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 정원
1  
  그것은 가면무도회였다. 떠들썩하고 유쾌하며 방탕한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은 가면무도회. 머리위의 샹들리에는 밤빛을 부수었고, 애욕처럼 검붉게 달아오른 카펫은 나태한 고양이의 뱃가죽처럼 물컹거렸다. 씁쓸하게 녹은 블랙커피와 같은 검은 정장에 하얀 가면을 쓴 사내들은 와인 병을 들고 춤추듯 하객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고, 얼굴에 요란하고 두터운 레이스가 달린 하얀 가면을 뒤집어 쓴 하객들의 모습은 한층 과장된 낭만주의의 독한 향수를 흩뿌리고 있었다.
  그들이 쓴 하얀 가면은 한 결 같이 입모양이 귀 언저리까지 찢어진 형상이었다. 모든 것들이 숨죽인 그 순백의 표면위에서, 유일한 생명체처럼 유쾌하게 곡선을 그리는 그것은 강렬한 자주 빛 와인선과 같았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마치 그가 얼마 전에 보았던 달리의 그림처럼 한층 기괴하고 뒤틀린 감상에 젖게 만들었다.
  수면기가 남은 흐릿한 그의 눈으로 그러한 광경들이 여과 없이 투사될 때, 그녀가 보였다. 기괴하게 뒤틀린 풍경 속에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는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한 손에는 작은 무언가가 들려있었다.
  검푸른 밤 구름이 구물거리며 샛노랗게 구워진 달을 삼키고 있었고, 삼켜진 달의 비명처럼 창가로 스며드는 달빛이 그녀의 몸을 적시고 있었다. 그 달빛에 드러난 그녀의 눈두덩은 마스카라가 번진 듯 검게 그을려 있었다. 그녀의 하얀 볼을 일직선으로 긋는 검은 줄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마치 우스꽝스럽게 슬픈 피에로와 같았다.
  그녀가 집어 들고 있는 건 딸기였다. 달빛에 빛나는 그것은 마치 석류석과도 같았으며, 아직 뛰고 있는 어린 짐승의 심장과도 같았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제 입에 물렸다. 뜨겁고도 비릿하며 탄력적이었던 그녀의 입술이 몇 겹의 주름을 지으며 그 심장을 베어냈다. 붉은 과육이 튀고, 향긋한 딸기 즙이 그녀의 턱을 적셨다. 그녀는 그렇게 한입 베어 먹고, 그를 쳐다보며 첨탑처럼 날카롭게 웃었다.
  창가너머로 어두운 밤빛에 반사된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그 기괴한 하얀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하얀 가면만이 유령처럼 창가에 떠있었다. 그것은 제아무리 벗겨내려 해도 벗겨지지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제 몸이었던 것처럼, 그의 안면을 끈적끈적하게 조여오고 있었다.

