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항상 그가 떠 있던 무지막지하게 텅 빈 바다에서 시작된다. 미지근한 물외에는 모든 것이 생략되었다. 파도도 없고, 하늘도 없고, 발아래서 돌아다니던 열대어도 없고, 온 몸에 생채기를 남긴 산호도 없다. 다만 검은 배경에 미지근한 물과 다른 한편의 빛이 있을 뿐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빛에 이끌림을 받는다. 꿈이라는 생각이 살풋 들면서도 익사에 대한 두려움도 여전하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빛으로 나아가려 한다.

  씨앗에 이윽고 소나기가 닿았다. 게걸스럽게 물기를 빨아들이는 씨앗은 익사체(溺死體)같이 퉁퉁 불어 올랐다. 이제 그는 작은 떡잎 두 장을 땅 위로 들이밀었다. 낮에도 어두운 숲속에서 하늘도 보이지 않는데, 어디서 비는 내리는지. 빗방울방울은 수많은 잎사귀들을 가로지르며 흘러 흘러 떨어진다. 앞으로도 나무는 물을 빨아들일 것이다. 주위의 키 큰 나무들을 제치고 햇빛을 머금기 위해 가느다란 물 대롱이 되어. 끝내는 하늘에 다다를 것이다. 조그마한 힘에도 쓰러져 버릴 것 같은 가느다란 대롱은, 이제 몸집을 불려 보기로 했다. 하늘에 맞닿은 잎새들이 공중에서 하늘거린다. 마침내 그가 세 사람의 아름보다 두꺼운 살을 지니게 되었다. 이제 그는 이 정글에서 무시할 수 없는 하나의 세계가 된다. 수 만 가지 곰팡이가 보이지 않는 영역을 차지한다. 수백 가지 이끼가 그를 녹색으로 감춘다. 쉰여 가지 버섯들이 그의 몸을 교대로 범접한다. 스무 종의 개미들은 그의 굳은 겉껍질에서 왕국을 이룬다. 십여 종의 새들은 그의 팔에 몸을 기대 살것이다. 나무는 더욱더 굳은 뿌리로 물을 빨아들이고, 그의 잎에서는 몇 가지의 냄새가 주위의 경쟁자들을 위협한다. 그의 잎들이 하늘을 모두 가리고 태양을 독점하것다. 무엇이 그를 넘어뜨릴 수 있으리.

  나무는 어느 순간 쓰러졌다. 찌지지 직 하는 비명이 하늘을 갈랐다. 얼마간 그의 밑둥은 죽음의 공포를 기억하며 울고 있을 것이다. 검은 부엽토 위도 햇빛이 들이닥치자 군데 군데 포연과 같이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왜소한 근육질의 원주민들은 이제 청바지와 체크무늬의 셔츠를 입고, 그르렁거리며 날카로운 칼날을 다음 번 나무에게 들이댔다. 새가 날아오르고, 뭍짐승은 멀리 사라졌다. 핏밥이 튀고 연기가 스멀거리고, 기름 냄새, 사람의 땀 냄새가 진동을 한다. 크레인은 쓰러진 나무의 하단을 그악스럽게 그러쥐며 커다란 차에 옮겨 실었다. 인도네시아의 벌목기업인 South Eastern은 대한민국 세영 통상 앞으로 나무를 선적한다. 나무들은 서류와 돈 위에 세영 통상을 거쳐 공사장의 부목이 되기도 하고, 어느 영세한 가구공장의 원목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런데 이 나무는 기기묘묘하게도 종이에서 이루어진 거래가 아닌 세영 통상의 사무실까지 오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서울의 모처. 세영 통상이 있는 빌딩의 5층으로 배달되는 동안, 나무는 몇 가지 상처를 입게 되었다. P는 새 책상을 받게 된 모처럼의 기분을 망쳐 버렸다. 그래도 거래처에서 싸게 받아 온 것이어서, 함부로 항의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틀 뒤 도착할 새 쇼파와 쿠션의자의 배달에는 조금 신경을 써 달라고 전화를 걸어 너털웃음을 한번 지었을 뿐이다. 전화 너머로 다음에도 잘 부탁합니다라는 의례적인 인사가 건네진다. 김 사장님도 아시다시피, 인도네시아라는 나라가 정치적으로 좀 불안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저희는 항상 납일을 지키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아 예 알고 있습니다. 그걸 모르면 되겠습니까. P사장 언제 술이나 한번 합시다 라는 의례적인 인사가 다시 건네진다. 그 날 통화는 그것으로 족했다.

  P는? 자신의 의자에 앉아 두 발을 책상 위에 얹었다. 나이가 하나, 둘 늘고 나서 밤잠은 줄고, 낮잠은 늘었다. 작은 사무실을 스크린으로 가려 안쪽은 자신의 사무실로 이용한다. 밖은 비서 겸 경리는 보는 젊은 여자를 두었다. 벽 한쪽으로 절지크기의 세계지도가 펼쳐 있다. 그 아래로 멋없는 작은 분재와 난초 두어 분. 다른 한편에는 조악한 유화 한 점이 들어온다. P는 낮잠을 한번 청해본다. 요즘 P는 잠자리가 사납다. 육 개월 전 인도네시아의 주요 거래처 중의 하나인 사우스 이스턴의 초청으로 인도네시아 벌목현장을 간 게 화근이었다. 물론 세영 통상이야 거대 수입업자들에 비해서는 구멍가게에 불과하지만. 제 돈하나 안 들어가는 외유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말은 현장답사지만, 자바에 있는 본사에서 수입업자들끼리의 형식적인 워크숍이 전부다. 그 외의 시간은 휴양지로 개발된 주변 작은 섬에서 관광을 하는 것이다.
  문제는 그가 어느 작은 섬에서 중형 세나스기를 타고 본섬으로 돌아오는 도중 벌어졌다. 쾅하는 폭발음과 함께 기수가 수직이 되서 바다에 떨어지고 만 것이다. 그는 순간 그 때를 자신의 마지막으로 알았다. 무엇이 그를 바다 한가운데로 떨어뜨려야 했는지. 그것이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RPG인지 마른하늘에 떨어진 날벼락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정신을 잃고 깼다. 눈을 떠보니 P는 열대의 바다 위에 떠 있다. 바다는 미지근하고 미끈거렸다. 비릿한 바다 내음이 코를 찌르고 올라왔다. 왠지 구토가 인다. 온 몸이 물에 젖어 있었지만, 머리에서 더 한기가 느껴졌다. 뒷머리 깨를 만져 보니 피가 새어 나온다. 피를 보고 놀란 가슴에 헛구역질이 나온다. 몇 번 경련 같은 구토가 지나가자 P는 스스로의 처지를 깨달았다. 그는 열대의 바다 한가운데 동동거리며 떠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햇빛이 바람을 따라, 파도와 함께 일렁거렸다. 맑은 바다 아래에선 열대어들이 톡 쏘는 듯이 잘금거린다. P는 수영 따윈 배운 적이 없는데도 이렇게 바다 위에 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미친 듯 발광하기보다 가만히 있는 게, 힘을 비축하는 길이란 것을 배웠다. 그러자 더 떠 있기도 쉬웠다. 한참을 하늘을 향해 누워 떠다닌다.

  얼마간은 그렇게 떠 있었다. 마치 양수 속에서 유영하는 태아나 되는 것처럼. 한참이나.

