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동상앞에서 필자

 전대신문에서  해외 청년봉사단 기사를 보고 원서 내다


집->학교->도서관->집, 입학하고서부터 지난 1년 반 동안의 생활은 이 세 단어로 표현이 가능했다. 무료한 생활의 반복이었다. 지금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이 군대의 가는 이유가 대충짐작이 갔다. 새롭고 뭔가 기억에 남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개강파티니 수강정정이니 바쁜 일주일을 보내며 새로운 일에 대한 열망은 기억의 밑바닥에 가라앉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대신문에 PAS해외청년봉사단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를 훑고 이게 바로 내가 하고 싶던 새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곧바로 사회대 전산실로 달려갔다. 마침 학교 홈페이지에 해외봉사활동단원 모집이라는 게시물이 올라왔다. 게시물을 살펴보니 참가비의 반을 학교에서 대주고 거기에다 3학점을 덤으로 주는 것이었다. 좋은 기회였지만, 조금 걱정이 되었다. 지원한다고 붙는 것도 아닐 태고, 자신도 없었다. 하지만 해보지도 않고 단정지어버리면서 후회했던 내 삶을 되뇌면서, “까짓것 한번 하고보는 거지, 어차피 손해 보는 것은 없지 않냐”는 생각에 지원서를 작성했다.

지원서에 공을 들인 것도 아니라 별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지만, 서울에서 청년봉사단원으로 선발되었다는 전화가 왔다. “PAS해외 청년봉사단에 선발되셨습니다,” “23일, 천안에서 연수회에 꼭 참석해 주세요”라는 연락을 받았다.


천안에서의 연수회는 서울, 지방할 것 없이 많은 대학에서 300여명정도가 참석했다. 이번활동을 주최한 사단법인 아시아태평양협회(The Pacific Asia Society)는 기업인들과 교육자들이 아시아지역 청년의 국제교류와 협력증진을 토대로 한국의 국가이미지를 제고하고, 교류를 통한 협력과 교역증진을 목표로 지난 94년 창설되었다. 지금까지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 10개국에 하계와 동계로 나눠 5000여명의 학생들을 파견했다.

참가학생의 주된 활동은 한글교육, 전통놀이와 태권도, 풍물놀이를 비롯한 문화교류와 컴퓨터 등의 기술교육 건설지원 등이다.

그 후로 용인에서 1번의 연수회를 하고, 3개월 동안의 준비 끝에 중국으로 향했다.



그때를 떠올리며

▲ 이우공상학원 건물 정면에 해외청년봉사단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펼침막이 걸려있다.

뚝배기에 담긴 붉고 뿌연 육개장. 한 수저 떠서 입안에 넣는 순간, 시원하고 칼칼한 맛이 느껴졌다. “그래 이 맛이야.” 근 스무이틀 만에 먹는 제대로 된 한국의 맛이다. 어제 인천공항의 음식점에서 9000원이나 주고 곰탕 한 사발을 비웠지만 이 한 수저의 육개장을 따라올 순 없었다.



중국에 있는 동안은 더욱 그랬다. 입에 닿고 맛난 음식도 있었지만, 짜고 느끼한 음식이 대부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익숙해 졌지만 가끔씩 흰밥에 고추장을 비벼먹는 게 더 맛있게 느껴졌다. 아마도 내 몸이 우리음식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도 하려니와 중국요리에서 나는 향신료 냄새는 정말 참을 수 없었다. 향신료 냄새가 조금이라도 나면 맛있어 보여도 입에 대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중국에 있는 동안의 기억은 내 몸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


인천에서 이우까지

인천에서 항주로 가는 CA 140. 이륙 후 30분이 지나자 귀가 막히더니 이내 귀속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 했다. 조금 뒤엔 고막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모두들 눈을 감은 채 편히 누워있었다. 귀가 아픈 게 혼자뿐인지, 혹시 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나중에 물어보니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모두들 귀가 아팠다고 했다. 그런데도 편히 누워있었던 건 여러 번의 해외여행으로 익숙해진 탓이리라. 한번도 한국 땅을 벗어나지 못한 촌놈에겐 호들갑 떨 일이었지만 말이다. 후에서야 알았지만 귀속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만이 중국 땅에 왔음을 몸으로 느낀 유일한 증거였다.