  끈적끈적하게 붙었던 가면의 생생한 촉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모래를 한 스푼 털어 넣은 듯 텁텁한 입 속 때문인지, 그는 다시 잠들지 못했다. 소파의 팔걸이에 목을 얹고 잤던 모양이었다. 뼈로 스며드는 시큰함이 목덜미에서 느껴졌다. 왁자지껄한 텔레비전소리 너머로 아내는 주방에서 분주해보였다. 아내는 싱크대에서 막 씻은 무언가를 믹서기에 담아 넣고 있었다. 딸기…… 딸기였다.
  언제부턴가 그는 입에 ‘딸기’라는 말을 올릴 때 마다 드는 아찔하고도 은근한 쾌감을 느꼈다.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딸기’라는 단어가 주는 본능적이고 직설적인 어감에 그는 어쩔 줄을 몰랐다. 천박한 싸구려 성인영화의 제목이 떠올라서 그런 건 아닐 테다. 아직 그는 그런 농담과 음담패설에 희희덕댈 만큼 능글맞은 아저씨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단어를 이루는 모음과 자음의 미묘한 교접은 딸기의 알싸한 달착지근함과 맞닿아있었다.
  그는 주방으로 저벅저벅 걸어나 남은 딸기를 믹서기에 담는 아내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내의 흰 목선을 타고 희미한 스킨냄새가 흘러내렸다.
  “뭐해?”
  “징그럽게, 왜이래요.”
  아내는 두어 번 그렇게 그의 감은 팔을 밀어내더니, 엷은 웃음기를 머금고 밀어내기를 그만두었다. 그의 뜨거운 들숨이 아내의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들숨에는 꺼칠꺼칠한 그의 수염과 같은 담배향이 돋아나있었다.
  “잼 만들려고요. 아버님께서 좋아하신다고 해서.”
  잼처럼 끈끈한 목소리로 아내는 나직이 속삭였다. 혓바닥에 잼이 닿았을 때 미뢰가 일련에 일어서듯, 그는 귓불에 붙은 솜털들이 일련에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상견례는 내일 모래인데,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열어놓은 베란다에서 아스팔트에 희석된 흐릿한 물비린내가 올라오고 있었다.
  “큰일이야, 이렇게 비가 와서.”
  그가 그렇게 말할 때, 그는 입안의 텁텁함이 아직 남아있음을 느꼈다. 바싹 마른 입안에서 뱉어진 그 말은 버석거려 모래성처럼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말라버린 입천장을 감싸고 있는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고 입술에는 기분 나쁜 끈적임이 비리게 남아있었다. 흰 설태가 단단하게 굳어 있는 혀를 굴려 말을 할 때마다 자음과 모음이 무뎌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스티로폼 상자에 담긴 딸기를 덥석 집어 들고 베어 물었다.
  “내일이면 그친다니까, 기다려봐야죠.”
  아내가 믹서기의 버튼을 누르자 오밀조밀 모여 있던 그것들은 붉은 과육을 튀기며 한 몸으로 뒤섞이고 있었다. 그것들은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머리카락이 주뼛 설 정도로 날카로운 모터소리가 주방을 가득 메웠다.
  마른 입속은 좀처럼 젖어들지 않았다. 그는 알 수 없는 허기와 갈증을 느끼며 다시 딸기를 집어 들었다.
아내는 간 딸기 즙을 볼이 넓은 스테인리스냄비에 담아 넣었다. 선홍빛의 딸기 즙과 얼큰했던 국물이 담겼던 투박한 냄비와의 만남이 조화롭지 못했다. 태만한 곡선을 그리며 들어가는 걸쭉한 딸기 즙을 탁탁 털어내는 아내의 손길에는 단호함이 심처럼 박혀있었다. 가스레인지의 불을 올리고 냄비에 담긴 딸기 즙을 나무주걱으로 휘휘 젓는 아내의 모습을 한동안 그는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2
  오랫동안 깊고 단 잠에서 헤엄쳐 나온 그녀는, 자신이 새우처럼 웅크려 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허로운 감회가 젖은 이불을 바스락 거리며 벗어낼 때, 껍질 벗겨진 새우처럼 그녀는 허전함을 느꼈다. 이 허전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릴 때 그녀는 탈 듯 입이 마르다는 걸 알았다.

  어제 저녁에 그의 결혼 소식을 K를 통해 전해 들었다. 뜬금없이 꺼낸 이야기가 아니냐는 그녀의 말에 K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콤팩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너, 예전에 그 사람이랑 사귀지 않았어?”
  K는 그와 그녀 사이를 사귄다는 동사로 엮었다.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었다. 그녀는 태연한척 희미한 미소를 띠우며 달그락 거리는 찻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다댔다. 은은하게 감싸는 커피 향 분자가 그녀의 오똑한 콧날을 간질이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들릴 듯 말듯 한 소리로 가벼운 부정을 하며 그녀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얀 찻잔의 가장자리에 그녀의 번들거리는 붉은색 립스틱 자국이 진하게 묻어있었다.

  그 날 저녁, 꿈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정원 속에서 그를 찾았다. 한참을 찾던 중, 그녀의 발밑에 이미 검게 시들어버린 열매가 맥없이 수풀 속에서 뒹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딱딱하게 마른 쥐똥과도 같아서, 손에 들린 그것을 코로 가까이 가져가 냄새를 맡기 전까지 그것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달착지근한 산딸기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싱그러운 신맛이 사라져버린 그 열매를 그녀는 알약처럼 입에 털어 넣었다. 입안이 너무 말랐다.

