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기념재단에서 <5·18과 불화하기>란 제목으로 강연 중 진태원 선생(자크 랑시에르 『불화』 번역)은 1980년 5월의 사람들을 언급하는 도중 2~3분간 침묵해버렸다. 올해 첫 회인 박효선 연극상 수상작인 <전태일, 네 이름은 무엇이냐>의 나무닭움직임 연구소 장소익 대표는 수상소감으로 “1996년에…”란 말 이후로 아무 말도 못 잇고 자리에 앉아버렸다.

그들의 침묵은 어떤 말보다 지켜보는 우리에게 감정의 공진화를 일으킨다. 소리도 나지 않는 몸짓임에도 숨을 죽이게 된다. 그 공백과 침묵 속에서 생겨난 그들과 우리들의 일시적 공동체는 우리를 이성적 존재가 아닌 감성적 존재로 만든다. 그것은 타인의 눈물에서 육신을 가진 실체로 거듭나는 나의 인간(됨)에 대한 확인이다.

박효선은 5월항쟁 기간 시민군 홍보부장으로 참여하고 1983년 극단 토박이를 창립해 평생을 살아남은 자로써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갚고자 5·18광주를 연극으로 형상화했던 ‘5월 광대’였다. <전태일, 네 이름은 무엇이냐>는 1970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제 몸에 불을 붙인 노동자 전태일의 삶을 현재적 맥락으로 소환하기 위해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배우가(지역마다, 각 장마다) 전태일 역을 수행한 연극이다. 마침 2021년 광주 공연에서는 연극계를 비롯한 광주 예술계가 블랙리스트와 미투 이후에도 끊어내지 못하는 폭력의 악순환을 고발하며 예술가들의 지위와 권리보장을 위해 싸우는 장도국 배우가 참여해 연극과 현실의 간극을 좁혀냈다.

그리고 우리는 지난 10월 이태원에서 벌어진 참사의 충격으로 몸서리를 쳤다. 이어진 정부의 꼬리 자르기와 시민들의 애도를 통제하는 관제 애도 기간은 참으로 코가 막히고 귀가 막히는 일이었다. 또, 참사 당일부터 지금까지 SNS를 통해 확산된 희생자들의 이미지와 경찰이 사건을 조사하겠다고, 멀쩡한 시간에 길을 가다 벌어진 참사이니 가해자는 국가인데, 시민들을 발본색원하겠다며 CCTV 이미지를 분석하겠다는 정부를 보며 우리 시대가 처한 윤리의 끝을 목도하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도 증거와 책임, 채증과 치안을 위해 항변할 말을 빼앗긴 희생자들의 이미지를 보고 알아야 할 권리나 의무는 없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에서 아우슈비츠의 인간 절멸을 찍은 4장의 사진을 분석하며 말한다. 진실을 밝히겠다고 사람들의 정의감을 부추기기 위해서 더 강력한 증거를 위해 사진을 자르고 지우고 특정한 부위를 강조해 부각하는 것이 얼마나 윤리적 파멸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지를 누누이 이야기하고 있다.

1992년 동두천에서 주한미군에 무참히 살해된 윤금이 사건을 폭로하기 위해 거리에 붙여진 피해자의 사진은 우리의 분노에 불을 붙였을 수 있지만 그녀의 고통에는 무감했다. 1980년 5월도 이철규와 박승희 열사도 미선이 효순이 사건도 희생자들의 사진은 압도적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한편으론 그들의 죽음에 폭력적으로 재갈을 물려버린 것은 아니었을까란 성찰이 필요하다. 최근 영부인의 빈곤포르노 논란처럼 이러한 사진과 이미지의 속성이 갖는 더욱 강력한 것을 원하고 찾고 보려는 사람들의 심리는 폭력에 무감각 해지고 알아야 하고 봐야 할 권리만이 지상의 선(善)이라 여기는 오만을 낳는다.

그러나 그 권리는 폭력에 기초하고 있음에도 모르쇠 하는 정의를 앞세운 핑계이고 알리바이일 뿐이다. 누구에게도 증거와 책임, 정의와 역사, 채증과 치안을 위해 희생자들의 이미지를 보고 알아야 할 권리나 의무 따위는 없다. 오히려 사건에 처한 인간의 비극을 상상해야 할 의무가 더욱 중요하고 끊임없이 훈련해야 하는 의무가 필요하다. 침묵과 공백이 우리를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는 더 단단한 윤리적 인간으로 만들 때가 많다. 보면 볼수록 굴껍데기처럼 들러붙는 더, 더, 더 자극적이고 센 이미지를 찾는 심리를 정의니 권리니 따위로 변명하지 말자. 고통의 감각을 상상하라. 우리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감성적 존재이고 타인을 향한 감각은 의무 이전에 우리들 존재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한재섭(씬1980 전 편집장)
한재섭(씬1980 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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