해외여행 신고식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항주공항에 도착했다. 바다 건너의 중국이라곤 하지만 한국의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눈 붙이고 일어나면 광주에서 오는 기분이랄까. 다른 건 공항에 들어서자 풍기는 한국과는 다른 중국의 특이한 향내, 삼엄해 보이는 입국 심사대의 공안 정도였다.

공항출구에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중국 얘들과 어른 몇몇이 무리지어 서있었다. 알고 보니 이우공상학원에서 마중 나온 학생들과 선생님 일행이었다. 조금 더 가까워지자 그들의 얼굴이 보였다. 우리를 보고선 중국 아이들이 짓는 미소와 반가워하는 표정이란, 그 환한 미소만으로도 우린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였다. 난생처음 받는 환대에 유명인사가 된 느낌이었다.

버스를 타고 1시간 30분 정도 지나 우리가 도착한곳은 이우공상학원에 마련된 숙소였다. 버스에서 내려 고개를 들었다. 창가엔 빨간 바탕에 노란 글씨로 인쇄된 ‘한국에서 오신 PAS팀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는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열렬히’라는 다소 전투적인 북조선식 어투가 얼마나 우리를 반기는지를 짐작케 했다.

이우에서의 추억

▲공상학원에서 봉사활동 마지막날 태권도 시범을 하고 있다.

이우에서 첫날을 보내고 일어나보니 목은 마르고 방안이 건조했다. 온풍기를 이용한 대류식 난방이라서 그런지 방안의 윗부분만 따뜻하고 바닥은 차갑고, 공기만 데워주다 보니 자연히 방은 건조하기 마련이었던 탓이다. 중국에 있던 내내 집에서처럼 편하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바닥에 배를 깔고 편하게 누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중국에 있는 동안 온돌바닥 구경하기가 힘들었지만 한국인이 운영하는 삼겹살집과 한글학교에는 바닥난방이 설치되어있었다. 뜨듯한 온돌바닥에서 삼겹살 한점에다 소주 한잔은 정말 최고였다.

 


한글학교에서

▲ 한글학교 학생들의 천진난만한 모습


이우에서의 하루를 보내고 아침 9시경에 이우한글학교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한국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하고, 함께 공부도 했다. 진홍이형과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반을 맡았다. 얘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얘들이 어찌나 궁금한 게 많은지 말을 이어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아마도 오랜만에 한국에서 온 손님이라서인지 우리에게 관심을 가져준 게 아닐까 했다.


그 이후로도 토요일마다 한글학교를 찾았다. 한번은 초등학교 읽기 시간이었다. 책에 나온 나와있는 ‘어떤크리스마스’의 대본을 가지고 연극을 했다. 얘들이 정말 재미있어 했다. 그 전 주에는 수업을 끝내고, 오후에 동양에 있는 중국최대의 영화 촬영지인 진왕궁(秦王宮)에 갔다. 영화 ‘영웅’의 스케일만큼이나 왕궁의 크기도 어마어마했다. 한국에 있는 성(城)의 몇 배쯤 되어 보이는 성벽에, 문을 지나면 지날수록 어마어마한 높이의 건물이 연달아 있었다. 촬영장은 단순히 세트장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영화 영웅의 장면을 재현하고, 입체영상을 이용한 연극 등 볼거리가 다양했고, 비록 돈을 내야하긴 했지만 입고 만질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영화 촬영장은 관리가 부실할뿐더러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은 생각지도 않는데, 이러한 점을 배웠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상학원 친구들과

▲ 태권도시범후 서로의 연락처를 적은 송판을 들고 찍은 사진

이우는 습한 날씨에 햇빛 한 점 찾아보기 힘든 하늘이다. 이곳에선 햇볕이 들기만 해도 좋은 날씨라고 한다. 1월 말부터 2월 사이에는 내내 비가 오는데 우리 팀의 봉사활동 기간이 그 사이에 걸친 것이다. 게다가 아침저녁으론 찬바람까지 불었다. 자연스레 몸이 움츠러들고 어깨도 쳐졌다. 그런데도 중국친구들은 봉사활동 기간 내내 모두 밝은 표정이었다.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네들의 얼굴만 바라봐도, 마음이 정화되는 것만 같았다. 이기적이지 않고 계산적이지 않은 중국친구들을 보면서, 나도 그들에게 그렇게 비칠 수 있을까하는 생각했다.