  참을 수 없을 만큼의 갈증과 허기가 얇은 만두피처럼 겹쳐 이중, 삼중으로 그녀를 감쌌다. 당장 입으로 무언가를 집어넣어야 해소될 갈증과 허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티눈의 뿌리처럼 오랫동안 깊숙이 박혀있는 것들이었다. 뽑으려고 하면 그것들은 더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
  “베코스(bekos)…….”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배시시 웃었다. 이죽대는 그녀의 입술사이로 하얀 고깔모자와 같은 이가 어둠속에 빛나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 단어는 입에 한번 찰싹 달라붙더니 좀처럼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베코스’라고 외친 뒤에는 어김없이 실없는 웃음이 뒤따랐다. 그녀는 이 단어에 중독되어버렸다. 단 하루라도 베코스를 외치지 않고 있자면 입이 근질거려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우연처럼 기묘하게 맞아떨어진 기회에 그 단어를 알게 되었다. 처음, 그의 자취방을 나왔을 때 그녀는 그의 전공서 하나가 자신의 가방에 들려있는 줄 몰랐다. 검은 샤프심 얼룩에는 그의 희미한 손가락 지문이 새겨져 있었다. 미처 마르지 못한 형광펜의 잉크가 번진 자국도 남아있었고, 그녀는 한참동안 인쇄된 글자보다 그가 남긴 자국들을 점자 읽듯 손가락으로 더듬어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에는 1.2. 언어의 기원 이라는 표제가 달려있었다. 그녀는 알 수 없는 인력에 끌린 듯 표제 밑의 새까만 글 덩어리들을 야금야금 삼켰다.

  ‘대체로 언어의 기원은 두 가지 견해가 맞서 왔는데, 하나는 언어가 신의 선물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가 인간의 발명이라는 것이다.’

  형편없이 구불구불 거리는 형광색 밑줄이 ‘언어의 기원’과 ‘신의 선물’ 그리고 ‘인간의 발명’이라는 부근에 그어져 있었다. 아무렇게나 그어버린 듯한, 그 형광색 밑줄은 좀처럼 꾸밀 줄 모르는 그와 닮아있었다. 딱딱하게 건축된 이론의 마천루를 지나 그녀는 마법과 같은 그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인간의 언어에 대한 관심을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고대 이집트의 왕 쌈메티쿠스(Psammetichus)는 어떤 언어와도 접촉 없이 자란 아이가 자발적으로 맨 처음 사용한 언어가 원어 일 것이라는 가정아래, 두 아이를 사회와 격리시킨 채 양과 더불어 자라게 했다. 그 결과 두 아이가 처음으로 발성한 것이 ‘bekos’였으며, 이 말은 프리지아어로 ‘빵’을 의미하는 단어였다는 것이다.’

  그녀는 중독되듯 그 이야기를 몇 번이고 훑어보았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이 뱃속에서 구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책을 덮었을 때 그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까르르 웃었다. 빈방에서 그녀의 웃음소리는 카랑카랑하게 요동쳤다.
  그렇게 그녀는 그 단어에 사로잡힌 포로가 되어버렸다. 아무도 인간의 말을 섞어주지 않는 심연에서, 배꼽 밑으로부터 부글거리며 올라오는 고독과 같은 허기가 아이의 목울대까지 올라왔을 때, 아이는 베코스! 라고 외쳤다. 
  그 소리에 놀란 양처럼 눈을 크게 뜰 그가 떠올라, 그녀는 그렇게 한 번 더 유쾌하게 웃었다. 그녀는 이제 자신도 그 베코스를 갈구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깨물 베코스에서는 딸기향이 나길 바랐다. 그녀의 오빠가 따주었던 그 싱그러운 산딸기향이 말이다.
  베코스를 깨물 때, 흐르는 그 과즙시럽에 그녀는 입술을 붉게 적시고 싶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녀는 자신을 갉아 먹어버릴 듯한 허기와 갈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불을 저만치 찬 그녀는 바퀴벌레처럼 바닥에서 숨죽여 기어가는 그 모든 고독들에게 축배를 하듯 외쳤다.
  “베코스!”

