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를 위해서는 소위 ‘그늘’이 필요하다고 괴테가 말했던가. 창조를 위한 “휴식의 공간”, 또는 “영혼이 고독한 시간과 공간”으로서의 그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대학은 창조적 인간을 만들기를 교시로 삼고 있고, 또한 창조적 인간들이 살아가는 곳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집단이 살아가는 곳에 이들을 위한 ‘그늘’은 정녕 있는 것일까? 한때는 있는 듯했지만, 갈수록 사라져갔고 이제는 “없다”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늘은 사라져버렸다. 교수, 교직원, 학생 모두가 그들의 창조적 작업에 필요한 휴식의 공간과 영혼이 고독한 시간을 대학 캠퍼스에서 더 이상 찾지 못한다.

내용이야 어찌됐든 우리나라 대학은 형식적으로는 미국식 탈을 쓰고 있다. 캠퍼스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게 하는 소위 캠퍼스 타운을 지향하며 그와 같이 운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미식 대학에 필수품이라 할 수 있는 ‘그늘’이 한국의 대학에는 사라지고 있다.

세상을 잠시나마 비켜볼 수 있는 여유의 공간은 물론 그런 시간도 없이 우리는 살아간다. 작지만, 자기만의 공간을 갖고 있는 교수들은 그래도 낫다. 학부 학생들은 차치하고라도 대학원생마저 고민하고 사색하며 뒤척일 수 있는 ‘그늘’을 우리는 찾아볼 수 없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잠시 반추하며 걸어 다닐 곳이 우리 캠퍼스에는 사라져 버렸다. 기숙사에서 살아가는 우리 학생들이 인생에 대해 고민하며 밤새 싸다닐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일까.

우리 캠퍼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숨쉬기도 힘들 정도로 밀착된 건물과 그 틈바구니를 온통 승용차들이 점령하고 있다. 그나마 걸어 다닐 수 있는 길마저도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캠퍼스를 공략하다시피 산보하고 걸어 다니는 학교 주변의 주민들에게 빼앗긴지 오래이다.

기도하며 일하며(Ora et labora)를 모토로 살아가는 베네딕트 수도원에는 기도하고 일하는 건물 사이사이로 많은 ‘그늘’이 만들어져 있다. 그곳에는 묘지도 함께 하고 있어 언제든 삶과 죽음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대학이 사찰일 수 없고 수도원일 필요는 더 더욱 없다. 그러나 캠퍼스에 들어서면 이곳은 공부하는 곳, 진리를 탐구하는 곳, 창조를 위한 고독한 영혼들이 살아 숨쉬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이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예전에는 점식 식사 후 잠시 산보를 즐기던 교수들이 눈에 띄었지만 이제는 그런 짧은 여유를 즐기는 분마저도 찾아보기 힘들다. 정확히는 ‘그늘’이 우리 캠퍼스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고즈넉하게 차 한 잔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교수 연구실로 국한 돼가고 있는 것 같다. 창조적 영혼을 위한 ‘그늘’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은 건축물과 자동차로 채워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불평하는 법도 잃어버린 지 오랜 된 것 같다. 작은 땅덩어리에서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그늘’의 상실을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단지 물질문명과 편의성에 익숙하고, 숙련된 현대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머지않아 우리 캠퍼스에는 수천여 명의 학생들이 더 들어서는 기숙사가 지어질 것이다. 철근과 콘크리트 숲으로 우리의 아이들이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들의 ‘그늘’은 어디에 있을까. PC방으로 또는 카페로 그들을 내몰 수는 없을 것이다. 단 한 사람의 창조적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늦기 전에 캠퍼스에 ‘그늘’이 만들어지고, 또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김윤수 (산림조경학부 교수, 목재 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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