  파도를 따라 출렁이는 순간 눈앞에 뭍이 들어왔다. 얼마 떨어져 보이지 않는 거리에 해변이 있었다. 순간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저 곳까지 몸을 저어 가면 돼. 헤엄을 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동동거리며 떠있기는 쉬워도 원하는 곳으로 나아가기는 좀처럼 힘들다. 조금만 가면 P는 뭍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말이 통하지 않는 현지인들에게 발견되겠지만 게 중에는 영어를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안 되면 여차저차해서 큰 섬에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지. 만일 그렇지 못하면 어떻게 한다? 그는 대한민국 세영 통상의 인도네시아 산 원목 수입업자다. P는 거래처들, 그 많은 발주처와 텔렉스들을 어떻게 할까 겁이 나기 시작한다. 머릿속에는 마침내 그가 실종선고를 깨고 세영 통상에 돌아 간 자신이 그려진다. 한 자는 넘게 덥수룩한 수염에 이미 재혼한 아내 따위는 제처 버리고 미스 박!하며 사무실의 문을 열며 들이닥치면. 허리까지 들어찬 텔렉스 뭉치가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을 것이다. 겁이 나기 시작하자 손사래가 더욱 급해진다. 마침내 털썩하고 힘이 빠지자, 그는 한참을 내저은 손사래에도 자신의 위치가 그다지 바뀌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파도는 여전히 타원의 환호(環瑚)를 따라 P에게 밀려든다. 그가 손사래를 치면 다시 그에게 밀려오고, 다시 손을 내저으면 밀려오고……. 그는 구원의 섬에서 점점 멀어진다. 이렇게 멀어지면 언젠가는 굶어 죽겠지. 열대의 바다니까 얼어 죽지는 않을 거야. 하루 밤낮을 굶는다. 태어나서 처음이다. 이렇게 죽고 나면 온몸이 해삼처럼 불어터질 거야. 두려움에 손을 더 힘차게 내젓는다. 이렇게 발악을 하면 몸은 가라앉기 시작한다. 몸은 떠 있으되 그는 여전하게 바다 한 가운데다. 여전히 파도는 밀려오고, 밀려오고 밀려오고 ……. 힘이 다하면 잠이 든다. P는 잠이 들면 죽을 것만 같다. 축축하고 비릿한 가운데에서도 잠이 온다는 것은 기이하다. 그는 정신을 잃는다.

  P가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그 섬의 해변이었다. 그가 처음 해변에 떠밀려 왔을 때만 해도 발작적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바다의 아이러니 한 점 때문이었다. 그가 그토록 발악을 하며 건너려고 했을 때는 파도로 가로막더니, 정작 P가 정신을 잃고 나자 얌전히 해변으로 데려왔다. 미친 듯이 웃고 나자 속이 후련해진 느낌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다만큼이나 넓은 해변이 흰 모래로 반짝였다. 입안이 모래로 버석거렸다. 배가 고프다. 언제 다친 지도 모를 생채기들이 쓰라렸다. 배가 고프다.
P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쨌든 며칠간의 쉽지 않은 경험을 거쳐 그는 돌아왔다. 벌써 일 년도 다 되어가는 일인데, 이제 와서 무슨 변덕이람? 이제 와서 꿈에 나타나서 괴롭히다니. 그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에 빠져 희미한 잠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꿈은 항상 그가 떠 있던 무지막지하게 텅 빈 바다에서 시작된다. 미지근한 물외에는 모든 것이 생략되었다. 파도도 없고, 하늘도 없고, 발아래서 돌아다니던 열대어도 없고, 온 몸에 생채기를 남긴 산호도 없다. 다만 검은 배경에 미지근한 물과 다른 한편의 빛이 있을 뿐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빛에 이끌림을 받는다. 꿈이라는 생각이 살풋 들면서도 익사에 대한 두려움도 여전하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빛으로 나아가려 한다. 웬걸. 도리어 그의 손사래에 고요하던 바다가 요동치기 시작한다. 작은 그의 존재가 거대한 바다에 풍랑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기이하다. 그런 생각이 드는 사이 거대한 파도가 쳐들어온다. 이제 더 이상 빛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 손사래를 쳐야 한다. 파도는 밀려오고, 밀려오고… 그의 몸은 밀려나고 밀려나고…빛으로부터는 멀어지고, 멀어지고……. 단지 빛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으려는 그의 움직임에 파도는 더욱 거세진다. 이 기이한 부채(負債)는 어김없이 돌아와 악순환을 반복한다.
  파도는 연달아 그의 정수리를 치댄다. 이리 저리에서 파도가 머리를 향해 두드린다. 이윽고 머리 꼭대기까지 물이 차고 나면 그는 숨이 막혀 헐떡인다. 그렇게 턱턱 막히는 숨 때문에 절로 눈이 떠졌다.

토옥. 톡.
토옥. 톡.

  눈을 뜨자 뭔가가 떨어진다. 다시 보니 물방울이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그의 미간을 정 조준해 떨어져 내린다. 언젠가 들었던 중국의 고문이야기가 생각났다. 뜨거운 뙤약볕아래 몸을 세워서 매달아 놓고,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도록 몸 주위에 칼날을 단다. 그리고 머리 위 항아리에서 물방울을 한 방울씩 미간에 떨어트리면, 결국 미쳐서 죽는다는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였다. P가 있는 자리의 천장에서는 물이 토옥 토옥 떨어지고 있다. 망할 놈의 부실공사. 대한민국은 이래서 안 돼. 왠지 떨어지는 물방울에 맞아서 머리가 아프다고 하기에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아마 꿈 때문이겠지.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온다. 이런 제길. 책상 위를 보니 펜으로 쓴 메모들이 모두 물에 젖어 있다. 관리인에게 이번엔 정말 따끔하게 말해두어야 겠어. 전화기를 들었다.