3
  집 안으로 그 앙칼진 향이 퍼지고 있었다. 딸기 즙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퍼지는 향은 형용할 수 없는 속성의 것이었다. 딸기 특유의 달착지근한 부드러움 속에 걸걸하고도 알싸한 침 냄새와 비슷한 날카로운 향이 탄산처럼 톡톡 쏘았다. 코의 점막을 적셔오는 그 향에 그는 묘한 흥분을 느꼈다. 아찔하고도 미묘한 그 향에 정신을 맡기고 있는 찰나였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아내는 불에 덴 것처럼 짧게 탄식했다.
  “설탕을 안 사왔어요. 잠시 사올 동안 이것 좀 봐줄래요?”
라고 물으면서 아내는 질척거리는 그 나무주걱을 그에게 떠맡겼다. 밑바닥에 누르지 않게 저어주기만 하면 된다면서 아내는 앞치마를 벗고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뭐라 말할 사이를 주지 않고 나가버린 아내를 뒤로한 채 그는 순순히 나무주걱을 저었다.
  분홍색 두꺼비의 살갗처럼 부풀어 오르는 기포와 서서히 조여 오는 점성이 참으로 기묘한 기분을 주는 순간 이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이런 단순반복의 가사가 실타래처럼 엉킨 그의 머릿속을 개운하게 해준다고 믿고 있었다. 산더미 같은 논문과 씨름하고 있을 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전두엽에 강렬한 경련과 함께 쥐가 오는 걸 느꼈다. 그럴 때면 그는 콩나물을 다듬거나 빨래를 하거나, 설거지를 했다.
  한동안 넋을 잃고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청량음료와 같은 개운함이 머릿속을 씻어준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맹신은 거의 강박적이라고 볼 수 있는 정리 벽에서 기인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는 자신의 책상위의 물건들이 위치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거나 제 위치에 없을 때 불안했고, 좀처럼 제대로 된 작업을 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르르 떨고 있는 그의 핸드폰 진동음에, 그는 마치 냄비에서 튀어나온 분홍빛 두꺼비를 본 것처럼 깜짝 놀랐다. 미 입력 번호였다. 막내가 부모님께 핸드폰을 사드렸다고 했는데, 혹 그 번호인가해서 그는 텁텁한 목을 가다듬고 핸드폰의 플립을 열었다.
  플립이 열렸을 때 그는 출처를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었다. 핸드폰 너머로는 꿈과 같이 뒤틀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배 오래간만이에요.”
  잠깐의 공백이 뜻 없는 허사처럼 걸려 있다가 나온 소리였다. 그는 자신의 기시감의 출처를 더듬더듬 더듬어갔다. 수십만 조각으로 잘린 기억의 퍼즐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가운데 긴장된 그의 전두엽보다, 텁텁한 입안이 먼저 그녀를 알아보았다.

4
  그녀와 함께 있었던 시간은 꿈처럼 몽롱한 세계를 가르고 있었다. 그녀의 전화가 그 몽롱한 시간을 살짝 삶아 그의 입속에 넣어주고 있었다. 반숙된 시간을 삼킬 때 그는 향긋한 딸기향이 자신의 입안에서 번져 감을 느꼈다.
  그와 그녀는 대학원시절 가까운 선후배 관계를 유지했었다. 그것은 단지 ‘가까웠던’ 사이였다. 그것은 마치 뜨거운 물에 얼음을 탄 냉커피와 같이 밍밍한 감정들이었다. 그렇게 외줄을 타는 그 관계는 어느 날 저녁 어떤 결정적 계기에 의해 한없이 추락했다. 그 날 저녁 그와 그녀는 정수리 위로 그 냉커피가 쏟아지는 기분을 만끽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계기라는 건 명확치 않았다. 버스가 끊겼으니 자고 가라던 그의 속모를 친절 때문이었는지, 그녀가 꿈처럼 들려준 오빠이야기 때문이었는지……. 아무튼 그에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사람의 감정 이란건 알 수 없는 곳에서 쏟아져 나와,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협곡으로 흘러내려가기 마련이었다.
  그날, 그는 와인과 함께 부모님이 보내온 딸기를 안주삼아 스티로폼채로 가져와 그녀와 나눠먹었다. 얼마간을 그렇게 마셨던가. 혀끝에 살짝 닿은 와인의 맛이 훈훈하게 감쌌고, 그는 발바닥과 손바닥 얼굴 순으로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녀의 입술자국이 와인 잔에 묻어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묘한 흥분을 주기에 충분했다. 몇 가닥의 주름이 잡혔을까. 그는 세어 보기라도 할 듯, 그녀의 와인 잔을 찬찬이 들여다보았다.
  “입이 마르네요.”
하고 그녀는 딸기를 한입 베어 물었다.
  “이거 보니까 오빠 생각나네.”
  그녀의 잔에서 눈을 때지 못하는 그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옛 오빠이야기를 꺼냈다.

