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9일 헬로윈 축제가 한창이던 서울 이태원에서 비극적인 참사가 발생했다. 현재까지 사상자는 사망 156명, 부상 187명으로 총 343명이다. 좁은 골목길에 별다른 통제 없이 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숨통이 막힐 정도로 사로 밀착되다가 끝내 압사되거나 커다란 부상을 당했다.

산업화된 대도시의 핵심은 흐름이다. 도시에서의 삶은 매우 유동적이고 상호작용의 밀도가 높기 때문에 이동에 흐름이 단절될 경우 큰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흐름의 단절은 밀집으로 나타나고 극단적인 경우 이번 사건처럼 비극적인 ‘압사’로 이어질 수 있다. 흐름에 대한 조절과 통제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누구보다 통제권을 위임받은 국가기구(경찰, 지자체 등)의 책무이다. 국가는 도시의 흐름을 통제하고 조절하면서 사람들이 보다 더 자유롭고 안전하게 이동하도록 권력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애통하게도 이날 주요 국가기관은 느긋했고 인근의 몇몇 경찰관들과 그곳에 있었던 시민들만이 사력을 다해 생명을 구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국가권력은 재빨리 일주일간 애도의 날을 선포했다. 수많은 시민들의 죽음에 커다란 책임을 져야 할 행정부가 애도를 선점함으로써 시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슬퍼하고 애도를 표할 수 있는 시간과 자유를 박탈당했다. 사고 당일 이태원에 있어야 할 권력은 애도를 독점하려 든 순간에 버젓이 등장했다. 감정에 대한 독점은 행위의 여러 가능성을 차단해버린다. 진실규명과 책임자에 대한 엄중한 처벌은 자연스럽게 지연되고 의문에 대한 질문은 제기되지 못했다. 통치자는 연일 분향소를 찾으며 애도의 주체임을 연출했고, 책임자들은 책임 면피를 위한 시간을 버는 데 집중했다. 투철한 직업윤리를 지닌 정치인이나 책임윤리는 지닌 관료는 찾아보기 힘들고 간교한 관료들만 TV 화면을 채웠다.

시민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국가는 최우선적으로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데 그 권력을 활용해야한다. 이로써 시민들은 자유를 실현할 수 있으며, 각종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생명 보존은 모든 인간의 기본권이자 존엄성의 근간이다. 국가는 바로 그 기본권 사수를 정언명령으로 받아들이고 관료들은 그런 일을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전문가로 채워져야 한다. 이른바 최고 수준의 공적 인간으로서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관료가 그 자리에 서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지난 수십 년 동안 몇몇 사회적 대형참사를 겪는 과정에서 마주했던 모습은 불행하게도 대체로 기형적인 정치관료들의 무능과 뻔뻔함이었다.

이번 10.29 참사를 대하는 정치관료들의 뻔뻔함은 도덕감정이 제거된 사법의 논리로만 자신을 무장한 결과이다. 현 정권의 주요 관료들은 사법적 관점으로 사안을 파악하고 재빠르게 처벌 대상을 색출해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도덕적·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핵심 관료들은 사법적 보호막을 굳건히 세우고, 하급직 관료들이나 담당자를 문책하는 데 급급하다. 사법적 처리를 통해 슬며시 도덕적 책임을 면하려는 이들의 뻔뻔함은 법의 논리에 숨겨진 폭력을 냉정하게 성찰하지 않은 채로 법을 신성화한 결과이기도 하다. 법 또한 숨통이 막혀 처절하게 죽어간 희생자들과 죽음의 문턱까지 오갔던 부상자들 그리고 깊은 슬픔에 빠져있는 그들의 가족과 이웃의 고통을 끌어안을 때 비로소 민주주의와 호응할 수 있다.

권력자들에게서 결핍된 도덕은 결국 시민들의 집합적 양심으로 채워지게 된다. 집합적 양심의 힘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지 예측하기 힘들다. 하지만 역사는 그것을 증명해왔다. 사법적 논리가 집합적 양심의 힘에 의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가를 우리는 역사적 경험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이제부터 애도를 위한 애도에 기생했던 뻔뻔한 존재들을 냉정하고 차분하게 가려내야 할 것이다.

애도는 비참하게 희생당한 이들에 대한 즉각적인 애도 제스처가 아니라 이들의 죽음 과정 전말에 대한 원인규명과 책임자의 도덕적·법적 처벌이 수반될 때 의미를 갖게 된다. 희생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에 대한 위로는 이 과정에 얼마나 총체적인 노력을 기울이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의 애도도 그때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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