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 앞 흰 목련을 데생하는/ 예술대생들은 아는지 몰라/ 목탄으로 터치하고 지우는 일보다/ 수업시간을 연장하며 소묘해 가는 것보다/ 잎보다 먼저 꽃이 피는 이유를./ (중략) 몇 해 전 그 꽃그늘 아래/ 몇 명의 학우들이 피를 흘리고/ 더러는 죽어 흰 목련꽃을 피우며/ 옥색으로 벙글던 참된 뜻을 아는지 몰라” 

“사대 앞 흰 목련을 데생하는/ 예술대생들은 아는지 몰라/ 목탄으로 터치하고 지우는 일보다/ 수업시간을 연장하며 소묘해 가는 것보다/ 잎보다 먼저 꽃이 피는 이유를./ (중략) 몇 해 전 그 꽃그늘 아래/ 몇 명의 학우들이 피를 흘리고/ 더러는 죽어 흰 목련꽃을 피우며/ 옥색으로 벙글던 참된 뜻을 아는지 몰라”

우리 대학 출신인 시인 임동확의 시집 『매장시편』에 나오는 <흰 목련꽃을 보며>의 일부이다. 그는 이 시에서 5.18의 진정성이 서서히 사라져가는 우리의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민주화의 성지라 불리는 광주, 그리고 그 시발점에 서있던 우리대학에서 조차도 5.18은 머나먼 옛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불혹을 지난 어느 비올리스트가 잊혀져가는 ‘5월의 광주’를 클래식 음악 공연장으로 옮겨 왔다.

지난 5월 18일 저녁 8시 광주문화예술회관 소극장에서는 비올리스트 진윤일의 비올라 독주회가 열렸다. 이 공연은 우리 대학 음악학과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문현옥의 반주로 함께 이루어졌다.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성격의 이번 연주회는 약 60여 분 가량 진행되었으며, 시종 일관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첫 곡을 연주하기 전 무대에 나온 비올리스트 진윤일은 청중들에게 박수를 자제해 줄 것을 정중히 부탁하였다. 그 이유인 즉, 자신의 기량을 과시하기 위한 연주회가 아닌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연주회라는 것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관객의 박수 소리가 연주를 하는 데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고 있기에 그의 발언은 놀랍기 그지없었다. 연주 프로그램은 총 4곡으로, 브루흐의 〈신의 날〉. 힌데미트의 〈추모의 음악〉, 비외탕의 〈비가〉,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 제8번 작품 110〉을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해 편곡한 작품이 연주되었다. 특히 마지막 곡은 쇼스타코비치가 ‘전쟁과 파시즘의 희생자를 생각하며’라는 부제를 붙인 곡으로, 이번 공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진윤일은 이 곡을 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영령들에 대한 진혼곡으로 사용하고자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인 보블레프에게 편곡을 의뢰하여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2중주’ 작품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곡 전반적으로 깊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곡은 ‘파시즘’이라는 민감한 정치적 용어를 부제로 가지고 있음에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또한 비올라와 피아노의 두 대의 악기로만 이루어진 소규모 편성이었으나 두 음악가의 농익은 기교와 섬세한 감성으로 인해 4중주 못지않은 음악적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것을 아쉬워하는 청중들을 위해 그는 앙코르 곡으로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오블리비온〉을 연주하였다. 그는 ‘오블리비온’은 ‘망각’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하며, 우리가 살아가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철학자 산타야나가 말했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것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라는 말로 공연의 성격을 다시금 되새겨 주었다. 비올리스트 진윤일은 뛰어난 비르투오조(virtuoso, 기교가 뛰어난 연주의 명인)인 동시에, 뜨거운 이성의 소유자였다.

공연이 끝난 후 소극장을 빠져 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클래식 공연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이는 어르신들도 계셨다. 그 분들은 지난 시절을 회고하시면서 이번 연주회를 남다른 시선으로 보았다는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카프카의 잠언 가운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가장 강한 빛으로만 세상을 용해시킬 수 있다. 무기력한 시선 앞에 세상은 견고하다. 더욱 무기력한 시선 앞에서 세상은 폭력적이다. 더 더욱 무기력한 시선 앞에서 세상은 오만불손해져서, 감히 자기를 바라보는 자를 산산이 부숴 버린다.”

어느 새 5월의 끝자락에 와있는 지금, 우리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기억해내자. 민주주의를 위해 ‘강한 빛’이 되어 사라져간 수많은 이들을 기억해내자. 그리고 잊지 말자. 1980년 5월 18일의 광주를…. 음악은 우리를 때로 감성을 넘어선 이성으로 이끌기도 한다.

/박새봄 객원기자 spring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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