  보잘것없는 그녀의 유년시절에 오빠는 산딸기처럼 달콤하고도 시큼하게 남아있었다. 작은 몸으로 날렵하게 산을 잘 탔던 오빠의 손에는 항상 산딸기 줄기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어찌나 귀신같이 잘 따던지 오빠가 따온 산딸기 줄기는 오빠의 다섯 손가락에서 뻗어 나온 것 만 같았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딸기를 따오는지 물었을 때, 오빠는 자신만이 아는 기막힌 장소가 있다고 했다. 그곳은 마치 정원과 같은 곳이었는데, 그곳에선 발 아래로 한걸음 때기가 무섭게 그 붉은 열매들이 숨죽이고 있었다고 했다. 녹슨 시소와 그네가 비밀스럽게 앉아있었고. 근처에는 작은 연못도 있었는데, 하얀 물질경이가 엷게 분홍빛 홍조를 띠고 있었으며, 투명한 연못물 아래에 있는 몽글몽글하게 잘 다듬어진 검은색 조약돌은 눈이 부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부푼 그녀는 그곳에 데려다 주라고 했지만, 오빠는 좀처럼 그곳에 그녀를 데려다 주지 않았다. 네가 이만큼 크면 같이 가자. 그녀의 오빠는 자신의 정수리에 손바닥을 얹고 그렇게 말했다.
좀처럼 닿을 수 없는 그 장소는 결국, 그녀 안에 작은 인조 정원을 만들게 했다. 그녀는 자주 꿈속에서 그 정원을 가꿨다. 잡초를 뽑고, 꽃에 물을 주며, 연못물에 얼굴을 씻고, 붉은 산딸기 열매를 자신의 치마폭에 가득 담는 꿈을.

  오빠는 그녀의 이야기를 좋아했다. ‘오늘 뭐했어?’ 라는 오빠의 향기롭게 마른 저음에는 그립고도 포근한 분말이 잔뜩 묻어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런 오빠의 저음을 좋아했다. 오늘 아이들과 무얼 하고 놀았는지 같은 사소한 이야기도 오빠는 다른 아이들이 듣지 못하게 자신의 귀에만 속삭여주라고 했다. 그녀는 소리가 밖으로 흘러내리지 못하게, 그 작은 손을 모아 오빠의 귀를 감쌌다. 그럴 때마다 오빠의 귓불이 산딸기처럼 물들었다. 오빠의 관자놀이에 흐르는 땀방울에서도 달콤 시큰한 과즙향이 날것만 같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고 나면 오빠는 싱긋 웃으며, 상처럼 딴 딸기를 붉은 과즙이 찐득하게 묻은 손으로 그녀의 입에 그 딸기들을 넣어주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입안에서 알알이 터지는 그 맛을 잊지 못했다. 지금 먹는 딸기에선 그때 입술이 붉게 젖어 드는 것도 모른 채 우물우물 삼켰던 산딸기 맛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언젠가, 오빠가 거울을 깼어요.”
  갑작스럽게 깨진 거울의 파편에 맞은 사람처럼 그는 뚱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느 날, 당시로선 귀했던 거울을 오빠가 깨버렸다는 것이었다. 거울 파편이 바닥에 튀었고, 그 파편들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잘 익은 산딸기만큼 얼굴이 붉게 익은 오빠는 어디론가 달렸다. 오빠만큼 당황하고 무서웠던 그녀가 뒤따라 갈 때 오빠는 뛰던 걸음을 멈추었다.
  “넌 집으로 돌아가.”
  “싫어! 엄마한테 혼난단 말이야!”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오빠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주머니 속에서 그 붉은 열매들을 꺼내 그녀의 손에 가득 쥐어주었다.
  “돌아가서 이거 먹고 기다리고 있어. 이거 다 먹으면 더 많이 따올 테니까.”
  오빠는 한참을 두리번거리더니, 잽싸게 손을 동그랗게 모으고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일 때, 오빠는 어느새 어디론가 뛰어가고 있었다. 오빠의 발에서 튀어 오르는 먼지와 자갈들은 뿌연 연무를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연무 속으로 오빠는 꿈처럼 사라졌다.
  그녀는 손에 가득 담긴 그 붉은 열매들을 무척 아껴가면서 삼켰다. 불안감이었을지 모를 공포가 엄습할 때 그녀는 처음으로 입이 마른다는 걸 알았다. 입이 마를 때마다 그녀는 한 알씩 한 알씩 그것들을 삼켰다.

