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을 상상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결국은 칼럼도 즐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자칫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될 것 같은 염려 때문에 부득이하게도 지면을 통해서 직접 언급하지는 못하지만, 수없이 많은 글 쓰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낙천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불현듯 그들을 언급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얼마 전 뉴스에 나온 그 사람을 알지 않는가?’라는 물음의 형식을 빌려서라도 말이다.  

글을 쓰는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을 상상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결국은 칼럼도 즐거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자칫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될 것 같은 염려 때문에 부득이하게도 지면을 통해서 직접 언급하지는 못하지만, 수없이 많은 글 쓰는 사람들이 그와 같은 낙천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불현듯 그들을 언급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얼마 전 뉴스에 나온 그 사람을 알지 않는가?’라는 물음의 형식을 빌려서라도 말이다.

사실, 즐거움의 문제에 대해서 가치판단에 의한 해석을 덧붙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에게 속해 있는 취향의 문제로 맡겨두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동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여겨야만 된다는 것은 아니다. 말은 가지에 가지를 치고 뻗어나가는 속성이 있다. 이것을 제어하는 것은, 혹은 제어해야 하는 것은 자신에게 부여된 일종의 공동체적인 의무가 아닐까 싶다. 그런 측면에서 글쓰기가, 즐거움이라는 현재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집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글쓰기는 신문이라는 공간에 쓰는, 칼럼 ‘줄탁’이라는 이름을 가진, 대학원생이라는 입장에서 나온, 그리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글쓴이의 이미지가 고려되어 있는,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소재로 취하는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쓰인 글은 비유하자면 그 모든 현재적인 조건들의 옷을 빌려 입고 있는 마네킹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듯이’라는 구절처럼,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들이란 중요한 것들 중에서도 우선에 해당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때 우선을 위해서 중요한 것들을 버리거나 인위적으로 우선을 만들 필요는 없을 듯싶다.

대학원생에게 있어서의 칼럼도 그와 같은 입장을 고려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동년배들과 함께 학교에 ‘등교’하는 학생이기 때문에 혹은 스승에게 지도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일단은 모범답안을 제출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의 하나가 된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가리켜 종종 관례 혹은 통과의례라고 부른다.

필자의 앞선 칼럼들은 그런 의미에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갑자기 호기심에 휩싸여 지난 신문 기사를 들쳐보는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들쳐보는 것은 독자들의 호기심 때문이겠지만, 정작 글쓴이는 그로인해서 매우 민망한 상태의 정신적 공황 상태에 휩싸이게 될 것이란 점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은 인터넷의 댓글달기가 아니므로, 글쓴이의 민망함도, 독자들의 호기심도 어디까지나 상상으로만 진행된다.

이제 그대는 글쓴이의 현재적인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독자가 되고, 그대를 위해서 쓰이는 이 한 줌의 칼럼은 독자를 상상한 글쓴이의 구체적인 결과물이 된다. 칼럼이면서도 칼럼이 아닌 현재의 칼럼에 대한 이와 같은 미묘한 생각을 마무리한다.

그리하여, 칼럼들 중에서 진실로 칼럼에 해당하는 글들은 돌을 던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부터 배우고, 그것으로부터 나아가는 것, 그리고 함께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여기 칼럼의 이름 ‘줄탁’의 의미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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