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학 캠퍼스에는 학생들이 만든 예술 작품과 역사가 담긴 유물이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총 유물은 6점으로 지석묘, 장승, 석탑 등이 있다. 알면서도 무심히 지나쳤던 작품에 다시 한 번 의미를 되새겨보자.

광주민중항쟁도

사범대 1호관 벽면에 그려진 ‘광주민중항쟁도’는 광주항쟁을 다룬 첫 벽화로서 1990년에 광주항쟁 1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 대학 벽 그림 추진위원회에서 제작했다. 광주항쟁의 발화점인 우리 대학에서 오월벽화가 그려지기까지는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투쟁의 세월이 걸렸다.
하단에 군용 지프를 탄 모습과 화면중심에서 총을 들고 왼손을 힘차게 뻗은 청년은 시민군의 모습을 나타낸다. 왼쪽 하단의 가마솥에 밥을 짓는 모습은 광주항쟁의 공동체정신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화면 상단의 백두산 천지와 서로 팔짱을 낀 청년 학도들의 모습은 조국해방통일운동을 형상화하고 있다. 청년이 흔들고 있는 민족해방의 깃발과 도청에서 나부끼는 ‘혁명광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플래카드는 광주항쟁을 맞는 지향과 각오가 잘 표현되어 있다.

 


광주읍성 동문 장승

용봉문화관 옆에 있는 장승은 지역의 평화와 주민의 안녕을 지켜줄 것을 기대하여 마을 입구나 길가에 나무나 돌로 만든 조각상이다. 이 장승은 조선시대 후기에 만들어졌으며 옛 광주읍성의 동문 밖에 있던 것을 우리 대학으로 옮겨왔다. 장승몸체 전면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도교사상과 풍수사상을 알 수 있으며 천재지변이나 홍수로부터 광주읍의 동쪽을 지켜주기를 염원하는 내용이 담겼다.

 

서봉사지 석탑과 부도

서봉사지 석탑(왼쪽 사진)이고 서봉사지 부도(오른쪽 사진)가 있다. 이것들은 담양 서봉사지에서 석탑과 함께 옮겨 온 것인데, 도굴범에 의해 반출되려던 것을 되찾아 1969년 호남문화연구소에 의해 우리 대학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탑은 불교의 교주인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나 경전 등을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을 말한다. 탑의 기단부는 석재가 부족하여 복원하지 못하고 3개 층의 옥개석과 옥신석만을 세워 놓았다. 부도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축조물을 말한다. 전체적으로는 석종형의 모습인데 상대석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조각했고 그 위에 올려진 탑신은 길쭉하며 맨 위에는 탑신보다 좁은 버섯모양의 지붕돌을 표현했다. 이러한 석종형 부도는 신라 하대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유행한 부도의 양식이다. 

장성댐 수몰지구 고인돌

대강당 앞 잔디밭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고인돌은 장성군 북상면 덕재리 남암마을에 있던 것으로서 1976년 장성댐 수몰지구에서 발굴 조사된 후 1978년에 우리 대학으로 옮겨졌다.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모제인 이 고인돌은 몇 개의 굄돌이 없이 덮개돌만 올려진 개석식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예대 곳곳에 있는 작품들
예대 주변에 가면 많은 조각품들을 볼 수 있는데 이 조각품들은 미술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의 작품들이다.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기이하기도 한 이 작품들은 우리 학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이 밖에도 예대 곳곳에 숨어있는 작품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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