  그녀가 ‘오빠’라 할 때, ‘빠’발음에서 파열되 나오는 그 공기는 그를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기묘한 기분에 몰아넣기 충분했다. 이야기가 그쯤에서 무르익었을 때 마치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는 그녀가 반쯤 입에 문 딸기를 손으로 잡아 내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그녀의 침에 젖은 반 토막 난 딸기처럼 그는 눅눅하게 그녀 향해 똬리를 틀었다. 그녀는 일찍이 저항을 포기라도 한듯 그 똬리에 제 몸을 맡겼다. 와인 때문이었는지 그의 몸은 따뜻했다. 끌어안은 팔, 방패 같은 가슴, 철문을 박은 듯한 배, 뭉툭한 날개 뼈, 마른 나무 가지처럼 엉키는 다리, 어느 하나 할 것 없이 은은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것들은 그녀 자신의 차가운 몸을 데우고 있었다. 그녀는 얼음으로 만든 송곳과 같았던 자신의 몸이 서서히 녹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오빠는 어떻게 됐어?”
  그는 담배필터를 깊숙이 가슴속에 새기듯 빨며 그렇게 말했다. 그건 한참만의 반응이었다. 그의 팔베개에서 잠시 눈을 붙였던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물기가 엉긴 그녀의 긴 속눈썹이 그의 투박한 관자놀이에 닿았다. 그녀는 소리가 혹 세어 흐를 것을 걱정하듯 정성스럽게 손을 동그랗게 모아 그의 귀에 갖다 댔다.
  “죽었어요.”
  그녀의 말에도 약간의 물기가 젖어있었다. 그녀의 오빠는 그 약속을 끝내 지키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산딸기 한 알을 삼킬 때도, 그녀가 오빠 대신 매를 맞아도, 입안에 남은 산딸기의 달콤 시큼한 냄새가 가셔도, 오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오빠는 근 한 달 만에 찾을 수 있었다. 장마로 불어난 개울 위에서 오빠의 작은 몸집은 정처 없이 부유했다. 마을에서 매년 한 두 사람이 죽었을 정도로 사고다발지역이었던 개울가였다. 건너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그 개울을 건너야했는데, 자칫 잘못하여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거나 넘어지게 되면 여지없이 거센 물산에 휩쓸려갔다. 주로 희생자들은 힘없는 아이들이나 노인들이었다. 오빠는 그런 희생자들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들것에 실렸던 오빠의 작은 몸집은 조금 불어나있었다. 푸르뎅뎅한 오빠의 살결을 보았을 때 그녀는 입안이 다시 바싹 마름을 느꼈다.
  “그 이후로, 아직도 입이 너무 말라요.”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그는 그대로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속삭임의 무게가 그의 눈꺼풀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듣고 있어요? 라는 말이 한없이 떨어지는 어둠의 심연 속에서 유령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왔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그는 그녀가 이불을 허물처럼 남기고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치워진 그의 자취방에서 그녀의 흔적은 말끔히 거세되어 있었다. 그는 마치 꿈을 꾼 것 만 같았다.

