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드라마 <더 글로리>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평생 잊지 못할 괴로움으로 가득 찬 순간이 있다. 최근 파트2가 공개된 <더 글로리>의 문동은(송혜교)에게는 그 순간은 고등학생 시절의 집단 괴롭힘이었다. 그것은 교통사고와 같았다. 그저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박연진(임지연)과 그 친구들을 만났을 뿐이다. 그들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은 동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동은은 연진과 그 친구들을 향해 그리움과 닮은 깊고 진한 증오의 감정을 품게 되었고, 일상에서 들려오는 삼겹살 굽는 소리와 사진 찍는 소리는 그녀를 19살의 체육관으로 불러들였다.

연진과 친구들에게 동은은 그렇게 당해도 되는 존재였다. 연진의 남편인 하도영(정성일)이 연진에게 동은이 무엇을 잘못했길래 괴롭혔는지 물었을 때 연진의 답은 명쾌했다. “뭘 잘못해야 해?” 알 수 없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한 많은 이들은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서 찾곤 한다. 하지만 동은의 화살은 정확히 연진과 그 친구들을 겨냥한다.

동은의 시간은 19살에서 멈춘 반면, 연진과 친구들의 시간은 일상적으로 흘렀다. 동은은 그들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교사가 된 동은과 마주친 그들은 동은의 이름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가해자 중 한 명은 동은이 한날한시도 잊지 못한 그 괴로움을 주님께 고해 용서받았다고 말한다. 고통과 아픔은 여전한데 누군가는 용서를 받았다. 고통과 증오로 채워온 동은의 시간은 어디서 돌려받아야 할까.

이 잔혹한 현실이 화면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이었다면 오히려 연진과 그 친구들의 행동은 약육강식이라는 세상의 당연한 이치라 불리고 현명함이라 포장될 수 있지 않았을까. 더욱이 학교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이들은 대부분 방관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사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해도 사람들은 가해자들에게 돌을 던지겠지만 그 분노는 금방 사그라들고 잊힐 것이다. 혹여 누군가 열띤 분노를 표출한다면 자신은 가해자와 달리 선량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한 위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복수에 인생을 갈아 바치는 동은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도영이 동은에게 묻는 것처럼 말이다. “이 복수가 끝나면 문동은씨는 행복해집니까.” 피해자들이 가장 많이 들을 법한 말이다. 누군가는 피해자들을 생각하며 하는 말이겠지만 19살 체육관 이후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 동은에게 필요한 말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향해 뜨겁게 달아오른 사랑이라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녀는 그저 그녀 안에 가득 찬 증오를 흘려보내고 있을 뿐이다.

동은은 증오와 복수는 어떤 정의로운 것처럼 포장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게 된 연진의 남편과 딸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한다. 특히 떠나기 전 예솔에게 이렇게 사과한다. “네가 하라고 하면 죽는 그 순간까지 계속 사과할 거야. 너한텐 진심으로 미안하거든.” 신이 나서주지 않는 복수를 인간으로서 직접 행하고 있는 것이고, 그 끝에는 글로리(영광)가 아닌 황량함만이 있다는 것도 알지만 동은은 그 끝을 향해 나아간다.

그녀의 복수의 여정은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증오만으로 가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빨간 립스틱이 잘 어울리는 현남(염혜란), 망나니 여정(이도현), 고등학생 시절 만난 보건교사, 부동산 사장님, 방직공장에서 만난 성희 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은 동은이 필요한 순간 곁에 있어 주었다. 특히 아픔과 증오를 공유하는 현남과 여정은 따뜻한 위로나 사랑보다 동은이 진정으로 필요로 했던 복수의 칼춤을 함께 춰줄 망나니가 되어주었다. 구원은 법이나 제도, 심리상담이 아닌 지옥에 함께 있는 이들의 연대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정소희(사회학과 석사과정)
정소희(사회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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