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당시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던 때의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 당시의 우울하고 가슴 아픈 18일부터 27일까지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본다./엮은이 

1980년 당시를 내가 태어나지 않았던 때의 오래된 이야기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 당시의 우울하고 가슴 아픈 18일부터 27일까지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본다.

/엮은이


5월 18일 (일요일, 맑음)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와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정문 앞에서 오전 10시경 등교 중이던 전남대 학생들과 출입을 제지하는 계엄군사이에서 충돌이 발생한다.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학생들은 시내로 가 이런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고 가두시위를 시작했고 오후 3시부터 공수부대가 시내로 투입된다. 공수부대는 집안까지 쫓아 들어가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끌고 갔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곤봉과 대검을 닥치는 대로 휘둘러댄다. 피로 얼룩진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고 광주지방 통행금지시간을 저녁 9시로 앞당긴다.


5월 19일 (월요일, 오후부터 비)

시민들은 시내상황을 살피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금남로로 모여든다. 초․중․고등학교와 관공서, 일반기업체는 정상근무를 계속했으나 시내의 상가들은 대부분 철시한다. 대동고와 중앙여고 등 일부 고등학생들이 교내시위를 주도하게 되고, 오후로 접어들수록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날 오후 시내 중․고등학생들을 귀가 조치시킨다. 탱크까지 동원한 공수들의 잔인한 진압에 시위군중은 방화와 투석, 화염병 투척으로 맞선다. 공수부대의 잔인한 진압에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하고 시민들의 참여에 학생시위에서 민중항쟁으로 변함과 동시에 훨씬 치열해진다. 이날 밤 시내 중․고등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진다. 광주고 앞에서는 시민들에게 포위당한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5월 20일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버스와 택시를 세워놓고 젊은이들을 무작정 끌고 가는 과정에서 기사들이 구타, 연행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분노한 기사들이 대형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로 몰려왔다. 금남로를 가득 메운 이들의 경적과 헤드라이트 불빛은 시위대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시민군은 강한 연대의식과 자신감으로 전환되어 계엄군을 몰아내고 광주를 해방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날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일제히 발포해 시민 두 명이 사망한다. 비슷한 시각에 세무서 앞과 조선대 부근에서도 발포가 일어난다. 발포에도 아랑곳 않는 항쟁의 불길은 거세져 간다.


 

 

 

 

 

 

 

 

 

 

 

 

 

 

 

 

 

 

 

 

 

 

 

 

 

 

 

5월 21일 (수요일, 맑음)

광주시민들은 어제의 참상을 뒤돌아보고 계엄군의 만행에 항의하기 위해 아침부터 금남로에 모여든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에 가 장갑차와 군용트럭 등 많은 차량을 끌고 와 외곽지역을 돌며 시민들을 중심가로 수송하고 시외로 진출해 광주의 소식을 알리는 등 기동성을 발휘해 시위소식은 더욱 빠르게 퍼져나가고 시민들 사이에는 이미 강한 연대의식이 형성돼 가는 곳마다 주먹밥과 음료수 등을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계엄군은 오후 1시 도청의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서 시민들을 향해 일제히 집단 발포한다. 이로 인해 가장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며 시민들은 무장의 필요성을 느낀다. 시위대는 지서, 경찰서, 군부대 등에서 다량의 총기를 탈취한다. 카빈, M1 소총, 탄약뿐만 아니라 LMG와 TNT도 시민들의 손에 들어와 시민에게 지급되면서 이른바 ‘시민군’이 등장하게 된다. 시민군은 자발적인 지도부가 형성해 무기조작법과 무기관리 등 무기소지자의 통제가 실시되고 일반차량을 통제 등이 이뤄진다. 일부 시위대는 화순, 해남, 나주 등 시외지역으로 진출해 지역주민들에게 광주의 참상을 알린다.

