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계획이 완벽한 여행을 보장할 수 있을까? MBTI 유형 중 J 항목 지수가 80%가 넘고, 사용하는 일정표만 3종류인 내가 말해보자면, 글쎄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지난 1월 29일부터 2월 1일까지, 3박 4일의 일본 도쿄 자유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은 항상 철저한 계획에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고 믿는 나는 이번에도 분 단위까지 세세하게 기재한 계획표를 작성했다. 친구들에게서 가고 싶은 장소 여럿을 받아두고 이동 시간을 고려한 동선을 짜고 있으려니 여행사 직원이 된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기자가 나리타 공항 가는 공항 철도를 찾고 있다.
기자가 나리타 공항 가는 공항 철도를 찾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계획표는 나름 괜찮았다. 아니, 정말 준수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도쿄 도심 관광, 멋들어진 식당과 이자카야, 디즈니랜드에 온천까지 관광·쇼핑·휴식의 어느 한 요소 놓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자유여행을 위한 만반의 준비가 끝난 것만 같았다. 결론부터 말해보자면, 3박 4일 일정의 계획표는 반쯤 무용지물이 되어 여행 후반에는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우리의 첫 일정이었던 유명 규카츠 식당에서부터가 어그러짐의 시작이었다. 식당 오픈 시간에서 불과 15분 지났을 뿐이었는데도 우리가 도착했을 때 이미 문밖 도로까지 길게 대기 줄이 늘어서 있었다. 놀라운 것은 대충 20명가량 되어 보이던 대기 줄의 손님들이 전부 한국인이었다는 것이다. 마치 동명동의 일식집 웨이팅 줄을 보는 것 같았다. 여긴 일본인데…. 어딘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때부터였다. 아무리 기다려도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자, 이상함을 감지한 친구가 대기 줄의 앞쪽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사실 식당은 지하 1층에 있었고, 줄이 너무 길어 지상 1층 도로까지 사람들이 삐져나온 것이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에까지 빼곡한 사람들의 행렬에 놀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길바닥에서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했다.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부터 패닉에 빠졌고, 근처의 다른 규카츠 식당에 가기로 한 후부터 약간 시무룩해졌었다. 계획표 상 꼭 가야만 했던 식당인데 못 가게 되니 갑자기 이정표 하나 없는 막다른 길이 떨어진 듯한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찾아낸 로컬 맛집의 규카츠.
우연히 찾아낸 로컬 맛집의 규카츠.

그런데 이 생각이 약간 바뀐 것은, 대신 찾아갔던 다른 식당을 나설 때였다. 그 식당 역시 우리가 밥을 먹고 난 후 나설 때쯤엔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아까와 다른 점은, 줄을 선 대기 손님들이 전부 일본인들이었다는 것이다. 관광 맛집이 아닌 로컬 식당에서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건 여행객의 가장 큰 로망 중 하나가 아닌가. 부랴부랴 대신 찾아온 이름 모를 식당에서 가장 큰 여행 로망을 이루게 되어, 원래 가려던 식당에 대한 아쉬움을 흔적 하나 안 남기고 내다 버릴 수 있었다.

저녁 식사 때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춥고 배고프고 시간마저 늦어 문 연 가게를 찾기 힘들 때쯤, 골목 구석에 있는 라멘 가게에 겨우 착석할 수 있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내부에, 영어 메뉴는커녕 손님 중 외국인은 우리뿐이었다.

일본 식당의 독특한 주문 방식인 자판기 판매였다. 먼저 음식 개수를 누르고 메뉴를 선택하면 번호표를 주는 형식인데, 우리는 음식 개수를 명수로 착각해 똑같은 메뉴를 4개나 주문해버렸다. 주문 취소조차 불가능해 4명이 쪼르르 앉아 똑같은 메뉴를 먹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그냥 웃겼던 것 같다. 완벽한 계획표는커녕 이리저리 방황하기만 하다 흘러들어온 곳에서 뭘 주문했는지도 모른 채 미스테리한 메뉴를 기다리고 있는 그 순간이 우스웠다.

그렇지만 이때 먹은 라멘을 일본 여행 중 먹었던 음식 가운데 최고로 기억한다. 그 라멘은 나에게 색다른 경험이었다. 국물에 촉촉이 적셔진 치킨 가라아게에서 경험의 맛이 났다. 계획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만이 성공적인 여행은 아니라는 걸 라멘 국물 한 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원래 가려던 곳에서 더 맛있는 라멘을 먹었어도, 그 라멘에서는 경험의 맛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추위에 벌벌 떨다가 겨우 찾은 따뜻한 국물이 어쩐지 우리의 여행을 더 빛나게 만들어주지 않나, 싶었다. 묵묵히 밥을 먹으며 계획표 들여다보기를 그만두자고 결정했다.

열차 기다리는 지루함을 달래줬던 피규어 뽑기.
열차 기다리는 지루함을 달래줬던 피규어 뽑기.

어쩐지 계획표를 접어두자 자꾸 재밌는 일만 생겨났다. 시간이 늦어 온천을 못 가게 돼 대신 들른 편의점에서 인생 음료수를 발견했고, 공항 가는 열차를 놓쳐 다른 호선을 기다리는 도중 귀여운 뽑기 기계를 발견해 커비 캐릭터 피규어를 3개나 뽑아왔다.(일본 여행에서 가져온 기념품 중 단연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됐다.) 출국 날 원래 예상했던 출발 시간보다 늦게 나섰는데 마침 지나가던 호텔 셔틀버스를 발견해 공짜로 역까지 편하게 갈 수 있었다. 더는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져도 패닉에 빠지지 않았다. 그것마저 여행의 일부니까.

여행 이틀차인 지난달 30일, 젋은이들의 거리라고 불리는 시부야 번화가 풍경.
여행 이틀차인 지난달 30일, 젋은이들의 거리라고 불리는 시부야 번화가 풍경.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완벽한 계획이 곧 완벽한 여행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완벽한 여행은 의외로, 길 가다가 우연히 발견한 자판기에서 뽑은 음료수 하나에 좌지우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계획은 정답 같지만, 정답에 따라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면 더 즐길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길 가다가 우연히 찾아 들어간 가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정을 어긴 돌발 행동이 아니라 그저 즐거운 여정의 일부가 되길 바란다. 정답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오답'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이번 일본 여행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고 왔다. 한 번 맛을 보게 됐으니, 이제 더는 정답지에 집착하지 않게 될 것 같다. 앞으로 나의 모든 여행은 행선지의 문화와 그곳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즐기고 사랑할 수 있는 ‘완벽한 여행’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제 누군가 나에게 여행 계획을 물어보면 그리 대답하리다. “저의 계획이요? '무계획'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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