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이상기후라지만, 너무 뜨겁다. 뭔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 우리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것은 하늘 위의 태양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불덩이, "광우병 파동"이 온 나라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래서 덥고 짜증이 났던 것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를 둘러 싼 찬성 측과 반대 측의 뜨거운 논쟁을 보고 있으면, 양쪽 모두 무더위 속에서 이성을 잃어버린 건 아닌지 염려된다. 그래서 ‘좀 똑똑한 척’하려고, 누군가는 조용히 입 다물고 한 발자국 물러나 그늘에서 쉬어본다. 그러나 더위가 한 풀 꺾일망정, 두통과 짜증은 가시지 않는다. 어느 쪽 말이 맞는 지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서로의 주장은 모두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팽팽히 맞서고 있다. 이것은 과거 황우석 사태가 일어났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쪽에서는 음모론이, 다른 한 쪽에서는 폭로전이 일어난다. 그리고 결론도 같다. 결국 평범한 사람들은 진실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 한 가지, 우리가 집착해야 할 것이 무언인지 궁금해 할 필요는 있다. 사실 과학적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 가설이 맞느냐, 틀리냐는 과학자 즉, 전문가들이 따질 문제이지 국민들이 가릴 일이 아니다. 국민들은 그저 수입을 허용할 지 안할 지를 결정할 뿐이다. 여기에는 과학적 근거가 적용될 수도 있고, 국민정서가 작용할 수도 있다. 요컨대 과학적 근거나 논리성만 따진다면 국민들은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일본과 중국과 함께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컴퓨터가 아니고, 국민은 실험용 쥐가 아니다.


  국민을 위한 판단기준은 ‘얼마나 안전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위험한가’이다. 사람들의 일상에 밀착되어 삶의 근간을 뒤흔들 수도 있는 사안을 단순히 안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만으로 밀어붙이려는 것이 얼마나 안전한지 모르겠다. 또 그것이 얼마나 국민의 의사에 맞는지 모르겠다. 의미 있는 수치 이하의 위험성이 보장된다 하더라도 사안의 중대성과 파급성을 고려하여 국민의 뜻에 귀 기울이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할 것 아닌가.


  그것은 사람들의 불안과 걱정이 ‘과장’되고 ‘과잉’된 ‘과민’반응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간장독에 빠져서 간장공포증이 있는 사람에게 그것이 ‘합리적인 공포’가 아니란 이유로 간장 먹기를 강요할 수 있을까. 필자에게는 주꾸미 알레르기가 있다. 그래서 주꾸미는 잘 안 먹는다. 그런데 ‘먹는다고 100% 두드러기 나는 건 아니니까, 괜찮다. 과장된 불안 행동 보이지 마라. 약 먹으면 괜찮다’고 주꾸미 안 먹는 나는 비난받아야할까. 국민 아니,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생명과 건강에 대해 걱정하고 불안해 할 권리가 있다. 설령 그것이 합리적이지 못한 공포라 할지라도 말이다.


  물론 지나친 불안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지나친 불안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억지로 자극에 대한 피로법(fatigue method, Guthrie)을 강행한다면 그것은 훨씬 더 바람직하지 못하다. 아니, 그것은 훨씬 더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이다.


  덧붙여 지적하자면 쇠고기 수입 문제와 관련하여 정부가 계속 비난 받는 이유는 반대여론에 대한 반박에만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과학적으로 이러이러해서 안전합니다. 그러니까 드세요”라고 반박하기에 급급할 뿐 국민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있다. 핵심을 모르니 만족시켜줄 생각도 못하고, 만족시켜줄 행동도 못하고 있다. 애초에 국민의 의사는 수렴하지도 않고 수입개방 하겠다는 결정부터 내리고 그 시나리오에 맞춰 협상을 마치고 나서, 이제와 그 결론과 그 협상에 국민의 의사를 끼워 맞추려하는 것이 정부가 할 짓인가. 이건 명백한 본말전도다.


