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는 일본 남쪽에 있는 일개 도시의 이름이지만 1945년 8월에 미국이 투하한 원자폭탄(원폭)과 그 참혹한 피해를 상징하는 대명사이기도 하다.

“1945년 8월 6일 8시 15분과 9일 11시 2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은 70여만 피폭 희생자(그중 23만여 명 사망 추정)를 낳았다. (중략) 우리나라 다수의 국민은 그 ‘원폭 덕분에’ 광복을 맞을 수 있었다고 믿었다. 그렇게 믿었던 사람들은 70만 원폭 희생자 중 7만에서 10만에 이르는 ‘조선인’이, 23만여 사망자 중 4만에서 5만에 이르는 ‘조선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혹은 그런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김경인(2023), 히로시마와 합천, 그리고 후쿠시마, 재난공동체의 사회적 연대와 실천, 역락, p. 272.)

이상에서 우리는 3만에서 5만에 이르는 조선인이 원폭의 불지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음을 추정할 수 있는데, 그들 중 7천여명을 제외한 조선인 피폭 생존자는 종전 직후 상처투성이의 심신을 질질 끌고 고국(2천여명은 북조선으로)으로 돌아왔다.(2022년 기준, 한국에는 1천 9백여명의 1세 원폭피해자만이 생존)

원폭투하로부터 78년여가 흐른 지금, 왜 ‘조선인 원폭피해자’인가? 여러 이유 중 첫째는, 1986년 4월의 ‘체르노빌원전사고’와 2011년 3월의 ‘도쿄전력후쿠시마원전사고’를 통해, ‘핵의 평화적 이용’의 배반이 원폭 피해 못지않은 방사능오염의 참극을 야기한 데에 있다. 둘째는, 2022년 2월에 발발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신냉전 시대’를 견인하고 있는 가운데 동서를 불문하고 질러대는 핵무기 위협 앞에 전 세계가 놓여있음에서도 기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폭을 포함한 이들 상황이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원전사고니 핵무기니 하는 말에서 1945년 8월의 원폭을 떠올리는 사람은 비단 필자만은 아닐 테지만, 필자의 생각은 내처 조선인 원폭피해자의 시공간인 ‘한국의 히로시마=합천’으로 향한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원폭 피해야말로 일제의 식민지정책과 침략전쟁, 그리고 대량살상무기인 원폭을 투하한 미국의 비인도적 범죄에 의한 ‘절대적 희생’임을, 원폭 1세와 그들 후세의 가혹한 삶을 통해 증언하는 ‘원폭(핵) 피해’의 원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원폭 참상의 역사’야말로 핵(전쟁) 위협에 봉착한 지금의 세계가 주목해야 할 대상이며, ‘비핵・평화의 세계’를 위한 외침을 드높이는 산증인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합천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원폭피해자가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와 합천원폭피해자복지회관을 비롯해 원폭2·3세 중심의 ‘합천평화의 집’과 ‘합천원폭자료관’이 위치한 곳이다.

김경인(일본문화연구센터 연구원)
김경인(일본문화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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