  배관공들은 전화를 건지 두 시간 만에 나타났다. 물받이로 둔 양동이를 미스 김이 세 번을 비운 후였다. 두 사람 중 좀 더 책임자로 보이는 사람을 향해서 P는 다짜고짜 반말이다. 벌써 두 번 짼데. 어째서 이런 거요? 저번에는 분명 다 고쳤다고 하지 않았어? 당신 지금 장난하는 거야? 지금 사업상 중요한 서류들이 다 젖었다고. 이거 이러다 건물 무너지는 거 아니야? 예.예. 사장님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런 경우는 저도 처음이라서.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불려 온 배관공은 P에게 쩔쩔매며 말한다. 드라이버를 세심하게 집어넣더니 눅눅해진 석고보드를 떼어 낸다. 석고보드 한 장을 떼 내고 뭔가 이것저것을 만지는 듯하다. 몽키 좀 줘 봐. 니빠. 이거 니미 왜 이런 거야. P는 멀리서 서서 그들을 노려보았다. 물론 아무 것도 모르는 P가 본다고 달라질 것은 없지만. 아마 그 둘의 작업속도는 배가 될 것이다. 나 참. 자네가 한번 올라가서 봐. 이번엔 보조가 사다리를 타고 쭈뼛거리며 올라간다. 어때? 글쎄요. 글쎄요는 무슨 글쎄요야?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그러게요. 깨끗한데요. 깨끗한 게 아니라 아무 것도 없잖아. 이 멍충아. 아 그러내요. 내려와 임마. 보드판은 갈고. 공구 챙겨서 밖에 나가 있어. 네.
  저기 담배 한대 피워도 되겠습니까. 배관공은 초조한 듯 담배를 몇 모금 빨고 나서 비굴한 웃음을 짓는다. 사장님. 저기 저희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P의 두 눈 사이로 내천(川) 자가 그려진다. 하하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제가 저번에도 그랬지마는. 이거 보드판. 아 이 뚜껑 말입니다. 열어 보니까. 이 보드판은 축축하게 젖어 있는데, 바로 위 콘크리트 천장이나 주위는 멀쩡하다 이겁니다. 수도관이나 보일러관이 지나가는 것도 아니고, 이 위는 텅 비어있는 뎁쇼. 귀신이 곡할 노릇입니다. 그의 얼굴은 곡하는 귀신과 같이 일그러졌다. 그럼 내가 무슨 장난이라도 친다는 말이요? 그건 아니고요. 사장님같이 점잖으신 분이. 다만 저희로써는 젖어서 물이 떨어지는 보드판을 가는 것 말곤 특별이 방법이 없다 이겁니다. 지금 보세요. 30분이 되도록 멀쩡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군. 그러니까, 사정을 좀 알아주시고, 나중에는 좀 더 전문적인 사람을 부르시는 게……. 뭐요? 그럼 당신들은 전문이 아니란 소리요? 아니 뭐 그런 뜻은 아니지만. 아무튼 다음에도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지 전화를 주십시오. 배관공은 도망치듯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미리 보조를 시켜 공구를 정리해 나가 있게 한 이유가 있었다. P는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무실 안 공기는 벌서 눅눅해 진 것만 같다. 이유 없이 물이 샌다는 게 말이 돼. 돌팔이 같은 놈들. 어질러진 책상을 미스 김이 솜씨 있게 치운다. 뭐 별거 있나. 밀린 일이나 해야지. 필요한 게 없느냐는 미스 김에 말에 자신에게 타이르듯 답을 한다. P는 눈을 게슴츠레 떠본다. 가늘게 뜬눈에 물기로 희미해진 글씨들이 스멀거리며 본뜻을 일러준다. 저기 약속들이 적힌 포스트잇이 다 젖어 버렸네요. 그러네. 미스 김이 할 일이 조금 늘어나겠군. 부탁해. 그래. 무슨 말인지 알지? 그리고 Northern lake에서 텔렉스는 들어왔어? 방금요. 북미 산 적송이라고 되어 있는 거요. 그것도 좀 가져다 줘. 네. 천을 찢는 듯한 종이 뜯는 소리가 들린다. 아 그리고 오늘 Y사장님이 저녁? 같이 드시러 사무실에 오시겠대요. 그래? 여자는 여간하지 않다. 간단한 일이긴 해도 경리는 딱 부러지는 것이 좋다.

  미스 김의 발이 움직인다. 여자는 아까부터 자신의 작은 발을 앞뒤로 흔들고 있다. 작은 칸막이 너머로 그것을 훔쳐보는 P의 눈이 조그맣게 빛난다. 여자는 어딘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극도로 조용하며, 약간 결벽증을 가진 듯이 보인다. 여자는 자신의 일이 없으면 불안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마치 공회전 중인 자동차처럼, 크랭크 암이 앞뒤로 움직이듯, 여자는 자신의 얇은 다리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그 조그만 발을 앞뒤로 움직인다. 발가벗은 여자의 발은 묘한 데가 있었다. P는 지금은 양말에 싸여 있는 여자의 발을 보며 묘한 기분에 몸을 떨었다.
  여자는 어딘가 병적인 데가 있었다. P가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구한 경리였다. 간단한 일들뿐이었지만, 아무튼 일은 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이한 술자리에서 P는 여자를 침대로 끌어들였다. 처음에 여자는 주저했지만 눅눅한 이불 아래서 오히려 난폭하게 굴어 P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P는 가슴 팍 한가운데 깊은 손톱자국을 남겨야 했다. 여자가 깨문 어깨에서는 피가 새나 왔다. 그러나 여자는 일 처리가 발랐다.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차가운 나무인형이 되는 듯 했다. 일이 없는 때, 여자는 꼼짝 않고, 자리에 앉아서 기계적으로 발을 까닥일 뿐이다.