우리는 이우공상학원은 3년제 대학으로 이우에는 하나밖에 없는 대학이었다. 학생의 대부분이 이우지역 출신이 아니라, 근처 저장성과 장소성의 작은 도시나 농촌 출신이었다. 말이 근처지 버스로 5시간이 넘는 거리에 살고 있는 얘들이 꾀 있었다. 이런 탓에 많은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했다.

이우공상학원은 3년제 대학이지만 학생들의 학구열만큼은 대단했다. 아침 7시부터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8시 30분정도가 되니 도서관에 남은 자리는 없었다.

우리가 만났던 중국친구들은 영어를 꾀 할 줄 알았다. 간단한 의사소통은 물론, 자신의 생각 표현이 막힘없었다. 그중에서 한국학생들보다 영어를 잘하는 학생도 두어 명 있었다. 그네들이 아는 어휘는 적었지만 그걸 가지고도 의사표현을 잘했다. 암기식 영어를 배운 게 아니라 표현하는 영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영어를 배운 중국 친구들이 부러웠다.

봉사활동이라곤 하지만 우리의 활동은 문화교류에 가까웠다. 대상이 대학생인데다 중국사람들이 워낙 자존심이 강해 누구에게 봉사를 받는다는 것보단 대등한 차원에서의 교류를 원했던 것이었다. 게다가 중국은 손님대접을 극진히 대접한다. 그 덕에 우리가 그들에게 대접받고 돌아온 기분이었다.

우리는 44명의 중국친구들을 세 팀으로 나눠 한글, 전통민요, 태권도, 전통놀이, 배례법을 가르쳐 주었고, 우리는 중국친구들에게 중국어와 중국문화, 다도를 배웠다.

중국친구들이 어찌나 한글에 관심이 많던지, 질문에 답하기가 바빴다.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다보니 짧은 회화능력이 들통 나고 말았다. 그럼에도 같은 한자문화권인지라 설명하기 어려울 땐 ‘씨에?’라고 말하면 어려운 내용도 설명하기 용이했다.

사실 교육시간은 별 재미가 없었다. 중국친구들과 밥을 먹거나 밖에 나가서 놀 때가 정말 신이 났다. 안되는 중국어라도 이것저것 사소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말이 통할 때 중국에온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중국친구들과 이우시내에 있는 여러 곳을 견학 갔는데 그중에서도 푸티엔시장(福田市場) 견학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푸티엔 시장은 중국 최대의 소상품 도매시장이다. 중국 전체의 소상품의 대부분이 이곳에 모였다. 중국 각지로 세계각지로 팔려나간다. 그만큼이나 이곳의 규모는 대단했다.

이우 사람들 말로 푸티엔 시장 1기를 돌아보는 데 하루가 걸린다고들 한다. 이뿐이랴. 이보다 2배나 큰 2기가 연결되어 있고, 현재 3기가 공사 중에 있다. 이는 한국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한국의 동대문은 이보다 크기도 비교되지 않을 뿐더러 한 장소에서 각기 다른 품목을 파는 반면 푸티엔시장은 품목별로 구분을 해 놓았다. 자본주의를 도입했다지만 역시나 사회주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 푸티엔 시장은 한국 소상품 무역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곳 한인상공회 분의 말을 빌리면 한국에 들어오는 80%이상의 소상품이 이곳을 통해서 거래되고, 이곳의 연간 매출 가운데 30%를 한국의 상인들이 소화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중국 친구들과 함께 푸티엔 시장 1기의 악세사리 코너를 대충 둘러보는데도 2시간이나 걸렸다. 여학생들이 예쁜 악세사리를 발견하면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서있어서 이기도 했지만 워낙 넓어서 발이 아파 못 걸을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는 공상학원 친구들과 2주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는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아침 7시경 버스타고 떠나기 전 중국 친구들이 우리를 마중 나왔다. 중국친구들에게 조금 더 잘해주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우리는 못 다한 이야기를 마저 했다. 이쪽저쪽에서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이내 여기저기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만큼이나 중국 친구들과 정이 많이 들었던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순수한 교감, 정말 잊을 수 없었다.

