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산을 만나다

흔히들 지리산을 어머니의 산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금강산은? 나는 금강산을 ‘여인의 산’이라 칭하고 싶다. 참으로 많은 전설을 품고, 바라보는 방향에 따른 다양한 표정과 1만2천 가지의 매력에 사람들을 헤어 나오질 못하게 만드니 말이다. 금강산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경치가 달라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골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는 푸르른 매력의 봉래산을 만나고 왔다.

지난 9일 새벽 3시경 여수캠퍼스 학생들을 태운 버스는 그렇게 유유히 교문을 나섰다. 우리는 장장 11시간가량 버스를 탄 끝에 강원도에 도착하게 됐다. 남측 출입국 사무소에서 우리는 핸드폰을 비롯한 반입 금지 물품을 반납하고 나서야 슬슬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군사 분계선을 넘는 동안에 차안에서 가이드는 ‘차안에서는 사진촬영이 절대 안 되며, 북측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은 총질을 의미하기 때문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등의 간단한 주의사항을 일러 주었다. 북측 출입국 사무소가 가까워지자 창밖으로 북한 군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북한군들의 대부분이 키도 작고 까무잡잡한 편에 왜소한 체격을 가지고 있어서 행진할 때마다 옷이 휘적휘적 거려 조금은 우스웠다.

출입국에서 수속을 밟으려 줄을 서 있는데 앞에 일행과 북측 직원과의 실랑이 소리가 들려왔다. 사진과 인물이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결국엔 무사히 통과했지만 ‘남측 사람들은 화장을 한 것과 안한 것이 너무 다르다’는 북한 직원의 푸념을 들을 수 있었다.

수속을 무사히 마치고 북으로 향하는 버스 창밖에 보이는 북한 마을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북한사람이다”라며 탄성을 질렀다. 이렇게나 빨리 북한주민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버스 창밖으로는 북한주민들이 무채색의 옷을 입고 농사일에 열중했다. 간간히 바위 뒤에 뒤돌아 서있는 북한 주민을 볼 수도 있었다.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은 우리가 그들을 보며 신기해하는 것과는 우리를 못 본 체 외면하려 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화답해줄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창밖을 향해 열심히 손을 내 저었다.

북한에서는 마치 전쟁 이후 시간이 흐르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어렸을 적 즐겨 보던 검정고무신이라는 만화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길가에는 소들이 줄지어 지나다녔고, 강가의 징검다리는 신기하기까지 했다.

우리들의 첫 번째 방북 일정은 금강산 교예단의 교예공연 관람이었다. 금강산 교예단은 외국의 다양한 대회에서도 수상을 하였다고 사회자가 낭랑한 목소리로 소개해 주었다. ‘신기하다’라기 보다는 ‘아름답다’라는 생각이 드는 공연이었다. 공연이 끝나자 기립박수가 약 5분가량 이어졌다.


 

▲ 금강산 교예단의 피날레 공연.


공연 관람을 마치고 우리는 금강산 온천으로 향했다. 뜨끈한 온천물은 기나긴 버스탑승으로 쌓였던 피로를 한순간 풀어주는 듯 했다. 게다가 금강산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한밤의 노천욕은 선녀가 된 기분이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인데 금강산은 음의 기운이 강하여 음과 양의 조화를 위해 온천의 담이 낮고, 매일 남탕과 여탕의 위치를 바꿔준다고 한다. 그 구분은 바가지 탕이 유무 여부인데, 바가지탕이 있는 곳이 여탕이다. 또 금강산의 음의 기운으로 인해 여자들은 반짝반짝 윤이 나고, 남자들은 시들시들 해진다는 속설이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온천욕 이후 피부가 한결 더 고와진 것 같다.

둘째 날 서둘러 아침식사를 마치고, 금강산으로 향했다. 다음 일정을 위해 떠나는 버스를 향해 북한 직원들이 모두 나와 손을 흔들어 주며 배웅해 귀빈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의 금강산 등반 코스는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살아 숨 쉬는 구룡연 코스였다. 구룡연으로 가는 길에는 길고 곧게 뻗은 소나무 들을 볼 수 있었는데 이것들은 적송, 홍송이나, 여인의 몸을 닮았다 하여 미인송이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지난 불의의 사고로 불타버린 남대문의 재료 또한 이 미인송이라고 한다. 이번 복원 작업에 북측에서 이 나무들을 재료로 보내준다면 국보 1호의 의미가 더 빛이 날 것 같은데 검역상의 문제로 그것은 불가하다고 한다. 또 화장실 중턱에 있는 화장실에서는 내용물의 종류에 따라 1~2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화장실 가지고 야박하게 군다고 생각했는데 이 돈은 화장실이 가득 차면 그 분뇨를 퍼내는데 사용한다고 한다.

우리가 가고자 했던 상팔담은 구룡연 코스의 정상인데, 구슬처럼 아름다운 8개의 담소가 구룡연 위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금강산을 오르기 전에 가이드 분께서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라는 시조의 양사언이 금강산을 오르내리며 그 시조를 지었다 소개해 주셨다. 이미 중학교 때 띤 그 시조를 읊으며 자신 만만하게 금강산 산행을 시작하였다.

 

▲ 금강산 정상에서 바라본 상팔담.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의 소재지.