  여섯 달 만에 P는 Y사장과 다시 술잔을 기울에게 되었다. 어느 고급 술집이 그 장소였다. Y는 북미 산 노송을 취급하는 바이어다. 이번에 캐나다에 새로운 곳이 벌목지구로 되었다. 그 쪽에 떨어지는 물량을 기대하고 P는 Y에게 선을 대는 중이다. 술자리가 무르익고, 손님이나 호스티스나 모두 취해서 일렁이기는 마찬가지다. 술잔을 돌리고 여자들에 볼에 호기를 부려 입을 댄다. 그러니까. 제가 동남아 갔다가 세 달 만에 돌아오게 된 것이, 참 행운이었지요. 눈을 떠보니까 어느 무인도 해변가가 아니겠습니까. 영화 나온 그대로 모래밭 있고, 야자수 있고. 어머 진짜 영화다 영화! P 옆의 여자가 팔에 매달리며 호들갑이다. 그렇게 거기서 하루를 꼬박 새우고 굶다가 발견된 거 아닙니까. 제가 지금 생각해도 오금이 저려서. P는 다시 그 섬에서 굶던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오금이 저린다. 예전에 본 TV외화 중에서 조금 끔찍한 내용이 있었다. 무인도에 갇힌 남자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살을 하나 둘씩 칼로 베어 먹는 그저 그런 영화였다. 막상 자신이 그런 상황이 되자, 예전에 봤던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 아마 두 번째 새벽이 밝아오는 동안, P는 제 살을 먹을 생각을 했었다. 조금만 늦었다면, 정말 레이디 핑거를 먹는 영화의 주인공이 될 뻔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섬이 옛날에는 무슨 유배지였던가 봅니다. 유배지? 네. 말 안 듣는 놈들 잡아다 아무 것도 없는 섬에 내려놓고 굶겨 죽이는 겁니다. 그래서 그 섬에는 귀신들이 깃들여 있다나. 어머 사장님 저는 무서운 이야기는 싫어요. 건너편 여자가 Y의 팔을 끌어당긴다. 무섭기는 무슨. Y가 여자의 어깨를 토닥인다. P는 여자의 어깨에 얹은 Y의 살찐 손가락을 보면서 말을 이어 간다. 제가 지나가는 통통배에 살려 달라, 살려 달라,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데, 아 그 미련한 놈들이 겁을 집어먹고 수누카! 수누카!? 비명을 지르면서 자꾸 도망갑니다. 그렇게 굶고 있다가 경찰 순시선이 와서 데려가더라고요. 이번엔 경찰 놈들이 저를 손가락질하면서 수누카, 수누카하며 웃는 거 아닙니까? 수누카? Y가 묻는다. 예. 나중에 수누카가 뭐냐고 물어보니까. P는 잠시 운을 뗀다. 물어보니까? Y가 재촉한다. 그게 물귀신이라는 것 아닙니까. 물귀신? 히히 그거 P사장하고 잘 어울리네. 자네가 처음 이 업계에 발을 들여 놀 때가 꼭 물귀신 같았다니까. 자네 덕에 잘 나가던 다른 회사 세 군데나 물을 먹었으니, 제대로 벌 받았군 그래. 별 볼일 없던 P의 옛일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P가 의뭉스레 대답한다. 예, 뭐 짠물은 원 없이 먹고 왔습니다.
  Y가 숨을 크게 들여 내쉰다. 아무튼 반가워. 이거 그런 일을 당한지도 모르고, 이제야 얼굴을 보다니. 자네나 나나 일이 원수야. 어쨌든 이제 자네는 내 사람이야. Y는 내 사람을 힘주어 말한다. 장담하는데 이제 자네도 한 몫 잡게 될 테니, 이번에 인도네시아하고 캐나다하고 수입선 조정을 잘해 봐. 이번이 자네 사업 크는데 좋은 기회라고. P는 이번 일이 잘됐다는 느낌이 든다. 예 Y사장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Y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말한다. 아 그리고 아까 보니까 경리가 바뀌었던데. 아, 미스 김이요? 예, 제가 사고당하고 돌아왔는데, 전에 있던 여자가 그냥 도망가지 않았겠습니까. 퇴직금까지 다 정산해가지고. P의 목소리에 분노가 묻어난다. 나 참. 6년이나 데리고 썼는데. 고게 내가 세 달이 넘게 소식이 없으니 그냥 죽었다 싶었겠지요. 그래? 그래도 지금 있는 애가 얼굴도 더 반반한 게 오히려 더 좋은 것 같던데. 예 손끝이 매워서 일도 잘합니다. 오히려 잘됐구만 뭘. 어머 그런 아가씨를 경리로 두고 계셔요? 야 일석이조네. 예는 일석이조가 뭐니? 금상첨화지 금상첨화. 어머 그래. 너 잘났다 얘. 이것들아 금상첨화는 무슨, 그건 재색겸비라고 하는 거야. 어디 어르신들 앞에서 문자를 쓰고 있어. Y가 옆의 여자를 더듬으며 말했다. 아이 참. P가 술잔을 입에 털어 넣는다. 이제 술이 술이 아니라 물이다. 이쯤 되면 자리를 파할 때가 된 것이다.
자네 한잔 더 받어. 예, 형님. 형님? 히히 자네도 어지간하게 넉살이 좋구만. Y는 P에게 술을 따른다. 아. 이 사람 좀 취했구나. Y는 술잔 가득히 술을 붇는다. 술을 붇는다. 술이 이글이글 차오른다. 술이 넘친다. 이 사람 좀 취했구나. 술병에서는 술이 한 가득 쏟아져 나온다. 술은 이미 잔을 다 채우고도 남아 테이블을 따라 흘러내린다. 어, 아직도 술병에는 술이 한 가득 인데. 이거 내가 취했구나. 술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테이블 위로 작은 시내를 만들어 폭포가 되어 떨어진다. 그의 바지 깨가 오줌을 지린 것처럼 젖었다. 술은 바지를 젖게 하고 그의 다리 속살을 따라 구두로 흘러내린다. 어. 내가 정말 취했구나. 젖은 구두를 넘어서 술은 계속 흘러내린다. Y는 어려워 보이는 자세로 여전히 술을 따르고 있다. 술잔에서는 잔 파문들이 번져 내린다. 어느새 술을 발목까지 방의 바닥을 채웠다. 여전히 술은 쏟아진다. 야아. 끝없이 흘러나오는 구나. 어이 P사장. 내가 정을 철철 흘러넘치게 따라 준다고. 어유, 사장님도. 제 잔 빈 거는 안보이세요? 너는 하루종일 일 년 내내 하는 일이, 술 처먹는 일인 게 술타령이냐. 어머 싫어요. 그런 말씀하시면. 아. 어느새 술은 허리까지 차올랐구나. 떠다닌다. 유리잔에 빈 접시들이. 빈 병들이. 비싼 안주들이. 가래침에 젖은 휴지와, 건강을 위해 세 번만 빨고 버린다는, Y의 피다만 담배꽁초까지. 어느새 몸이 떠오르는 기분이다. 적당이 동동거리며 P도 Y도 여자들도 떠 있다. 여전히 떠오른 테이블 위에 유리잔이 버거운 Y의 정을 토해내고 있을 뿐이다.

  구겨진 신문지는 멀리서 보기에 몸을 웅크린 태아처럼 보인다. 어쩌면 물을 빨아들이는 커다란 열대나무의 씨앗처럼 보이기도 했다. 문득, 구겨진 신문지들 사이에 그 자신이 알몸을 웅크리고 있는 환영을 보았다. 눈을 크게 꿈적거리며 다시 본다. 그것은 어느 새 사라지고 없다. 그 씨앗들은 게걸스럽게 물을 머금고 한 것 부풀어 오르는 중이었다.


  P는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무리 술에 취해 헛것이 보인다지만, Y는 동동거리며 떠 있으면서도 잘도 술을 따라 내고 있다. 술병은 이상한 맷돌의 이야기와 같다. 끊임없이 소금을 토해내는 맷돌처럼, 끊임없이 술을 토해낸다. 술병 쪽도 우습기는 마찬가지다. 이거 완전히 주지육림이구나. P가 내뱉듯 말한다. 그게 뭐야? 주지‥뭐? P의 말을 주워들은 옆의 여자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식한 것들. P사장! 주지육림가지고 되겠어? 주해육산이다! 주해육산! Y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P는 어지러움을 느낀다. 전신을 이완시키고 머리를 술의 표면에 대고 젖혔다. 이미 발끝은 바닥에 닿지 않은 지 오래다. 방의 천장도 한계가 있을 것이니 술이 멈추지 않고 계속 쏟아져 나온다면 모두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이다. 한참을 눈을 감고 있다. 이거 접대하는 쪽에서 먼저 취해서는 곤란한 법인데. 곤란한 법인데. 뒷머리가 축축하다. 머리가 아파 온다. 뒷머리가 찢기는 기분이다. 눈을 뜨자. 다시 눈을 뜨자. 눈을 떴다. 이제 그는 혼자서 거대한 술의 바다에 떠 있다. 이제 넘실대는 잡쓰레기들과 잡인들이 없다. 씨팔. 이래서야. 이거 다시 물에 빠져 죽는 꿈이 아니야. 검붉은 대기에서 알코올의 기운이 전신에 퍼진다. 이번에는 술에 빠져 죽는 꿈이구나. 꿈이구나. 내가 정말 많이도 취했구나. 접대하는 쪽에서 먼저 취해서는 곤란한 법인데. 곤란한 법인데.

