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에서 종교란 없어선 안 되는 요소인지 모른다. 인간은 영원하지 않은 존재임에도 영원을 꿈꾸고, 완전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완전을 지향한다. 이러한 인간의 모순된 삶의 균형을 잡아 주는 것이 종교인데, 불교는 해탈(解脫)의 모습으로, 기독교는 구원(救援)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개신교 신학자 불트만은 “신앙이란 인간 자신의 안정성의 포기이며, 안정성을 오직 불가시적인 피안, 즉 하느님에게서만 찾으려는 과감성이다. 다시 말하면 신앙은 안정성을 볼 수 없는 것에서의 안정성이다. 그것은 루터가 말한 대로 단순한 신뢰로 미래의 어둠에 뛰어드는 과감성이다.”라고 말하였다.
 

물론 신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른바 자신을 믿는다는 ‘나[我]신교’의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도 일상의 삶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미신이나 금기를 벗어나지 못하곤 하는데, 이는 바로 종교적 행위의 변형된 형태인지 모른다.
 

인간 존재론에 관해 끊임없이 사유했던 철학자이며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이데거 역시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으려는 중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무신론자를 자처했던 하이데거조차도 인간의 불완전성을 인식함과 동시에 가장 완전한 상태를 지향하는 도구로서 종교의 이상적 가치를 인정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로크 음악 양식의 완결이라고 평가받는 바흐(J. S. Bach)도 이러한 종교에서 나오는 삶에 대한 의지를 가졌으며, 그의 음악 활동 목적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또한 바흐에게 신앙이란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특히 바흐는 교회 음악의 주요 악기인 오르간을 위한 방대한 분량의 작품을 썼다. 그 가운데 『토카타와 푸가 라단조 BWV 565』는 우리의 귀에 무척이나 익숙한 곡이다.
 

요즘은 조금 시들해진 감이 있지만, 세기말을 지나 새천년으로 진입하던 시기에는 테크노 혹은 일렉트로닉 음악이 유행했다.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이 분위기를 타고 다양한 시도를 꾀한 젊은 연주가들이 출현했다. 그들 중 가장 먼저 등장하여 흐름을 이끌었던 젊은 연주자로는 일렉트로닉 바이올리니스트 바네사 메이가 있다. 그녀를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하도록 만든 곡이 바로 『토카타와 푸가 라단조』였다.
 

이 작품은 전면에 종교를 내세운 작품은 아니지만, 곡을 듣다보면 인간 내면을 꿰뚫고 있는 절대자의 환영이 떠오른다. 미미한 존재로 살아가기를 거부한 채 세속적 욕구에 충실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바라보는 신의 시선이 느껴진다. 유한한 삶과 불완전한 생활에 고통스러워하는 당신이라면, 잠시나마 이 음악을 들으며 영원과 완전을 꿈꿔보자.
 

1708년경 작곡된 이 작품은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성격의 소규모 곡이지만, 기교적 선율과 규칙적 리듬을 통한 충실한 짜임새를 가진다. 작품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은 이것으로 마치고자 한다. 생선회 앞에서 그 빛깔과 상태를 한참 논하다 보면 어느 새 상해 버리듯, 음악 또한 이런저런 주석을 달다 보면 ‘날것’으로 느껴보는 신선함이 떨어질 수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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