplastie)'라는 독창적 기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솔바노플라스티의 특징은 원본 이미지를 컴퓨터 작업을 거쳐 출력한 뒤, 출력물을 아크릴 판에 붙여, 이 판을 시너로 부식시키는 데 있다. 이 때 아크릴판에 잉크가 닿지 않은 부분이 부식됨으로써 요철이 생기는데, 이는 기존 동판이나 목판 등에 그림을 새겨 넣는 과정을 크게 단순화시킨 것이라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또한 이 기법은 판화의 모체인 판재에 입체감을 주며, 아크릴 판재의 저항이 가능한 한계 내에서 여러 차례의 이미지 겹치기, 삭제, 첨가, 재구성 등을 반복해 작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또한 뤽 씨의 작품은 제작기법 외에 내용의 측면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그는 서양과 동양, 기독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옛 건축물들의 모습을 판화형식으로 담아 왔는데 이것을 그는 ‘풍경의 이미지들을 찾아서’(A la recherche des images d'un paysage)라고 칭하고 있다.

“하나의 풍경 속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찾는 것은 바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다문화에 대한 해석이기도 하다. 그는 서양과 동양 문명,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정신적 만남, 과거와 현재를 옛 건축물과 유적지의 이미지 속에서 재구성하여 풀어내고 있다. 그의 판화에서 볼 수 있는 중세 시대의 유적지들은 현재는 남아있지 않는 것들도 대다수여서 건축학적 측면에서도 매우 흥미로운 역사적 자료이기도 하다”(우제길미술관측 설명)

이번 행사는 그의 개인전과 함께 ‘작가와의 만남’과 ‘판화워크숍’을 통해 진행되었다. 그 동안 국제판화워크숍은 전문가들에게 새로운 판화기법에 대한 정보교류와 국제적 문화예술 교류의 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아왔었다.

외국 유명작가의 기법을 배우려면 많은 비용을 들여 해외로 가거나 국내 회원들끼리 비용을 마련해 초청해야 하는 탓에, 이러한 행사가 국내 작가들에게 매우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이 예술인, 전문가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특별히 이번 행사는 행사개최와 미술관설립, 운영의 취지에 걸맞게 많은 일반시민들의 참여가 이루어졌다.

개별적으로 교류하지 않고서는 예술인도 보기 힘든 특정 작가의 작업 과정을 일반 시민이 볼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기 때문에 이번 행사를 접한 시민들의 반응 또한 남달랐다. 작가와의 만남에 참석한 이건환 씨는 “저명한 작가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부터가 무척 설레고 흥분되는 일”이라며 “이번 워크숍에서 그 동안 잘 모르고, 관심도 적었던 판화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성숙한 문화시민이 된 기분이다”라고 깊은 만족감을 표했다.

뿐만 아니라 뤽 씨 자신도 이번 워크숍에 대해 무척 흡족해했다. 그는 “전문가만을 대상으로 한 세미나도 진행해봤지만, 일반인까지 포함한 워크숍은 처음”이라며 “주로 기법에만 관심을 두는 전문가들과 달리, 일반인들과 함께 해보니 흥미롭고 풍부한 질문들이 많이 쏟아졌다”고 답했다.

티부흐 뤽 씨는 우제길미술관의 배려로, 2주간 광주에서 머무르며 광주시립미술관, 매개공간 미나리, 송광사, 소쇄원 등 광주와 전남의 명소들을 둘러볼 예정이라고 한다.


▲ 판화작가 티부흐 뤽(Thiburs Luc) 씨의 '작가와의 만남' 시간.


- 다음은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 오고 간 문답들

Q : 솔바노플라스티라는 독창적인 기법이 만들어진 계기는?

A : 내가 판화를 제작한 것이 30년 정도 되었는데, 현재의 작업은 10여 년 전부터 계속된 것으로 그 전의 20여 년 동안은 전통적인 판화를 했었다. 전통적인 판화를 하던 시절에 느꼈던 판화로서의 모순이나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노력했고, 그러한 일종의 탐구과정을 거치다 보니 오늘에 이르렀다.

Q : 작품에서 폐허, 폐건축의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지는데, 왜 그러한 소재를 선호하는가?

A : 나는 고고학적인 영역에 관심이 많고, 또 그러한 영역을 좋아한다. 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건축물들은 실은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들이다. 그러나 생각되어졌을 만한 것들이다.

또한 한 시대에만 한정되어있지 않다. 역사의 수많은 이미지를 중첩시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일종의 가설, 가능성, 상상력을 구축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현재에서 과거까지의 건축양식이 아니다. 나는 우리가 봐왔고, 상상해왔던 것들이 빛을 통해서 화면에 현상화되어지는 것을 의미 있게 생각한다. ‘현재’와 ‘과거’ 중 특별히 어느 것을 선호하지는 않지만, ‘과거’에는 ‘마띠에르’가 있는 것 같아서 마음에 들어 한다.

Q : 처음부터 어떠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작업하는가, 아니면 만들어가면서 잡아가는가?

A : 나는 작품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하나의 건축물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벽돌이 한 장 한 장 쌓이고, 유리가 쌓이고 거기에 또 다른 건축물이 생기고...해서 도시가 구축되는 것처럼.

나름의 생각(계획)은 하지만 처음부터 정확하게 상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100% 우연을 의도하지도 않는다. 하나하나 컨트롤하면서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판화라는 매체 자체가 갖는 특징상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Q : 관객마다 당신의 작품에서 느끼는 감상이 다르겠지만, 작가로서 관객이 당신의 작품에서 무엇을 느끼길 바라는가?

A : “나도 이런 작품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느낀다면 내게 정말 멋진 관객이라고 생각한다.(웃음) 일종의 동기유발이 되었으면 좋겠다.

Q : 작품에 임할 때, 어떠한 주제를 정하고 들어가는가?

A : 경우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처음부터 주제를 정하고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일 주문에 의해 작품을 제작한다면 그 때는 주제를 정할 것이다.

Q : 다른 판화작품과는 다르게, 여백도 없고 얇은 종이를 사용하는데?

A : 나의 목적은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브제'를 만드는 데에 있다. 두꺼운 종이는 무게도 있어 작업이 힘들지만 얇은 종이는 한 번에 작업이 가능하다. 종이와 오브제가 따로 노는 것은 싫다. 완벽히 하나가 되길 바란다.

Q : 작품에서 이슬람 건축물들이 자주 보이는데, 특별히 의미가 있나?

A : (이슬람과는 관련이) 별로 없다. 다만 종교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프랑스어에서 '종교'를 뜻하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연결시켜주다.'라는 말에 어원을 두고 있다. 요즘 종교들은 일종의 독트린형태로 진행되지만, 내 작업이 과거와 현재,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길 바랄 뿐이다. 종교적인 부분은 없다.

Q : 취미는 무엇인가?

A :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 미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수다 떠는 것도 좋아한다. 그런데 아이가 넷이나 되서 취미생활 할 시간이 별로 없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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