  P의 꿈속에, 미스 김은 물풀들로 감겨 있다. 늪과 같이 녹색의 물이끼가 물가를 차지하고 있다. 여자의 발목은 적당히 풀 잎새들이 휘어 감고 있다. 여자는 물 위에 아긋하게 떠 있는데, 새벽안개는 막 햇빛을 받아 자취를 감추는 중이다. 물은 조금씩 흘러 나가면서 끈적거리며 달라붙는 죽음을 실어 나르고 있다. 여자는 막 어제의 기억을 더듬어 잠에서 깨어나는 중이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여자의 머리카락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풀어 헤쳐진 것만 같은, 이 해캄의 무리들이 온전히 여자를 떠 있게 하는 근원인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래 전, 아마 이 동네 여인들이 물을 길어 가던 수원지는, 커다란 취수구에서 물을 빨아드리는 통에 평소 보다 낮은 수면을 이루고 있다. 여자는 어제의 슬픔에 몸서리가 처졌다. 여자는 천천히 물에서 몸을 일으켰다. P도 어지러운 꿈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음날 아침, P는 아무도 없는 아파트에서 일어났다. 식탁에는 어제 저녁 파출부가 차려 놓고 나간 그의 상이 차려져 있다. 파출부와 P는 좀처럼 마주친 적이 없다. 그의 하나뿐인 고등학생 자식은 미국에 유학 중. 아들이 한국을 떠난 지 두 달이 못 되어 그의 아내는 아들 걱정에 아예 미국으로 가 버렸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주말동안 먹을 음식과 반찬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버려진다. 처음에는 자주 오가던 전화들이, 통장에서 내보내는 송금횟수와 같아졌다. 그는 문득 자신이 통장에 찍힌 숫자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숫자들은 미국의 아내와 자식에게는 중요하다. 어쩌면 그는 중요치 않다. P는 수저들 들며 식탁 위에 놓인 신문을 펴 들었다. 어제 날짜의 일면에는 ‘40년 만의 최악의 태풍’이라는 글자가 크게 박혀 있다. 어제 술을 마실 때만 해도 맑은 날씨가 아니었나? 충청 이남과 경기도 일대 집중된 폭우. 농작물 남아나는 게 없다. 농민들 탄식. 이제 일 년 농사 다 망쳐서 팔 것은 고사하고 입에 풀칠할 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사진 : 늙은 아낙이 완전히 물에 잠긴 논을 보며 근심에 잠겨 있다. P는 신문을 들고 일어났다. 밥이 넘어갈 기분이 들지 않는다. P는 쇼파에 앉아 담배를 꺼내 문다.

  툭. 투욱, 툭
  테이블에 펴놓은 신문지 위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P는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던져 버렸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물이 둥근 호면을 그리며 방울방울 떨어지는 중이었다. 사무실에서도 그러더니,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 또 물이 샌다. 신문은 검게 젖어 들어간다. P는 주방으로 들어가 가장 커다란 솥을 든다. 솥을 테이블 위에 얹었다. 솥은 왠지 과장된 느낌이다. 그의 살림살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크기였다. P는 솥이 불 위에 올려진 적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스텐레인스 소재의 솥을 때리며 탱탱하는 소리로? P의 신경을 긁는다. 그제야 쏴아 하나는 소리가 P의 귀에 들린다. 커튼을 젖히자 창 밖에는 비가 우수수 흩날리고 있다. 밤인지 낮인지 모를 하늘은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다. 눈앞의 요동치는 하늘이 P의 두려움을 자아낸다. 어디든 피항(避港)가서 있겠지. 사우스 이스턴 소속의 인도네시아 선적 원목수송화물선 붐인데라호는 오늘 중에 인천에 닻을 내리게 되어 있다. 그 안에는 세영 통상 앞으로 보내오는 이천 백여 주의 원목화물도 함께다. 깜깜한 하늘이 붐인데라호가 향하는 검은 바다처럼 보인다. 구름은 출렁이고 나뭇가지는 멀리 날아오른다.?

  P는 쇼파에 다시 앉았다. 짙은 소리를 울리며 은색의 솥에 물은 점점 차오른다. 머리끝까지 신경이 팽팽해진다. 리모컨을 들어 단추를 누르는 손위로 붉어진 핏줄이 플러스마이너스 전선처럼 뒤엉킨다. 조금만 더 물이 떨어지면 솥의 물은 곧 다 차버릴 것 같다. 아무래도 솥이 넘치고 나면, P의 머릿속 전선들은 합선이 되서 멈춰 버릴 것 같다. 오늘 오전 7시, 통행금지가 된지 1시간 반 만에 이 곳 잠수교가 물속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기상청에서는 이번 태풍이 이례적인 경로전환을 한 점을 들어, 이번 기상예보 오보 사태에 대해서 궁색한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김 기자 당초에는 에, 기상청에서는 이번 태풍 라오가 좀 더 동쪽으로, 일본 서해상으로 빠져나가 한반도에는 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는데요, 이 때문에 이번 태풍이 더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며칠 전만 해도 이제 수확이 얼마 남지 않은 들녘에는 황금빛 물결로 가득했는데요. 지금 보시면 검은 흙탕물에 뒤덮여 모두 쓰러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실 겁니다. 이대로 가면 벼에 싹이 나는 등, 도저히 농가에서는 그 피해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완파된 비닐하우스가 수천 동에 이르는 등, 이번 사태로 기상청과 방재당국의 안일한 대처가 원망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최악의 인재, 최대의 참사라는 커다란 글씨 아래로 작년의 수재를 담은 화면이 긴박한 음악과 함께 몇 초간 흐른다. 참, 다 지나간 여름에도 없던 강력한 태풍이 지금 한반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빗나간 기상청의 예보시스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태풍 라오가 마지막으로 지나 갈 것으로 보이는 영동지방으로 연결해 보겠습니다. 예 저는 지금 동해 묵호항에 나와 있습니다. 이제 한 시간 후면 태풍 라오의 중심부가 지날 것으로 보이는 이곳에서는,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빗방울은 약하지만, 강풍이 몰아치는 등 이제는 결전을 기다리는 전쟁터와 같은 기분입니다. 어제 밤 7번국도 상의 공사 중인 옹벽이 무너져 인부 김 모 씨 등 2명이 크게 다치는 사고가 있었는데요……. 갑자기 눈앞이 검어진다. 정전. 조금 후에, 유난히도 큰 굉음이 울린다. 또다시 검은 색 하늘에 번쩍이는 뇌우.

  형광등이 잠시 깜박이다가 제 할 일을 찾았다. 이제 슬슬 솥의 물은 넘치는 중이다. 물에 비친 형광등이 기다란 흰색 물뱀 같다. P는 끙 하는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솥의 손잡이를 잡고 힘을 준다. 손아귀에 피가 몰리고 힘줄과 핏줄이 교차한다. P가 들어올리기에는 만만한 무게가 아니다. 여전히 물방울은 떨어지는 중. 순간 전화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벨소리에 놀라 힘이 빠진 P는 그만 손을 놓쳐 버렸다. 솥은 테이블위로 떨어져 깨진 판유리와 함께 벨소리만큼 시끄러운 소리가 울린다. P의 옷도 바닥도 온통 물로 흥건하다. 맥이 풀리고, 동시에 머리끝가지 화가 치밀어 오른다. P는 비척거리며 일어나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사장님 저에요. 익숙하지 않은 작은 목소리가 수화기 건너편에서 들린다. 누구? 미스 김이요. P는 벨소리에 놀라 물을 쏟아 버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순간, 수화기 건너편의 미스 김에게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래? 아침부터 웬 일이야? 사장님두.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지금 밤 8시가 넘었어요. 그래? 내가 뭘 착각했나 보네. P는 시간을 많이 잃어버린 기분이다. 내가 잠을 그렇게 많이 잤다. 사장님. 왜? 보고 싶어요. 보고 싶어? 네. P의 성난 목소리에 미스 김의 목소리가 기어 들어간다. 안 돼. 왜요? 지금 천장에서 물이 새. 온통 다 젖어 버렸어. 어머나, 그럼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방법을 생각해 봐야지. 사장님. 왜? 빨리 거기서 나오세요. 뭐야? 혹시 감전이라도 되면 어떻게 해요. 미스 김의 목소리가 떨려 온다. 사무실도 그렇구, 까짓 물 좀 새면 어때요. 다 젖어버리면 어때요. 보고 싶다구요.