무장한 시민군의 거센 항쟁에 밀린 계엄군은 조선대 뒷산을 넘어 화순의 길목인 주남마을로 철수하고 전남대에 주둔한 공수부대는 교도소로 집합한다. 시 외곽지역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27일 충정작전에 투입될 때까지 광주 외곽도로를 차단, 봉쇄하고 인근을 지나는 차량에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낸다.


5월 22일 (목요일, 맑음)

시민들은 자체치안 확보와 질서확립을 위해 스스로 거리를 청소하고 경계근무를 선다. 해방기간 광주에서는 큰 안전사고 없이 생활물자를 나누어 쓰고 시민군들에 적극 협조하는 공동체 생활을 꾸려나간다. 시민군은 무질서하게 돌아다니는 차량을 등록시켜 임무를 부여하고 무장시민군을 재편성하여 각 지역으로 신속하게 배치하는 등 자체조직과 병력을 통제해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한다. 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혈액이 부족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헌혈자가 잇따른다.

도청에서는 시내 유지급 인사, 목사, 변호사 등을 중심으로 5.18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어 계엄사에 요구할 협상조건을 토론하고 무기회수를 시작한다. 5.18수습대책위원회는 회수한 무기 중 일부를 가지고 상무대 전남북계엄분소를 찾아가 7개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계엄군측과 협상, 오후 5시경 협상결과를 도청 광장에서 보고한다. 하지만 무장해제하고 항복하라는 계엄사의 요구와 피의 대가를 보상하라는 시민들의 요구가 엇갈리고 저녁때쯤 김창길을 위원장으로 한 학생수습위원회가 구성된다.

 



23~25일

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23일 오후부터 매일 오후 2시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연다. 노동자, 시민, 학생, 가정주부 등 각계각층 사람들이 분수대 위로 올라가 계엄군의 만행을 성토하고 앞으로의 수습대책을 토론한다. 또한 그때 파악된 피해상황이 보고되었으며 장례준비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무기를 반납해서 희생을 줄이자는 의견과 끝까지 싸워야 다는 의견으로 학생수습위 내부에서도 강, 온파의 대립이 팽팽히 맞서며 결국 수습위원 일부가 조직에서 이탈됨에 따라 박남선 등 일반인을 포함시켜 학생수습대책위 기구를 개편했으며 25일 김창길이 학생수습위원장직을 물러나면서 수습위원들이 대부분 빠져나가 윤상원, 정상용 등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광주민중항쟁 지도부가 발족된다. 새로 구성된 항쟁지도부는 그 명칭을 수습대책위원회에서 민주시민투쟁위원회로 바꾸고 무장투쟁을 준비해 가는 한편, 시민들의 민원사항 등을 처리하기 위해 행정체계를 정립해 간다.


5월 26일 (월요일, 아침 한때 비)

5월 26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 등 중화기를 앞세우고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하자 수습대책위원들은 일명 ‘죽음의 행진’을 감행하여 무력진압을 저지 만류한다. 이것은 계엄군의 무력 진압작전의 예고였다. 저녁 7시 계엄군의 침공이 감지되는 가운데 학생지도부에서는 시민군에 참여하고 있던 고등학생이나 여성의 귀가를 종용한다. 시민군들은 비장한 가운데 마지막 선택이 요청되는 시기이다.


5월 27일 (화요일, 맑음)

3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하고 홍보부에서는 계엄군의 침공사실을 가두방송으로 알린다. 새벽 4시가 되어 도청 주변은 포위되고 도청표적은 탱크와 중무장 헬기, 자동화기와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시민군 말살 초토화작전이 전개된다. YMCA, 계림초등학교도 총검과 군화발 아래 유린되었다. 작전개시 1시간 30분 만에 도청진압이 완료되면서 열흘간에 걸친 1980년 5월의 민중항쟁도 참담한 최후의 막을 내렸다. 진압이 끝나고 시민군 생존자는 시체더미 속에서 ‘총기소지자' ‘특수폭도'로 분류 체포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이종윤 기자 winhot9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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