▲ 상해임시정부 유적지 앞에서
우리는 남은 5일간 중국 남방문화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소주, 항주, 남경을 비롯해 최치원 기념관이 있는 양주, 도자기로 유명한 소흥, 중국의 근대화 중심지이자 미래인 상해를 둘러보았다.

소주와 항주 남경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어서인지 옛 건물도 많고, 도시전체에서 풍기는 느낌도 달랐다. 우리나라로 치면 창원에 있다가 진주시내를 돌아보는 느낌이랄까. 조금 아쉬웠던 점은 중국의 공산화에 의한 옛것의 부정으로 인해 훼손된 문화재였다.


우리는 중국 근대 문학의 아버지로 우리에겐 ‘아Q정전’으로 유명한 소흥의 루쉰의 생가를 방문했다. 루쉰의 생가는 마을 전체가 하나의 문화재로 보존되어있었다. 글공부를 한곳, 루쉰이 뛰어 놀던 곳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시내의 한 가운데인데도 불구하고 옛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니. 우리나라 같았으면 문화재는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높은 빌딩을 새웠을 것이다.

비록 루쉰은 없지만 그곳에서 루쉰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고 루쉰의 어린시절을 곁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곳은 상해였다. 상해는 우리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우리나라 임시정부청사가 있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임정청사에서 많은 한국인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도 관광버스가 여러 대 줄지어 서 있었다. 조상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그곳을 찾은 학생들이 자랑스럽게 보였다.

임정청사에서 다만 아쉬운 점은 임정청사가 돈벌이로 전락한 점이다. 우리나라정부가 문화재 보존을 위해 관리하려고 요청했지만 중국정부가 묵살했다고 한다. 임정 청사는 중국의 여느 문화재처럼 돈을 벌기위한 장사수단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꾀나 많은 입장료에다 기념품을 팔아 관리비용으로 쓴다는 데 내겐 장삿속으로 보였다. 건물을 성의 없게 관리하고 문화재 설명이 잘못되어 있는 게 허다했다. 게다가 컨베이어 벨트에 물건 지나듯 가이드가 따라 붙어 훑고 지나게 했다. 그 많은 한국 관광객에게 받는 돈이라면 임정청사 복원이 다 되고 관리도 더욱 잘되어 있었을 것이다. 한국정부가 관리 했다면 이러한 꼴은 보지 못했을 것인데 아쉬울 뿐이다.

밤엔 유람선을 타고 야경으로 유명한 외탄을 둘러보았다. 진마오빌딩과 동방명주 사이에 크기가 제 각각인 고층 빌딩이 그려내는 마천루, 건물들이 내뿜는 총천연색 LED등은 중국의 경제성장을 뽐내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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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있는 동안 중국의 힘이 무엇인지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중국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살아온 오랜 역사, 그로인한 자부심과 자신감, 드넓은 대륙과 같은 생각의 크기였다.

그 14억 인구가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결집되었을 때의 힘이란 가히 상상하기 힘들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자본화 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중국에 있는 동안 내가 본 중국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사회법규 정비가 덜 되어있을 뿐이지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생활을 하고 있고 어떤 부분에선 우리보다 앞서있다.

앞으로 몇 세기동안은 세계를 중국이 움직일 것이라고 많은 학자들은 말했고, 이는 정설이 되었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중국에 있는 동안 내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이라는 국가에 바라는 게 한 가지 있다면 중국친구들에게서 환한 미소는 빼앗아 가지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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