  미스 김의 목소리가 더 잦아진다. P는 생각한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데 보고 싶다? 사무실에서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비가 온다고 이렇게 구는구나. 여자는 모를 동물이군.
간단히 샤워를 하기로 했다. 샤워꼭지에서 물이 쏟아진다. P는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낀다. 눈을 감고 벽에 손을 집는다. 그러자 벽이 부드럽게 밀려들어간다. P는 놀라며 눈을 떴다. 눈앞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무연한 어둠. 시끄러운 북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하다. 그와 동시에 모든 소리들이 명확해진다. 시끄러운 심장고동소리. 배고플 때와 같이 꾸르륵하는 소리, 세차게 좁은 수로를 따라 흘러가는 물소리. 침낭에 들어간 것처럼 온몸을 부드러운 것이 옥죄고 있다.??

  정신이 들고 보니, 그는 알몸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차가운 물은 여전히 쏟아지는 중이다. 그는 서둘러 샤워를 끝냈다. 차가운 물이 닿은 후라 으슬으슬한 기분이 들었다. 지하 주차장 가득 비 내리는 소리가 굉음으로 울린다. 차에 올라탔다. 아직 마르지 않은 머리칼사이로 한기가 든다. P가 신경질적으로 히터를 켰다. 미스 김이 기다린다는 사무실 근처의 까페까지는 40여분 정도. 늙은 노파의 입 속 같은 어두운 입구를 나가자 하늘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는 중. 까페 미도루. 이름처럼 까페 미도루가 사거리의 가운데 서 있다. 까페 근처에 차를 세우고 보니, 차안에는 하나 둘 굴러다니기 마련인 2단 우산이 오늘따라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그냥 차에서 내려 까페로 달려 들어간다. 붉은 네온사인이 혈관처럼 불뚝거린다. 밖에서 언뜻 올려다 본 까페의 통 유리는 흘러내리는 빗줄기 따라 우윳빛이 되어 있었다.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아님 예의 미스 김인지 분간이 가지를 않는다.

  이놈의 지겨운 비, 도대체 언제나 끝나지? 너 애인하고 놀러 못 다녀서 심통 났구나. 카운터가 있는 테이블에 심드렁하게 팔을 기대고 있던 웨이트리스는, P가 안으로 들어서자 얼른 자세를 고쳐 바로 선다. 어서 오세요. 이것아 뭐해, 수건이라도 좀 가져다 드리지 않고. 얼마 안 되는 거리를 뛰어왔지만, P의 바지 아랫단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다. 일렁이며 밀려오는 파도와 같이 점점 P의 다리를 따라 빗물이 스며 올라온다. P는 종업원이 내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실눈을 뜨고 미스 김을 찾았다. 가늘게 뜬 눈 위로 머리칼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시야를 흐리게 했다. 미스 김이 먼저 P의 편을 알아보고 손을 든다. 미스 김의 옆자리에는 잘 개어진 젖은 수건이 보인다. P가 다가가 맡은 편에 앉는다. 이십 대의 미스 김은, 물기를 머금은 새싹처럼 빛이 난다. 그러나 그 빛은 불안하다. 마주 앉아 보니 미스 김의 머리에서 아릿한 샴푸냄새가 난다. 완전히 비에 젖으셨네요. 그런가. 흠. 냄새. 냄새? 네. 왠지 비가 오는 날에는 담배냄새가 짖게 옷에 베이는 것 같아요. 그래? 전화가 속의 잦아드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대면한 미스 김은 목소리를 밝게 하고 끊임없이 재잘거린다. P의 눈에는 평상시와 다른 그런 열에 들든 모습이 더 불안 해 보인다. 오늘은 말이 많은 것 같군. 사장님은 오늘 특별히 말이 없으시네요. 미스 김이 되물어 온다. 지금 밖에 날씨를 봐. 네 그러네요. 저도 왠지 몸에 열이 나고, 머리도 지끈거리는 것 같아요. 정말 지겹게도 내리죠. 요즈음은 정말 징크스인 것 같아요. 징크스? 사장님 머리 위로 구름이 쫓아다니잖아요? 미스 김이 소리 내 웃기 시작한다. 구름? 네. 그래서 항상 비가 내리는 거구요. 메리 포핀스를 아세요? 누구? 갑자기 미스 김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P는 웃는 미스 김을 얼떨떨한 기분으로 쳐다본다. 아, 아니요. 웃음을 참으며 미스 김이 말한다. 제가 어릴 때, 텔레비전에서 본, 메리 포핀스라는 이름의 요술쟁이가 나오는 외국 드라마예요. 물론 사장님은 그런 것 보신 적 없으실 테지만. 이번에는 미스 김의 표정이 뽀로통해진다. 거기 보면, 사장님처럼 우울한 남자가 나오는 에피소드가 있거든요. 우울한 남자. 네. 어찌나 우울한지. 구름이 막 머리 위를 쫓아다니며 비를 뿌릴 정도겠어요. 거기서 우산을 타고 날아온 메리 포핀스가 자신의 우산을 그 남자에게 주거든요. 비가 따라다니는 우울한 남자라. 네. 딱이지요? 그러네.

  저 만치에서 웨이트리스가 다가온다. 저기, 괜찮으시면 수건은 치워 드릴까요? 네. 미스 김은 어느 새 P의 수건까지 개어 웨이트리스에게 준다. 감사합니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음. 퍼플 레인 두잔 주세요. 미스 김은 퍼플 레인이라는 자극적인 이름의 칵테일을 주문한다. P가 말하기도 전이다. 얼마 후 돌아온 웨이트리스가 조심스럽고 빠르게 잔을 내려놓는다. 하이 볼 글라스에 가득 담긴, 층층이 파랗고 붉은 빛깔이 도는 것이다. 미스 김은 한쪽 팔을 머리에 괴고 무심하게 빨대를 젓는다. 미스 김의 손놀림에 따라 붉은 색과 푸른색의 접경에 있던 보라색이 떠오른다. P도 미스 김을 따라 투명한 빨대를 내 젓는다. 보라색의 칵테일은 약간 피와 같은 기분이 든다. 칵테일은 좀. P가 주저한다.
  사장님은 제게 멋대로 정해서 마음에 안 드시나 봐요. 미스 김의 목소리가 잦아든다. 그게 아니라. P는 과장되게 손을 내저으며 말한다. 술은 한 가지를 마셔야지, 요리 섞고, 저리 흔들어서 먹는 건 내 체질이 아니어서. 피. 항상 술자리에 가면 요리조리 폭탄주를 돌리지 않아요? 그건 상대방이 원하니까. 그리고 이건 연하고 단 술이지 않아? 잘 취하지도 않고. 미스 김이 주의를 단다. 달다고 우습게보면 안돼요. 이건 보드카가 들어간 거라구요. 미스 김이 채근하자 잔을 맞춘다. P는 한 입에 털어 넣듯 마신다. 피. 정말 무드가 없어. 미스 김이 빨대를 입에 물고 우물거린다. P에게 처음 마셔 본 칵테일은 생각보다 맛이 좋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P가 말을 뱉고 나자, 눈앞의 미스 김이 달라 보인다. 그러고 보니, 미스 김을 알고 나서, 이전의 그가 살던 삶에서 조금한 틈이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매지 않던 원색계열과 세련된 문양이 프린트된 넥타이를 매고, 조금 나오기 시작한 배를 잘 가리는 법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이런 보라색의 칵테일을 마주보고 마시게 되었다. 언제였을까. 여자가 P의 삶에 틈입해 들어온 때가. 내가 살아 돌아 온지 1년이 다 되어가는 구나. P가 무심코 말한다. 그러네요. 저하고 함께 한지 열 달이 다 되어가요. 미스 김이 작게 되뇐다.

