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14일, 태국에서 캄보디아로 이어지는 배낭여행이 시작되었다.
얼마동안의 태국여행을 잠시 중단하고 1월 26일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캄보디아로 향했다. 수만 명의 한국인 여행자들이 찾는다는 앙코르 왓트를 보기 위해서였다. 분명, 인간의 능력과 자연의 힘, 수 천년의 역사가 담긴 앙코르 왓트는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최고의 유적지였으나, 그 곳까지 가는 동안의 캄보디아는 가슴에서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다. 입국 도장을 자신 있게 받고 나와 캄보디아로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나는 툭 치면 소리 내어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태국과 그 곳의 모습은 짧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확연히 다르다. 비포장도로부터 건물의 모습, 그 것보다 더 한 것은 사람들의 표정.

한 발자국. 흙먼지에 뒤 덮혀 땅바닥에 그대로 눕혀져 있는 갓난아기, 여기저기 모든 것을 상실한 눈으로 앉아있는 불구자들, 갓난아기를 안고, 업고 구걸을 하는 4-5살 꼬마아이들이 보인다. 또 한 발자국. 5,60년대에나 보였을 묵직한 나무 리어카는 그들의 삶인 마냥 쉴새없이 무언가를 잔뜩 싣고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 꼬부랑 할머니부터 혹 나와 동갑일지 모르는 젊은 아가씨, 그리고 또 꼬마아이. 내 앞을 지나치는 그들을 보면서 내 자신이 순간 원망스러웠다. 빨간 원피스에 큰 배낭을 메고 번쩍거리는 카메라를 든, 여권을 쥐고 마음 한 켠에는 두려움을 지닌, 말 한마디, 손길조차 건넬 수 없는 나의 철없는 미안함 이였을까. 그들과 나 사이의 허물 수 없는 두꺼운 벽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택시 아닌 택시를 흥정하고 숨듯이 올라탄다. 어디론가 숨어야만 했다. 이곳만 벗어나면 괜찮을 거라고 나를 위로하며, 순간 내 삶에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일 초도 버티지 못한 채 죄책감이 밀려온다. 어떻게 해도 용서받기 힘든 곳 이다. 잘 달릴지 목적지에 도착은 할 수 있을지 불안감으로 휩싸인 채 비포장도로를 달린다. 말 그대로 비포장도로이다. 보지 않고서는 상상 할 수 없는 곳. 중앙선은 말 할 것도 없고 내 주먹보다 더 큰 돌멩이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먼지를 일으키는 흙과 느그적 기어 다니는 비쩍 마른 소, 그리고 사람들이 있다. 차들은 서로를 비켜가며 정신없이 핸들을 돌려대고 뿜어지는 흙먼지는 차 안으로 뿌옇게 들어온다.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자동차 바퀴가 엉켜 내는 투퉁거림과 돌멩이 튀는 공포의 소리까지 그 것 그대로 들으며 먼지 이는 바람을 느끼고 싶어 하는 나를 본다. 그리고 도로에 그대로 누워 눈을 감은 시체를 본 순간 내 인내의 한계는 그쯤해서 끝이 났다. 조용히 눈이 감기고 기도를 해댄다. 앞 뒤 맞지 않은 내 기도는 어느 때보다 진실했고, 간절했다. 누구든 들어줄 것만 같았다.

