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도 초순이면 대지의 초목은 물이 오르고 공기는 날로 훈훈해진다. 대학 교정은 ‘꿈’을 안고 눈동자를 반짝이는 새내기들로 인하여 활기가 넘친다. ‘꿈’은 활동의 원동력이요 생명의 상징이다. 마음 속에 간절한 ‘꿈’을 간직한 사람은 눈동자가 빛나고, 마음은 풍요롭고 당당하다. 열심히 배우고, 귀를 쫑긋하여 ‘꿈’에 관계되는 정보를 모으며, 부지런히 움직인다. 늦잠을 잘 틈이 없고, 잠자리에서도 벌떡 일어나게 된다. ‘꿈’은 일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고로 우리를 불러 일 앞으로 이끈다.

  ‘꿈’이 없는 우리의 삶을 상상해 보라. 그것은 자랄 줄 모르는 고목과 같다. ‘꿈’을 잃은 노인은 앞날을 얘기하지 않고 지난날만 얘기한다.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한다. 자기의 잘못을 말하지 못하고, 자기의 자랑만 한다.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결정론이고, 우리의 정신으로 창조할 것이 무엇인지 말할 줄을 모른다. 확실한 것만 말하고, 불확실한 것은 없는 것과 같이 말한다. 대체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꿈’은 미약해지다가 그것이 없어지면 드디어 죽는다.

  ‘꿈’은 나이에 따라 자라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깨달은 시인(詩人) 사뮤엘 울만(S. Ulman)이 영감에 차 노래하지 않았던가! “젊음, 그것은 인생의 어느 기간이 아니라, 마음의 어느 상태인 것,.....젊음, 그것은 소심함을 넘어 용기의 길을, 안일을 넘어 모험의 길을 기꺼이 가는 기상인 것. 그런 것은 20대의 애늙은이보다 60대에 자주 있다.(Youth is not a time of life; it is a state of mind;.....Youth means a temperamental predominance of courage over timidity, of the appetite for adventure over the love of ease. This often exists in a man of sixty more than a boy of twenty.)”라고.

  나이가 어린 시절에는 본능적 열정만으로도 ‘꿈’은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 ‘꿈’도 계속 가꾸어지지 않으면 뼈대 없는 거품과 같아서 봄바람만 만나도 꺼져버린다. 반딧불처럼 명멸하는 몽환의 젊은 시절을 보내고 마는 경우도 허다하다. 소년은 쉬이 늙고 뜰의 오동나무는 이내 가을 바람에 낙엽을 떨군다. 어찌 인생을 일장춘몽이라 아니하랴!

  그러나 어떤 젊은이는 ‘꿈’에의 도취가 끝나기 전에 튼튼한 벽돌집을 짓고 나무와 화초가 무성한 정원을 가꾸듯이 ‘꿈’을 가꾼다. 그러한 ‘꿈’은 봄바람에 자라고 겨울 삭풍에 단련을 받아 향기와 아름다운 광채를 가진 단단한 소나무가 된다. 신의 섭리인가, 자연의 이치인가, 우리는 목적을 이루어서 해(害) 되기도 하고 목적에 이르지 못하여서 득(得) 되기도 한다. 젊은 날의 성취, 젊은 날의 출세가 흔히 본인의 성장을 정지시키듯이, 젊은 날의 실패는 인간의 정신을 성장시키는 일이 자주 있다. ‘꿈’을 향한 일로매진(一路邁進)은 결과에 관계없이 좋은 것이다. ‘꿈’의 성취는 보너스에 불과하다. 결과에 안주하는 대신 결과에 겸손하고 결과 너머를 향한 또 다른 도전이 중요하다. ‘꿈’을 가꾸어가고 정진하는 과정이 바로 중요하다. ‘꿈’은 이루기 벅찰 정도로 큰 것이 좋고 무엇의 종착점이 아니라 오르고 또 오르는 과정에 놓인 중간 봉우리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뻔히 보이는 길, 누구라도 다니는 길, 쉽게 가는 길에는 맛있고 아름다운 열매가 남아 있지 않다. ‘꿈’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깊은 골짜기나 구름에 가린 산봉우리처럼 모험심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에 있다. 그러한 어려운 길은 어쩌면 사람의 일생 중 젊은 날에나 가볼 길인지 모른다. 어떤 젊은이는 4년을 하루같이, 40년을 하루같이, 초지(初志)를 간직하여 가꾸면서 애타게 이루고자 정성을 다하여 어려운 길을 나아가고 또 나아간다. 그런데 ‘꿈’을 가진다는 것, 정성을 다해 이루려고 하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히 보상받았건마는, 포기하지 않는 한 대개는 그 ‘꿈’을 이룬다. 마치 수고한 자에게 보너스가 주어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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