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 항쟁이 처음 시작되었던 전남대학교는 민주화를 위한 항쟁에 앞장섰던 학교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만큼 희생된 선배들이 많다. 2006년부터 전남대학교는 민주화 운동하다가 졸업장을 받기 전에 희생당한 선배들을 위해 명예 졸업식을 연다. 지난 8월 24일에 열린 2006년 후기 학위수여식에서도 이이동 열사의 명예졸업식이 행해졌다. 내년 2월 학위 수여식에서는 박승희 열사가 명예 졸업장을 받을 예정이다.


작년부터 시작된 명예 졸업식에 졸업장을 받는 선배들에 대해서 재학생들은 잘 모른다. 그 분들은 무슨 일을 했으며, 무엇 때문에 희생당했을까? 가장 최근에 졸업한 이이동 열사와 내년 2월에 하는 박승희 열사, 그들은 누구일까?.

군대서 의문사한 이이동, 사인은 여전히 의문

▲ 故 이이동 열사
1985년에 교육학과에 입학한 이이동은 전남대학교 재학 시 민주화와 관련한 집회ㆍ시위에 자주 참여했고, 민중교육연구회라는 학회를 주도적으로 운영하면서 후배들에게 영향을 주는 등 학생운동에 적극적인 학생이었다고 한다.

이이동 열사 사망 사건을 조사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이이동은 군 생활을 할 때, 대학시절 적극적인 학생운동 참여 때문에 보안대에로부터 관찰대상자로 지정되었다. 이이동이 소속부대 교육계원으로 생활하는 중, 고참병들의 편의대로 근무편성표를 작성하라는 비민주적 관행을 강요받았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고, 근무시간ㆍ초소배정과 관련하여 고참과 신병들을 공평하게 편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이동은 병장을 비롯한 고참들로부터 지속적인 구타와 기합을 당하고 그 다음날 6월 15일에 중대막사 서북면 산 능선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쓰러져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아직 사망한 이유는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지휘관들은 고참병에게 구타를 당하는 것을 인지하고도 가벼운 주의만 주고, 구타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하지 않는 등 사병관리에 소홀하였으며, 당시 헌병대와 중대장 등은 동지의 사망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실탄을 조작한 것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사망사고의 현장사진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최초 발견상태가 훼손되었으며, 총기의 위치 등을 재현하는 과정에서도 또 변형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현재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 중이나 정확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박승희, 온몸으로 군부정권 폭력에 저항

▲ 故 박승희 열사
박승희는 고교시절 YMCA 활동을 하면서 사회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1990년에 전남대학교 가정대학 식품영양학과에 입학하였고, 입학 후 용봉편집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에 대해 관심은 더욱 커졌고, 그래서 사회 비판적인 글을 자주 썼다고 한다.

박승희의 대학 시절, 군부정권의 연장선상에 있던 전 노태우 대통령이 정권 때였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령관에 위임한 상태여서 직간접적으로 미국에 종속된 상태였다. 박승희는 이런 것들에 대해 평소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국민의 선거에 의하여 정당하게 출범했다고 하는 노태우 정권시절, 전 군부정권의 폭력적인 면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전투경찰들이 한 대학생을 집단 구타하여 숨지게 만든 강경대 구타 치사사건이다. 박승희는 이 사건이 일어난 3일 후에 ‘2만 학우 단결, 미국반대, 노태우정권 타도’를 외치며 제1학생회관 앞에서 분신했다. 박승희열사추모사업회 한 담당자는 박승희의 분신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로 민주화가 점점 자리를 잡아갔어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민주화의 열기는 점점 줄어들었는데 강경대 학생의 사망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별 반응이 없었어요. 한 대학생이 정권의 폭압에 의해 죽었는데 학생들은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거예요. 병상일지에도 보면 박승희 열사가 그 사건 때문에 많이 괴로워한 내용이 있거든요. 대학생조차 그런 일에 대해 분노하지 않고 무관심해서 굉장히 답답해했던 것 같아요.”

박승희 열사는 그렇게 분신으로 자신의 뜻을 알리고 21일간 병상 투쟁 후 5월 19일에 사망하였다.
민주화가 많이 되었다고 하는 지금,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었던 열사들의 죽음은 아직도 미해결된 것들이 많다고 한다. 후배 된 자로서, 우리는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오해를 갖은 채 남아있는 사건들을 풀기 위하여 그 사건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희생자가 있지 않게 우리는 그 사건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한다. 작지만 그것이 아마 선배들의 노력으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자로서의 도리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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