5
  “결혼하신다고 들었어요. 축하드려요.”
  그는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것이 꿈이 아니었음을 자각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쳤을 때 그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자신에게 찬물처럼 껴 얹어짐을 느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알 수 없는 곳에서 쏟아져 나와,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협곡으로 흘러내려가기 마련이었다. 그는 옆으로 세는 물길과 맞닥뜨린 것만 같았다.
  “전화까지 해주고, 고마워. 아! 나 지금 좀 바쁘니까. 나중에 통화하도록 하자.”
  그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대답이 넘어오기 전에 플립을 닫았다. 그녀와의 통화 때문이었을까. 나무주걱이 스테인리스바닥에 닿았을 때, 약간 누른 느낌이 그의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의 배터리를 뽑아 던지며, 요즘 부쩍 전화기록부에 정리해야 할 사람들이 많아졌음을 느꼈다. 내일 꼭 대리점에 가서 핸드폰기기와 번호도 함께 바꾸리라. 피어오르는 정리 벽에 흥분을 느끼는 그의 표정은 마치 하얀 가면과 같았다. 그는 다시 나무주걱을 휘저었다.

  갑작스럽게 끊기 핸드폰을 침대 위에 그대로 놓은 채,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잠이 자신을 껴안음을 느꼈다. 그녀의 감싸 안은 잠은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 저항하면 저항 할수록 더욱더 포근하게 엉기는 잠은 그가 틀었던 똬리와 같은 느낌이었다.
  방금 전 무리하게 집어삼켰던 열매 때문이었다. 타 버릴 것만 같은 목마름과 허기를 참지 못하고 그녀는 달그락거리는 통에 담겨있는 그 열매들을 한입에 털어 삼켰다. 알알이 입안에서 부서지는 그 열매들에는 물기보다는 분말가루와 같은 퍼석함이 남아있었다. 점점 뭉개지는 의식 속에서 그녀는 붉은 과육이 살점처럼 튀는 걸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꿈속에서 차곡차곡 만들어놓았던 그녀의 인공정원에 다시 발이 닿았음을 느꼈다. 닿은 발톱의 끝마저도 녹색 빛으로 적실 것만 같은 싱그러운 풀밭은 폭신했다. 비가 내렸던 걸까. 젖은 풀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옴을 느꼈다.
  그녀는 익숙하게 자신의 발밑에서 숨죽이고 있는 그 붉은 열매들을 따 바구니에 넣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채워진 바구니에서 향긋한 그 과즙이 진물처럼 흐를 때 그녀는 작은 연못으로 다가갈 것이다. 여린 봄빛이 부서지는 그 연못물에 열매를 정성스럽게 씻을 것이다. 그와 오빠가 없는 그 정원에서 그녀는 베코스를 만들 작정이었다. 부드러운 달콤함에 알싸하게 침샘을 찌르는 새콤함이 깃든 딸기시럽이 잔뜩 속을 채운 베코스를 말이다. 그 생각만으로 그녀는 실로 오래간만에 입안이 젖어오는걸 느꼈다.
  그녀는 얼굴을 간질이는 여린 햇살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꺼풀을 투과하는 빛으로 인해 그녀의 시야에는 아득한 분홍빛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6
  아내에게 주걱을 내어준 그는 다시 분홍빛 바다에 제 몸을 던졌다. 아직 깨어있는 의식의 담벼락을 통해 설탕이 들어가 잔뜩 졸여지고 있는 딸기잼향이 담 넘어오고 있었다. 꿈을 향해 무너지고 있는 정신 속에서 그는, 어쩌면 자신을 덮었던 가면의 느낌이 그렇게 썩 나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젖어들었다. 어쩌면 가면은 씌워진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집어 들어 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생각의 파도가 그쯤에 닿았을 때, 그는 다시 입안이 젖어오는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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