  두 잔째 P는 막대를 젓는다. 조금 취기가 도는 기분이다. 이제 미스 김은 절반을 마셨을 뿐이다. 통 유리 밖으로, 한 귀퉁이에 ‘차와 음료, 주류 칵테일’ 이라고 써진 네온사인이 반짝인다. 칵테일 ‘칵’ 자는 고장인지 깜박이며 희미하다. 어느 새 ‘칵’자의 붉은빛이 P가 젓는 칵테일 사이로 틈입한다. 그 때문인지, 기기묘묘하게도 그것은 정말 피와 같이 보였다.

  까페 미도루의 간판이 꺼졌다. P는 발걸음이 처지는 미스 김을 안아 부축한다. 까페 미도루에서 시간은 꽤 흘러가 있었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내리는 중이었다. 주인인 여자가 우산을 건넨다. 괜찮아요. 여기 있다 보면 버리거나 잃어버린 우산이 하나 가득 모이기 마련이에요. 굳이 돌려주시지 않아도 좋아요. 한 손으로 미스 김을 부축해 안고 우산을 들고 있기가 만만치 않다. 말랐던 바지 단이 다시 축축해진다. 간신히 문을 열고 미스 김을 조수석에 태운다. P가 시동을 걸자 차는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낸다. 보닛위로 떨어지는 비가 세차게 울린다. 무작정 P는 교외로 빠져나갈 작정을 한다.

  그거 아세요? 미스 김이 눈을 감고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뭐라고? P는 규칙적인 호흡에 잠든 줄 알았던 미스 김의 말에 조금 놀랐다. 그거 아시냐구요? 뭘? 여전히 미스 김은 눈을 감은 채다. P는 조금씩 취기가 올라오는 기분이다. 그게 뭔데. 사장님하고 저는요. 이미 죽었어야 할 사람들이에요. 뭐라구? 핸들을 잡은 P의 손이 흔들린다. 그게 무슨 말이야. 미스 김 오늘 많이 취했네. 평소 같지 않게 그게 무슨 소리야. 게다가 미스 김은 아직 어려. 미스 김이 힘을 주어 말한다. 저는 죽었어야 했어요. 그 때. 아니, 아마 죽었을 거예요. 그 때부터. 그 때라니 언제를 말하는 거야? 무작정 향하고 있던 P의 머리위로 제 4수원지라는 이정표가 비에 젖어 번뜩거린다. 미스 김은 얼굴을 창 쪽으로 향한 채 말이 없다. P는 미스 김의 표정을 보려고 했지만, 어두운 창밖으로 비친 모습에서는 읽을 수가 없다. 죽었어야 할 사람이라구? P는 역시 인도네시아에서 있던 사고가 떠오른다. 아마 P가 죽었다면, 몇몇 경쟁업체들만 씁쓸한 안도를 했을 것이다. 누구 좋으라고.

  이미 죽었을 거예요. P의 뇌리에 그 말이 맴돈다. 무심코 페달을 밟은 발에 힘이 들어간다. 빗길은 충분히 미끄러웠다. 비가 거세지자, 와이퍼의 움직임도 파랑 같은 물결 따라 무뎌진다. 비스듬히 P의 정신이 흐려진다. 매끄럽고 흰 손이 P의 손을 위로 그러쥔다. P가 잠시 졸았나 보다. 어느 덧 이제 차창 밖의 풍경의 의미가 없어진다. 가벼운 손사래와 같은 부드러운 악력이 스며든다. P의 발은 여전히 묵직하게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다. 오른쪽으로 향하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핸들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잠시 둔중한 충격과 함께 날카로운 통증이 머리로 전해진다. P의 차는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허공을 난다. 이제 차체는 수면에 닿았다. 수면에 떠있던 차는 서서히 가라앉는다. 차체 주위에 일어난 작은 공기방울들은 수면에 떨어지는 빗방울에 묻혀 보이지 않는다. P의 시야는 여전히 희미하다. 거뭇한 막이 그의 주위를 온통 에워싸는 듯하다. 이건 꿈일 거야. 이만하면 익숙해 질 때도 되었지. 희미하게 웃으며 마주보고 있는 미스 김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하다. 두 사람의 발목을 넘어 물이 세차게 들어온다. 물은 차갑지도 않고 미지근한 기분이 든다. 질이 나쁜 원목에서 나는 듯한 냄새가 P의 코를 자극한다. 곧게 누운 채로 미스 김은 조금씩 밀려드는 물과 하나가 되어가는 듯하다. 이윽고 물이 그의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다. P는 하나도 숨이 차지 않는다. 그는 입으로 숨을 내쉬는 게 아니다. 다만 보이던 사물들이 연극의 암전처럼 사라진다.
  오직 그만이 미지근한 물 가운데서 공처럼 몸을 웅크리고, 발생(發生)한 날과 같이 커다란 울림에 휩싸여 떠다닐 뿐이다.

  P가 눈을 떴을 때는 작은 창문으로 빛살이 스며들고 있다. 미스 김으로 보이는 여자는 홑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다. 조용한 모습과는 다르게 간밤에 여자는 또 난폭하게 굴었나 보다. 칼칼하게 마른 목이 P의 신경을 자극한다. 몸을 일으키고 나서 걷는 걸음에 이불이 발에 휘감긴다. P가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곱들어진다. 그 바람에 몸을 뒤척이던 미스 김이 잠에서 깨어난다. P는 다시 일어나 조그만 냉장고 앞으로 나아간다. 냉장고에는 몇 번을 반복해서 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한 스티커의 끈끈이 자국이 검은 화상처럼 군데군데 들어앉아 있다. P가 유리병에 담긴 물을 유리잔 가득 부어 마신다. 꿀꺽하는 소리가 물을 넘기기 힘든 만큼 크게 울린다. 저두 물 한잔만 주세요. 가라앉은 미스 김의 목소리가 들린다. 미스 김은 누운 채로 눈을 감고 있다. 햇살에 비친 피부가 아직 벗지 못한 허물처럼 투명하다. 물 잔을 받아 든 미스 김은 한참동안 유리잔을 스며드는 햇살에 비춰 본다. 왜? 독이라도 들었을까 그래? 아니요. 그거 아세요? 뭘? 이 근처에 수원지가 있어요. P의 머릿속에 간밤에 본 제 4수원지라는 도로 표지판이 떠오른다. 그런데? P가 미스 김의 눈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거기, 불길한 곳이에요. 사람이 많이 빠져 죽었어요. 그래? 미스 김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하긴, 댐을 만들다 보면, 아직 다 메우지도 못한 변소 간도, 주인 없는 묘지도 다 수장시킨다고 하지. 이 나라에서 얼마나 깨끗한 게 있겠어? P는 의식적으로 가벼운 농담을 하지만, 미스 김의 표정은 여전히 어둡다. 예전에, 알던 사람이 그 곳에서 죽었어요. 그래? 미스 김은 뜨거운 차를 마시듯 느리게 물 한 모금을 마신다. 충격이 컸겠군. 네. 그런데, 귀신은 고여 있는 물에 머무른대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P의 머리에는 간밤의 꿈이 스친다. 미스 김도 어지간히 상상력이 풍부하군. 나 같은 사람은 머리가 굳어버린지 오래 라서 말이야. 그런 말랑말랑한 생각은 들지 않아. 그런 생각이 들면 무섭겠어. 그렇지? 아니요.
  무언가를 그리는 미스 김의 표정에서, P는 어떤 두려움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그가 반복해서 익사하는 꿈을 꾸는 것도, 미스 김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어제 밤 핸들 위의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호수 쪽으로 끌어당긴 손은 미스 김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꿈이지만 재수는 없어. P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미스 김의 놀란 소리가 들린다. 어멋! 사장님. 왜? 돌아보는 P의 머리 위로 미스 김이 손가락을 펴 든다. P의 머리 위 천장, 낡은 수도관 틈새를 타고, 조금씩 그의 머리위로 물방울들이 떨어진다.

