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라는 물음은 치명적이다. 인터넷에서 ‘A모양과 B군의 연애’라는 기사가 뜨면, 네티즌들은 그 ‘누구’를 찾기 위해 수백 개의 리플을 달고 아고라 광장을 누빈다. 이러한 독자들의 취향을 그 누구보다 먼저 간파한 기자들은 한 사건이 터지면 사건의 본질에 문제점을 제기하기 보단, ‘누구’를 꼬집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이슈인 ‘학력 위조’만 봐도, 신문은 연이어 연예인 누가, 예술인 누가 학력위조를 했다고 고발하고 있고, 네티즌들은 ‘그 누구’의 도덕성에 비판을 가하며 또 누구를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 대학 안에서도 다르지 않다. 지난 7월 우리 대학 예술대 한 학생이 지역 일간지에 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제보해 기사화 되었다. 우리는 또 여기서 ‘누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볼 수 있다. 기사가 나간 후 사건 관련 학과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제보자’였다. 문제는 ‘제보자’를 찾아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이 아닌데 있다. 이후 그 ‘누구’에 대한 무수한 의심의 꼬리만 문 채 제보자도 사건도 오리무중인 상태가 된 것이다.

그 ‘누구’에 대한 잘못된 집착은 당사자에게는 심한 폭력이다. 더군다나 성추행 같은 민감한 문제는 피해자를 전남대에서, 사회에서 영원히 추방시키는 일이다. 실제 ‘문화전문대학원 성추행’ 피해자는 학교를 떠나있고, 예술대 학생 또한 학교에 잘 나오지 않으며 불안에 떨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본능적인 호기심에서 더 나아가 사건을 바라보며 성찰하지 않는 것은 상처와 혼란만 남길 뿐이다.

 이번 문제의 해결은 웅크리고 있는 피해자를 당당히 세우는 일이다.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을 피해자를 호기심의 눈초리가 아닌, 응원의 자세로 불러야 한다. 그리고 사건은 반드시 성찰되어야 한다. 지난 날의 사건들처럼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