한 참을 달려도 창밖은 사막이다. 문도 창문도 없는 집 아닌 집들이 제멋대로 세워져 있고, 녹색이끼로 가득 찬 물에서 목욕을 하는 여자들, 부서진 포크레인과 고인 웅덩이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인다. 언제부터였을까 거대한 열대나무 잎들은 흙먼지에 묻혀 이미 숨을 못 쉰지 오래인 듯하다. 옆으로 난 길이 단 하나도 없이 약4시간동안 직진뿐 이였다. 이정표도 가로등도 없이 단 하나의 길 뿐. 그 도로를 사이에 두고 생겨난 무방비 상태의 마을들은 모조리 흙색 이다. 그렇게 가다보니 점점 내 눈에 녹색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정표며 가로등이 생겨난다. 얼마 있지 않아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거대하고 화려한 호텔들이 줄지어 나타나기 시작한다. 또 다른 국경을 넘은 듯 이 곳은 완전히 다른 곳 이다. 바로 ‘씨엠리업’이다.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마술처럼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나의 목적, 앙코르 왓트가 바로 마술 같은 이 곳 ‘씨엠리업’에 있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수만 명의 관광객들이 만들어놓은 도시이다. 손꼽아 기다리던 앙코르 왓트가 바로 내 눈앞에 있는데도 나는 도저히 집중할 수도 빠져들 수도 없다. 족히, 5개 국어는 할 듯한 꼬마 아이들이 그 넓은 사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고 있다. 관광객들의 옷을 잡아당기며 어디서 배웠는지, 대체 누가 가르쳐줬는지 기계처럼 읊어댄다. 일본말을 해보고는 중국어, 한국어 차례차례 해본다. 서양인들에게는 영어를 기본으로 프랑스어까지 줄줄 해댄다. 옆에서 “언니, 팔찌 1달러예요,”하는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해보라. 이처럼 소름 끼치게 슬픈 현실이 어디 있겠는가. 일출을 보고 아침을 먹는데 ‘랑’이라는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오는 길에 엽서를 사준 아이였다. 수줍게 내민 것은 낡은 종이에 예쁜 꽃을 그려 넣은 짧은 편지였다. 가슴이 너무 아팠던 것은 그 아이의 편지 속에 ‘당신을 괴롭혀서 미안합니다. 그리고 웃어줘서 감사 합니다’라는 말이였다. 자신을 잊지 말아주라는 말과 함께 끝을 맺은 그 편지를 읽고 이미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아이를 위해 급히 엽서를 써 한참을 찾다가 그대로 들고 올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이들을 보며 안타까움에 고이는 눈물을 훔쳐대던 나였다. 그러나 사원을 돌아보는 내내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는 아이들의 뻗은 손들은 끝내 내 입에서 ‘No! thanks’를 외치게 만들었다. 진정되지 않는 마음에 뜨거운 햇살이 범벅되어 수 천년 박혀 지낸 거대한 나무뿌리 끝자락까지 숨고 싶을 뿐 이였다. 아이들은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하루를 그 곳에서 보낸다. 툭툭이며 자전거로 이동하는 것도 뜨거운 햇볕에 녹초가 되는데 그 아이들은 심지어 맨발로 정신없이 관광객들을 쫓아다니는 것이다. 평일에도 주말에도, 앙코르 왓트를 학교삼아. 캄보디아를 돌아다니다보면 아이들에 대한 포스터며 표어를 자주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본 포스터는 입국장에서였는데 ‘성, 노동에 착취되는 아이들을 보면 신고해주라’는 것 이였다. 그 것이 바로 처음 접한 캄보디아의 충격적인 첫 인상 이였다. 그리고 나서 ‘성인이 아닌 아.이.들’, 감옥 창살을 붙잡고 있는 아이의 사진, ‘저는 어린이입니다’라며 서 있는 여자아이 사진 등을 통해 캄보디아 아이들이 어른들에 의해 성과 노동에 위험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참 꿈을 꾸는 나이, 꿈을 수 백번 바꿀 수 있는 나이에 혹시나 포기를 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

왜, 많은 봉사자들이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 쉬지 않고 짐을 꾸리는지 알 것 같다. 가장 가까이에 있어 존재의 가치를 느끼기 힘들겠지만 희망은 늘 우리 곁에 있고 꿈은 늘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나눌 수 있다. 이곳은 머무는 내내, 그리고 다녀온 후에도 가슴에서 떠나지 못했지만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손을 가진, 나의 가치를 알 수 있는 최고의 여행지였다. ‘여행의 즐거움은 모든 순간을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분명 즐거운 곳 이였다. 비포장도로의 불규칙한 리듬과 아이들의 순수한 웃음 소리가 어우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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