  게다가 정부가 제시한 과학적 근거라는 것마저도 그 신빙성이 위협받고 있다. 연구결과 자체보다는 그에 대한 ‘해석’을 어떻게 할 것이냐를 두고 찬반이 입씨름하는 형국이다. 정부가 제시하는 ‘과학적 근거’가 미국산 ‘쇠고기 자체’의 안전성을 얼마나 보장해줄지, 또한 그것이 국민의 안전을 얼마나 보장해줄지 의문이다. 잠깐 카메라 앵글을 좀 돌려볼까.


  최근 어느 네티즌의 제안으로 다음 아고라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탄핵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5월 6일 오후 9시 현재 1백2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명운동에 동참했다. 애초에 1백만 명을 목표로 했던 서명운동은 목표치가 달성되자 1천만 명으로 목표가 상향조정됐다. 나도 이 서명운동에 참가했다. 그러나 정말로 이명박 대통령이 탄핵당하길 바라서 서명한 것은 아니다. 대통령 탄핵이란 탄핵 자체의 정당성은 물론 탄핵 이후의 득실까지 신중하게 고려해서 결정할 문제이기 때문에 섣불리 탄핵하라, 마라 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굳이 서명을 한 것은 ‘경고’메세지를 보내기 위해서이다. ‘일방주의에 대한 경고’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지난 대선 때 이명박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고, 그래서 혹시 나의 비판적 시각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불신과 미움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지 늘 점검하고 조심하고 있다. 때문에 그가 취임하고 나서는 그를 지지하며 힘을 실어주고자 노력했다. ‘이명박’을 지지하지 않을 지언정, ‘대통령’은 지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말썽이 생겼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부터 고소영식 내각구성, 한반도를 냉각시킨 대북정책, 특정국가에 치중된 외교정책, 효과가 의문시되는 친기업 정책, 교육당사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교육정책, 물가와 경기를 동시에 잡으려고 내놓는 모순된 경제경책에 이르기 까지, 지금껏 논란이 되어 온 문제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바탕엔 CEO식 일방주의가 깔려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황금마차’인냥, 성공의 신화에 등장하는 황금불도저와 같은 일방주의가 기업인 특유의 추진력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여론수렴을 건너뛰고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전형적인 CEO식 행보다. 분명 CEO는 조직구성원들보다 높은 자리에서 멀리 보며 조직을 이끌어 나가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CEO가 아니다. 공행정과 사행정은 엄격히 다르다.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킬 의무가 있다. 대통령은 기업CEO같은 ‘나홀로’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기업이든 정부든 의사결정에 있어서 옳고 그름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각각의 포장을 뜯어보면, 그 내용은 다르다. 기업의 의사결정의 핵심이 ‘이윤극대화에 얼마나 도움이 되느냐’인 반면, 정부의 의사결정에서는 ‘옳고 그르냐’의 문제 외에 ‘공공의 가치, 공적인 가치에 얼마나 부합하느냐’, ‘국민의 의사를 얼마나 대표하고, 거기에 얼마나 대응하느냐’라는 문제가 필수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이것이 기업과 정부의 본질적인 차이이다. 지금이라도 지난 신문들을 뒤적이며 천천히 살펴봐라. 취임 후 두 달 남짓, 이명박 정부의 행동에 이것이 얼마나 고려되어 왔는지. 쇠고기 수입문제에 대한 정부의 태도에 얼마나 이것이 반영되어있는지.


  때문에 쇠고기 수입은 단순한 쇠고기 수입이 아니라, 정부의 행동패턴 그 연장선에 서 있는 문제이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오로지 그거 하나만 미친 듯이 한 없이 뚫어져라 쳐다 볼 것이 아니라 주변 맥락을 살펴서 봐야한다.


  사람들의 침묵은 암묵적인 지지로 여겨지기 마련이다. 지금 이 행보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정부의 불도저식 일방주의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대운하 건설은 물론 향후 모든 국정운영이 ‘국민의 뜻에 따라’ 가 아닌 ‘정부의 판단에 따라’ 이루어 질 것이다. 탄핵의 논의는 둘째치고, 여기에는 분명하게 의사표시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탄핵안 발의 서명운동에 동참한 것이다. 따라서 정부가 일방주의를 거두어들인다면 나 역시 당연히 내 서명을 거두어들일 것이다. 약속한다.


  부디 내 서명을 내 손으로 취소시키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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