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언어가 빙산 같다는 생각을 한다. 기호로 표현된 문장 이면에 더 많은 내용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사랑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두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사랑을 이해할 뿐이다. 누군가에는 섹스가 사랑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정서적 교감이 사랑일 것이다. 어린아이들에겐 부모님과의 관계가 사랑의 이미지 아닐까?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쓰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가 얼마나 많은가? 사랑을 둘러싼 수많은 혼란은 <나는 솔로>, <환승연애>, <마녀사냥> 등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다. 언어는 기호보다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가령 누군가가 “끼어들기 할 때는 속도를 높여야 안전해.”라고 말했다고 해보자. 속도를 높여야 안전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운전에 익숙하지 않다면 모순적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크다. “요리할 때 칼이 날카로워야 다치지 않는다.”는 말은 어떤가? ‘칼이 날카로우면 더 다치는 것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지 않을까. 이 문장들을 이해하려면 사용된 표현 외에도 알아 할 것이 많다.

도로의 합류 지점에서 끼어들기를 할 때 진입 차로의 차들은 빠른 속도로 주행한다. 안전하게 그 흐름을 타려면 속도를 올린 상태에서 진입해야 한다. 무서워서 주춤주춤하는 것이 되려 위험하다. 요리할 때 칼이 날카롭지 않으면 칼날을 의도한 대로 제어하기 힘들고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 크게 베일 수 있다. 운전과 요리를 모른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외국어를 사용할 때 언어에서 배경이 얼마나 중요한지 극적으로 드러난다. 이 칼럼을 쓰다 《뉴욕타임스》 어플을 켜 첫 화면에 나오는 기사를 읽었다. 10월 3일 자 기사의 첫 문장은 “지난해 공화당 하원의원 다수가 선거인단에 도전하고 대통령 선거를 뒤집는 데 투표했다.”(“a majority of House Republicans last year voted to challenge the Electoral College and upend the presidential election.”)이다.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선거인단을 뽑는 복잡한 방식의 승자독식 구조라는 점, 2020년 선거에서 트럼프가 미시간주와 위스콘신주에서 역전당하면서 선거인단 과반 확보에 실패했다는 점, 이후 트럼프가 선거 부정 의혹을 제기했다는 점, 그 의혹 때문에 2021년 1월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회 점거 폭동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4명이 사망했다는 점, 여전히 많은 공화당 지지자들이 선거 승리를 도둑맞았다고 믿는다는 점, 이런 분위기로 인해 하원 선거에 앞서 치러진 공화당 경선에서 반트럼프 의원들이 줄줄이 패배했다는 점 등의 배경을 모른다면 이 문장을 해석해도 무슨 뜻인지 오롯이 이해하기 어렵다. 외국어 읽기가 어려운 이유는 배경이 되는 문화나 맥락을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언어 너머의 이야기가 문장의 의미를 완성하는 셈이다.

언어적 소통은 문자나 소리라는 기호 너머의 배경을 이해하는 일이다. 이때 배경은 개인의 경험과 지식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서로의 경험과 지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소통은 불가능하다. 오래된 연인이 길게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과는 반대로 디지털 세상 속 소통이 어려운 이유다. 포털의 기사나 유튜브의 영상 댓글 속 논쟁은 꼬투리 잡기가 대부분이다. 글자 너머에 다른 배경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한 채 문구 자체만 문제 삼는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에 갇혀 다른 입장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차단한다. 지극히 유아적이고 자아도취적 사고다.

이런 단절을 극복하는 방법은 공통의 경험과 지식을 늘려 서로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갈수록 공통점을 갖는 일이 힘들어진다. 2010년을 전후로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고, 페이스북(2004), 유튜브(2005), 인스타그램(2010) 등 주요 SNS가 자리 잡으면서 미디어 환경이 다원화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전후로 성장한 넷플릭스, 티빙 같은 OTT 서비스들은 레거시 미디어 몰락에 방점을 찍었다. 모두가 9시 뉴스에 나온 소식과, 일일 드라마의 줄거리를 공유하는 시절은 끝났다. 구독자 100만이 넘는 채널만 한국에 500개가 넘는다. 이제 “너 어제 드라마 안 봤어?” “그 뉴스 못 들었어?”라고 말할 수 없다. 단적으로 미디어 환경만 봐도 공통의 상식이랄 것 없는, 서로 다른 배경 속에서 사는 상황이다.

문제는 이런 파편화가 일상적인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2016), 브렉시트(2016),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까지 간 마린 르 펜의 약진(2022), 이탈리아 극우성향 총리의 등장(2022)은 각국에서 공론장이 사라지고 정치에서의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통이 단절되면 그만큼 이데올로기와 분노를 활용한 포퓰리즘이 효과적으로 작동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공통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소통을 유지하는 것. 우리 사회가 마주한 새로운 과제다.

문경훈(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문명훈(조선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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