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에 ‘지지 마라’(Lass dich nicht unterkriegen)라는 관용구가 있다. 한 독일인 선생에게 이 관용구를 독일인들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자주 쓰는지 물었다. 등교하는 아이를, 대학생 또는 직장인이 된 자녀를 응원할 때, 부모들이 늘 던지는 말이라고 한다.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선배나 직장 상사의 부당한 지시와 강요된 복종에 직면해야 할 때, 지지 말고 그에 맞서 싸우라는 전투적인 마음도 담겨 있다고 한다. 독일어 단어 ‘운터크리겐’(unterkriegen)이 ‘억압하다’ 또는 ‘정복하다’이니, 저 관용구는 축자적으로 ‘너를 억압과 굴복에 내맡기지 말라’고 풀이될 수 있다. 따라서 ‘지지 마라’는 말의 진의를 새겨본다면 ‘그래서 이겨라 또는 이겨야 한다’가 아니라, 비록 졌지만 이긴 싸움이 있을 수 있고, 이겼으나 끝내 패배한 싸움도 숱할 수 있으니, 싸움의 승패와 무관하게 “항의하고, 저항하고 싸워라”는 뜻이 되겠다. 독일인들이 이 말을 누군가에게 던질 때, 실제로 그런 의미까지 염두에 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졌다’의 반대말을 오직 ‘이겼다’로만 알고, 승패의 나눔을 전리품의 획득 여부에서만 찾는 단순한 의식에게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라는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어느 시인의 고백이 이해될 리 만무함은 분명하다. 

우리가 사는 현실 어디에도 진공상태로 존재하는 곳은 없다. 현존 사회 질서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몇몇 철학자들이 발명해 낸 ‘자연 상태’(Naturzustand)에서조차도, 흑인이나 황인, 여성이나 젖먹이, 백치가 아니라, 이성적인 분별력에 경제적 자립 능력까지 갖출 정도로 훌쩍 자라버린 성인 백인 남성들만이 활보한다. 복잡한 사회적 관계망을 모두 일소한 자연 상태라는 개념으로 어떤 현존질서가 정당화되고 있는지 정확하게 통찰하기 위해, 이 성인 남성을 뒤따르는 그림자들의 분석에 더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요컨대 현재 우리 자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종 정체성, 우리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들 전부 그것이 속한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해석적 경합을 거칠 때만 그 실체가 온전히 드러난다는 뜻이다.

‘꼴등’과 ‘일등’, ‘지방대’와 ‘인 서울 대학’, ‘구직자’와 ‘취업자’,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 ‘고졸자’와 ‘대졸자’, ‘비정규직’과 ‘정규직’,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 ‘장애인’과 ‘비장애인’과 같은 말들의 구획화와 서열화가 이미 공고하게 정착된 사회에서라면 이런 해석적 경합이 더욱 절실해진다. 정교하게 설계된 분할과 배치의 칸막이들을 많이 가진 사회일수록, 사회 구성원을 포섭하고 배제하는 권력이 활발하게 작동한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또 그럴수록 그런 권력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적다는 사실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이김과 짐’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무엇이, 어떤 이유 또는 어떤 사회적 맥락이 전자와 후자를 패배한 삶과 성공한 삶으로 호명하는지 정확하게 분석하고 이해할 수 있을 때만 ‘졌다’는 말과 ‘이겼다’는 말의 참뜻을 파악할 수 있다. 우리가 치르는 경쟁의 무대가 아직 아무것도 들어서 있지 않은 백지상태(tabula rasa)가 아니라, 사회·경제·문화·정치적 구조 및 관계들로 이미 복잡하게 조건화되어 있는 장이라서 그렇다. 싸움의 승패에 이런 성찰적 분석이 가해져야만 ‘졌으나 지지 않았고, 이겼으나 온전히 이긴 것이 아니’라는 역설의 의미 또한 제대로 풀이될 수 있다. 이런 분석과 성찰을 지적으로 게을리하는 의식에게는 사회가 미리 주조해 둔 승자와 패자의 환상에 흠뻑 젖어 기꺼이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맹목적 동일시와 강제된 존재 증명을 위한 무한한 자기 착취의 길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김과 짐’의 기준은 승자와 패자에게 돌아가는 응분의 몫이 아니다. ‘공정’ 자체가 문제시되는 사회에서는, 경쟁에서 발휘한 나의 ‘실력’과 ‘능력’조차도 성패의 유일한 기준일 수 없다. 기준을 문제 삼고자 한다면, 오히려 우리를 승자와 패자로 정체화하는 권력관계 전체에서 한발 물러서야 한다. 우리 각자의 삶을 성공과 패배 또는 우월과 열등으로 찢어 놓는 그 권력의 작동방식 자체를 심문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직 그럴 때 만 ‘이겼다’는 말이 품고 있는 패배의 상흔에, ‘졌다’라는 말이 열어 보이는 미약한 희망에 두려움 없이 마주할 수 있다. 결국 ‘굴복하지 마’ 또는 ‘지지 마’라는 말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모종의 권력 게임에, 나를 낚아채는 정체성 놀이, 동일시, 환상의 유혹에 나 자신을 호락호락 넘겨주지 않겠다는 각오와 다짐인 셈이다. 그런데 이게 그리 쉬운 일인가? 도대체 그런 유혹에 어떻게 저항하라는 것인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당대 유럽인 전체를 적과 동지의 몰아적 동일시 속에 몰아넣은 집단적 환상에 맞서, <전쟁과 죽음에의 고찰>의 저자 프로이트(S. Freud)가 내놓은 답은 뜻밖에도 ‘사랑’이지만, 이 사랑이 탈맥락적인 인류애나 동포애 따위에 호소하는 무력한 박애주의가 아님은 물론이다. 모든 유형의 사랑은 타인에 대한 강력한 파괴욕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양가성을 갖기에, 대상에의 몰입을 요구하는 사랑의 감정 속에서 타인에 대한 증오와 멸시, 배제의 감정에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을 때, 사랑이 온전히 빛을 발한다는 뜻이다. 하여 프로이트는 “우리의 사랑은 마음속에서 느끼는 미움 충동에 반발할 때 가장 아름답게 꽃을 피운다”고 적는다. 이런 경계 태세로 무장한 의식이라야 사랑의 환상에 홀려 질질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고, 이 환상이 마침내 끝장났을 때, 자기 환멸과 열패감에 쉽게 굴복하지 않을 수 있다. 승리감 또는 패배감으로 자기 자신을 그득그득 채워내는 삶보다, 비워내고 물러서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줄 아는 삶을 ‘지지 않은 삶’이라고 불러야 할 이유다.

‘지는 법을 알아야 자유롭다’는 말은 지극히 옳다. 그러나 지지 않는 법을 아는 삶이야말로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승리에의 도취감, 패배로 인한 열등감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비대한 몸뚱이를 살찌우고 있는 이 권력화된 경쟁의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다. 또 그런 법을 터득하고 실천하려는 동료들이 많은 사회에서만, 패자 또한 이긴 자 옆에 나란히 서서 다음 설욕전을 치르기 위한 숨을 경쾌하게 고를 수 있을 것이다. 

그대들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잘 버텨내십시오, 그리고 절대 지지 마십시오! 

김현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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