가장 먼저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금강산의 맑은 물이었다. ‘구슬’이라는 비유가 무색하지 않게 푸르른 옥구슬 빛의 물이 흐르고 있었다. 기이한 암석들로 이뤄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산신령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산에 오르기 전 ‘북한사람들은 오른쪽 가슴에 김정일 뱃지를 달고 있다. 이 북한 직원들을 함부로 찍어서는 안 된다. 어길시 진행에 차질이 생기고 북한사람들과 트러블이 생길 수 있다’는 가이드 분의 신신당부가 떠올라 산행 길에서 음료수와 오이, 복숭아등을 팔고 있는 북한 직원들에게 말을 걸고 싶은 것을 꾹꾹 참고 묵묵히 산을 올랐다.

출발할 때의 기세가 차츰 사라져 갈 즈음 커다란 가방을 맨 북한 직원이 인사를 했다. 반갑게 인사하며 “가슴에 뱃지를 단 것을 보니 북한 사람이세요?”라고 물었더니 “북측사람 입네다”라고 답했다. 내게 말을 걸어 왔다는 사실에 북한에서는 ‘북한’이라는 단어 대신 ‘북측’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한다는 규칙을 잊은 것이다. “저는 남측의 전남대에 다니고 있고, 남원에서 산다”고 했더니 “남원은 춘향이의 도시이지요”라고 답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 북한 직원은 생각보다 남한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또 궁금해 했다.

“북측 사람이랑 함께 사진을 찍으면 안돼요?”라는 질문에 “안 될 것이야 없지만..”이라고 답하고는 함께 사진을 찍자는 제의에 “마음이 동하면 함께 찍겠습네다”라고 답했다. 북한 직원 또한 목적지가 상팔담 이었으므로 우리와 말동무를 하며 산을 올랐다.

“남자친구가 있습네까?”라는 질문에 일행이 “이 친구 어떠냐고?” 묻자 “북측사람이면 좋지만 남측사람이라 불가하지요”라며 “통일이 되면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웃으며 “월북하면 되겠어요?”라고 했더니 “월북은 절대 안 된다”고 정색해 나를 당황케 했다. 관폭정과 상팔담의 갈림길에서 헤어지게 된 북한 직원이 “관폭정의 경치 또한 절경이니 상팔담에서 봅시다”라며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관폭정에 오르자 시원하게 떨어지는 구룡폭포를 만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잠시 쉬는 동안 다람쥐를 만나게 됐는데 “다람쥐 다!!!”라며 환호하고 좋아하니까 또 다른 북한 직원께서 “사탕을 주면 가까이 옵네다” 라며 사탕을 건네주셨다. 하지만 다람쥐는 내게 오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한 체 발길을 돌려 북한사람과 사진을 찍겠다는 일념 하나로 상팔담을 향했다.

본격적인 상팔담 등반은 지금까지 등반보다 배는 힘들었다. 끊임없이 가파른 바람에 중간에 포기한 사람들이 생겨났다. 흥얼거리던 노래와 웃음은 사라진지 오래고 목은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오르기 전 가이드 분이 읊어 주셨던 양사언의 시조가 떠올랐다. ‘그래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다 했으니까..’ 속으로 그 시조를 읊고 또 읊으며 누가 이기나 한번 겨뤄보자는 마음으로 오르고 또 올랐다.

이윽고 우리는 정상에 올랐고 마지막 계단을 딛는 순간 머리카락에 살랑이는 바람이 나를 반기는 듯 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상팔담은 정말 당장이라도 하늘에서 선녀가 날개옷을 펄럭이며 내려올 것 같았다. 정상에서 함께 올라오던 북측직원과 재회해 “이제 정상이니까 마음이 동하셨어요”라고 물었더니 “그래 다같이 한번 찍읍시다”라고 하시면서 흔쾌히 응해주셨다. 2시간 반가량의 등반이 빛을 본 순간이었다.

등반을 마치고 우리는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을 맛보게 되었다. 남한의 냉면이 시원하고 새콤한 맛이라면 북한의 냉면은 고기육수 맛이 진했다. 북한 직원분의 말을 빌리자면 “면이 이로 끊었을 때 뚝뚝 끊기는 것이 평양냉면의 자랑입니다”라며 굳이 가위로 자르지 않아도 이로 끊기는 면 탓에 냉면이라기보다는 메밀국수 같았다.

다음 코스로는 우리가 방문했던 그날 첫 개장을 한 금강산 해수욕장이었는데 물이 굉장히 맑고 개장한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무심코 조개껍데기인줄 알고 주웠던 것이 게여서 많이 놀랐었다. 북한의 모든 자연은 하나 같이 맑고 깨끗해 보는 이로 하여금 덩달아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마지막 날인 11일 우리는 바다의 금강이라 하여 붙여진 해금강과 신라시대의 네 화랑이 하루만 놀러 왔다가 경치가 너무 좋아서 삼일을 놀고 갔다하여 이름 붙여진 삼일포를 방문했다. 삼일포의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내 마음 또한 평온해지는 듯 했다.


▲ 해금강에 있는 삼일포 전경.


북한 가이드와 함께 한 삼일포에서는 남자 북한 가이드의 도라지 타령과 여자 북한 가이드의 북한 노래 두곡을 들을 수 있었다. 북한노래를 곱게 부르던 북한 여자 가이드분이 노래를 마치고 이런 좋은 인연으로 우리가 만나게 됐는데 다시 만나게 됐으면 좋겠고 다음번에 다시 만날 때는 꼭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삼일포에서 돌아오는 내내 귀에 맴돌았다.

2박3일의 기나긴 여정을 마친 우리는 지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핸드폰을 돌려받고는 당일 새벽 남한 관광객이 북한에서 총을 맞아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우리가 전날 즐겁게 놀았던 해변에서 그것도 총을 맞고 사망했다는 소식이 믿어지질 않았다. 다만 이번 사건이 단순 착오로 인한 사건이었기를 바라며, 삼가고인의 명복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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