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날레’는 격년제라는 의미고, 순 우리말로는 ‘해걸이’ 쯤 된다. 중국에서는 쌍년전(雙年展)이라고 부르며, 대부분 그 앞에 전시가 치러지는 지역이름을 붙여 쓴다. 이것이 처음 시작된 곳은 베니스고 올해 110년이 되었으니 올림픽을 능가하는 역사를 가졌다. 베니스의 개방성, 진취성, 많은 고건물과 문화유산 등에 착안한 이 도시의 미술가, 행정가, 경제인 등 시민대표들이 모여 비엔날레를 만들었다.
 

이는 문화, 예술, 미술 중에서도 가장 진보적인 형식의 행사이고, 주로 과거의 유산을 주로 다루는 박물관이나 현재의 예술을 다루는 미술관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미래의 예술을 다룬다. 비엔날레의 이런 아방가르드적 성격은 그러나 어디에서 치러지는 행사든 정해진 모델이 없다. 천차만별의 가치기준과 방법으로 미래예술의 길을 찾는다.
 

또 이는 미술, 시각예술에 국한되지 않는다. 문화행사란 말이 더 타당하다. 문화행사이되, 특정한 작품을 놓고, 여러 사람들이 감상하며, 그 가치, 척도 등등에 대해 지역사회 커뮤니티, 학술, 언론, 교육 등 여러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이 비엔날레다.
 

광주가 언제까지나 서울과 뉴욕의 변방에 머물 수는 없다. 오늘날 현대미술의 무게중심은 뉴욕에 있고, 유럽의 전통이 버티고 있는데, 언제까지고 뉴욕과 파리의 명작이 광주의 명작일 수는 없다. 광주 사람의 경험과 지식, 문화적 환경이 뉴욕과 파리의 그것과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엔날레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일종의 자아내지는 주체성 찾기다.
 

하지만 광주는 뉴욕과 파리에서의 예술적 견해를 우리에게 주입시키지 말 것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광주만의 것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남의 생각을 우리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하면서 내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위계를 설정하는 극히 비예술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광주비엔날레는 현대미술의 또 하나의 새로운 길을 내는 행위다.
 

우리는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듯 어느 한 중앙에 고착되는 것을 추구하진 않는다. 길은 남미와 아프리카, 몽골과 같은 변방에 더 많이 필요하고 서로가 ‘중심’이 될 수 있다. 광주비엔날레는 이 길들 간의 수평적 관계를 추구하는 예술적 시도다.

윤정현 (광주비엔날레 기획홍보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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