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전남대인을 찾아 - 아시아 편

 < 2 > 인도네시아 ‘스타우드’대표 최병욱 동문 ( 경제·83학번)

벌써 10년째다. 이제 그는 인도네시아인들 보다 더 인도네시아의 역사와 정치를 잘 알고, 그들 보다 인도네시아에 더 잘 적응한 모습이다. ‘전남대’라는 지방대의 간판을 달고 사회에서 성공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을 넘어 타국인 인도네시아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그에게 ‘전남대’는 오히려 자극제였고 지금 자신을 있게 해 준 힘이었다.

신문사 기자로 과 대표로…그러면서 나 자신은 잃지 않기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였을까. 그는 ‘전남대’라는 지방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대학교 1학년 때는 방황도 많이 했다. 그러다 신문 기자에 대한 호기심과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적 의식으로 우리 대학 신문사에 들어가게 됐다. 그의 대학 생활은 ‘전대신문’을 빼면 시체다. 그가 학교에 입학했던 83년도 대학의 상황은 신군부가 정권을 잡은 후라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낮 12시까지만 해도 학생과 경찰이 웃으면서 농담을 주고받고 하다가도 12시만 지나면 경찰과 학생이 적이 되어 싸우곤 했다. 그 시절 신문사 학생 기자로 지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더 없이 소중하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학내 문제와 사회 문제에 대해 한 번 더 고민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제대해 대학에 복학한 후에는 경제학과 과대표를 했다. 누구도 선뜻 과대표를 하겠다는 학생이 없어 그가 나섰다. 그는 “과대표를 하면서 경제학과 학생들의 이익과 단합, 교수님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봉사를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도 좋은 성적을 유지했다는 최 동문에게서 어떤 것이든 적극적으로 하려하고 최고여야 했던 대학 시절과 사업가로 성공한 지금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주재원 생활로 인도네시아와 인연 맺어 그는 시골에서 자라고 지방대에 다녔지만 세계를 무대로 인생을 살고 싶었다. 그 생각 하나로 종합 무역 회사인 ‘효성물산’에 입사했다. 갓 입사해서는 그가 ‘전남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아무 부서에서도 그를 선택하지 않았었다. 그는 “외람되지만 졸업 후에 ‘전남대 출신’이라는 사실이 사회에 나가서 크게 환영 받지는 못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억울했지만 남보다 더 열심히 일했고, 그렇게 하다보니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처음엔 모든 부서에서 나를 선택하지 않았지만 입사 후 열심히 하다 보니 수출·수입 부서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고.

그는 여러 부서 중 목재 건재부를 택했다. 그 부서는 주로 인도네시아에서 목재 가공품을 수입해서 국내에 있는 건재상과 제재소에 제품을 판매하는 부서였다.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일할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주재원 교체시기에 그의 어학 실력을 발휘해 주재원으로 선발이 되어 인도네시아에 파견 되었다. 그렇게 1995년, 인도네시아와 첫 인연을 맺었다.

모두 말렸지만 ‘위기는 기회다’는 일념으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지금은 때가 아니다’고 말렸지만 나는 ‘위기는 기회다’는 말을 믿었다”

97년 IMF 때 국내의 모든 기업이 힘들었다. 사원들의 구조조정이 있었고, 그 때 그는 제 손으로 사표를 냈다. 그는 “회사 사정도 사정이었지만, “‘남자로 태어나서 내 사업체 하나쯤은 가져봐야 하지 않겠느냐’하는 야망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주재원으로서가 아닌 사업가로 인도네시아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그를 모두 말렸다. 하지만 그는 ‘위기는 기회다’는 말을 믿었고, 자기 자신을 믿었다. “모든 사람이 위기라고 말하는 지금이 나에게는 기회다”라고 생각한 그는 그를 말리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잡고 가족과 함께 인도네시아에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맞았다. 목재사업을 벌였던 그는 한국에서의 때 아닌 건설 경기의 신장으로 건설에 필요한 제재들의 수요가 늘어나 호황을 누렸다. 성공라인을 타고 그는 지금도 한국과 대만, 중국, 중동 등으로 목재품을 수출하는 무역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성공’이란 단어, 나에게 아직은…

타국에서의 성공이 쉽지만은 않았다. 우리와는 많이 다른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언어, 습성과 문화에 적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성격이 느긋느긋 하고, ‘yes’와 ‘no’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아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10년 가까이 되는 생활로 언어 장벽도 뚫고 그들의 습성과 문화에 적응한 그에게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다. 인도네시아에서 사업을 하고 있지만 그는 인도네시아인만을 상대로 사업을 하지는 않는다.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 그 국적도 다양하다. “그들 모두와의 관계가 원만해야 사업도 잘 되고, 신뢰감, 진실성이 생긴다”고. 그에게는 오랫동안 여러 사람과 지내면서 터득한,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한 비결이 있다.

첫째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자만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성실하게 노력하는 자만이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경영 철학이자 후배들에게 당부하고자 하는 말이기도 하다. 아직도 그는 “나는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말한다. 인도네시아 시장 변화를 재빠르게 감지하고 적응하는 능력도 그의 성공 요인이지만 그의 겸손함도 그의 성공 요인 중 하나가 아닐까.

최병욱 동문은...

● 1983년 우리 대학 경제학과 입학
● 1995년 효성물산 인도네시아 주재원으로 파견
● 97년~현재 인도네시아에서 ‘STAR WOOD’ 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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