  며칠째, 세영 통상에 미스 김이 출근을 하지 않는다. P는 오늘쯤 미스 김이 전화로나 직접 P에게 남은 임금을 요구 할 것이리라 생각한다. 오히려 6년을 함께 했던 미스 박보다 지난 열 달을 함께 한 미스 김이 더 익숙한 듯했다. 새로운 경리를 구하는 것을 주저하던 P는 겨우 미스 김을 기다리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제, 열대바다에서 죽음을 건너온 P에게 사고 그 이전의 기억은 아득한 과거가 된다. 문득 미스 김과 함께 한 날을 생각한다. 어딘가 병적인 여자의 말투에서, 혹여 정말 그 알던 사람을 따라가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P는 변사사고 같은 거라도 있을까, 며칠간 작은 탁상아래 쌓아 둔 신문들을 꺼내어 훑는다. 점심으로 먹은 자장과 김치가 튄 신문 일면에는 ‘미림건설 최종부도’라는 이틀 전 신문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미림건설은 Y가 주로 거래하던 대형 건설업체다. 그 동안 P는 사라진 미스 김보다 부도난 미림과 함께 쓰러질 Y의 회사를 생각하는 편이 많았다. Y의 절친한 고등학교 선배가 대표이사로 있는 미림은 4개의 계열사와 몇 몇의 파트너들과 함께 시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미스 김이 사라진 것과 동시에 Y도 역시 연락이 끊겼다. P에게는 약간 손해지만, 그 대신 P는 이번 기회에 Y가 사들이기로 한 북미 산 적송의 물량 대부분을 넘겨받았다. 아마도 흔하지 않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P는 경리 책상으로 다가가 연필꽂이의 작은 가위를 꺼내 들었다. 종이를 자르는 가위질이 손에 잘 들러붙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좋다. 두 손바닥만 한 종이를 세 번 접어 수첩에 끼워 넣는다. 다시 신문을 들여다본다. 짜증이 밀려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꺼내 문다. 길게 이어진 재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신문위로 날린다. 한참이나 P는 스스로의 인내심이 허락하는 한 작은 글씨들을 헤집어 놓는다. 탁자 위는 금세 배추 잎처럼 울어 버린 신문지 낱장으로 지저분해 졌다. 다시금 천장에서 겹쳐진 신문 사이로 작은 물방울들이 떨어져 번진다. 투명하게 겹치는 신문지의 뒷장에는 심인(尋人)란에 난 이름들이 굵은 고딕체로 돋아 있다. 그 중에서 미스 김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P는 신문지 낱장들을 동그랗게 말아, 무슨 놀이라도 하듯 문 쪽으로 던진다.

  구겨진 신문지는 멀리서 보기에 몸을 웅크린 태아처럼 보인다. 어쩌면 물을 빨아들이는 커다란 열대나무의 씨앗처럼 보이기도 했다. 문득, 구겨진 신문지들 사이에 그 자신이 알몸을 웅크리고 있는 환영을 보았다. 눈을 크게 꿈적거리며 다시 본다. 그것은 어느 새 사라지고 없다. 그 씨앗들은 게걸스럽게 물을 머금고 한 것 부풀어 오르는 중이었다.

 

 

심 사 평
<물이 샌다>문장 정확·미려,소재 신선
소설 지망생들 쓰고 읽고 생각, 삼다(三多) 정신 가져야
  21편의 응모작품 중 <물이 샌다> <딸기정원> <비둘기들의 반론> <계삭>이라는 소설을 중점적으로 다시 읽었다. 이 네편이 소위 <본심 대상>에 오를 만 한 작품이었다.
  그 중 <물이 샌다>를 대상 당선작으로 정했다. <물이 샌다>는 우선 문장이 완결에 이르다고 할 정도로 정확했고, 또 미려했다. 그 다음으로 <소재>가 상당히 신선했다.
  문장과 소재는 모든 아마츄어 작가들이 연습하고 또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물이 샌다>는 그 문장과 소재 면에서 모든 다른 작품들을 압도하고도 남을만한 이야기이다. 이 작품의 경우 기존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신춘문예>에도 도전할 만한 완결도가 있는 이야기이다. 나머지작들은 상을 주기에는 다소 부족한 점들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소설쓰기>에 도전하고 있는 학생들의 경우 매일매일 글을 써서 우선 자신의 문장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어떤 현상문예에 응모를 해도 패배의 잔을 마시게 되어있다. 문장의 경우 묘사문과 서사문이 소설의 주를 이루는 것은 이미 다 알려져 있다.그 다음으로 남의 작품을 많이 읽어야 한다. 어떤 종류의 소재라도 이미 다른 사람이 써서 성공한 작품을 뒤따르는 것은 기본적인 출발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어도를 다룬 소설이 정한숙 선생과 이청준선생의 글이 있다. 그것을 읽고 나는 다른 각도에서 이어도를 다루어야만이 데뷔 할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계속 쓰고 읽고 생각하는 이른바 삼다(三多)의 정신을 가져야만 글을 쓸 수가 있는 것이다. 응모한 학생 여러분의 숙고가 있기를 바란다.
박양호 교수(소설가, 국교·소설창작)

 


소설부문 대상 소감
아직은 작은 언덕 오르는 취미 수준
언젠가는, 높은 언덕과 산에 올라, 큰 세상 바라볼 수 있는 눈 갖고싶어
  난삽하고 단점이 많은 글에 선뜻 큰 상을 주시니 감사한 마음에 앞서서, 부끄러운 기분이 듭니다. 저 스스로는, 군대에 있던 동안 위병으로 근무를 서면서 근무일지에 조금씩 적어나가던 글이,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 즐거움이었습니다.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 중 하나는, 군 시절에 좋아하게 된 작가의 문장을 가지고 일종의 패러디나 오마주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 자신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져, 글이 만족할 만큼 좋지는 않았습니다. 단편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조각 천을 얽어놓은 것 같아서, 완결된 이미지 하나를 그려내는 데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이렇게 아직은 작은 언덕을 오르는 취미 수준이지만, 언젠가는, 이런 글쓰기를 통해 높은 언덕과 산에 올라, 좀 더 큰 세상과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잘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앞으로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다짐해 봅니다. 전대 신문도 우리 학교와 학생들을 포함에서 모든 구성원들을 잘 바라보고 그 모습을 전달하는 곳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54주년을 맞는 전대신문도 꾸준히 정상을 향해 발전해 나가길 빌겠습니다. 다시 한 번, 미숙한 글을 선정해주신 심사 위원님들께 감사드리면서, 참여할 기회를 주신 전대신문에도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홍종빈(법학 4)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