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고정관념 재생산하는 보도 정정
문학계, 젠더 개정판 출간

‘산수책방’ 김미순 사장이 성평등 도서를 지난 4일 서가에 전시하고 있다.
‘산수책방’ 김미순 사장이 성평등 도서를 지난 4일 서가에 전시하고 있다.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대법원 2018. 4. 12. 선고 2017두74702 판결)

‘성인지 감수성’이 처음 판결 기준으로 쓰인 2018년은 젠더 이슈가 뜨겁게 대두되었던 시기다. 서지현 검사에 의해 시작된 미투 운동이 퍼져나가며 우리 사회의 부족한 성인지 감수성을 일깨워주었다. 2018년부터 지금까지 약 5년의 시간 동안 대학은 페미니즘 연구가 활발해졌고 출판계는 묻혀있던 목소리를 꺼냈다. 언론은 구조적 변화를 시도하며 정정 보도를 통해 성차별 지적을 받아들였다.

“학내 성평등 교육 필수”

황혜연 씨(생활복지·20)는 “2018년 이전에 학교를 다니지 않아 미투 운동 이후의 학내 변화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도 “고려대학교 단톡방 성희롱 사건과 같은 학내 젠더 기반 폭력들이 미투를 거치며 물밑으로 가라앉긴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 대학 ‘성심리학’ 수업을 통해 성인지 감수성에 대해 배운 김석희 씨(사회·21)는 “한국 사회의 보수적인 성적 표현은 성적 고정관념을 강화시킨다”며 “성평등을 위한 실효성 있는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김지영 우리 대학 젠더연구소 연구원은 “미투 운동 이후 학내 페미니즘 연구가 더 활성화되었다”며 “전대신문과 용봉교지가 보도하는 걸 보면 젠더 문제를 예전보다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대학에서 젠더 교과목을 더 마련하거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성희롱 예방 교육을 진행하면 좋겠다”며 “젠더연구소는 학생과의 소통을 위해 전남대 내 젠더 교육 환경을 분석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대학 신문들에서도 성평등을 위한 움직임을 보도했다. 숙대신보는 지난달 26일 증가하는 대학 내 성범죄 사건에 주목하며 안전하지 못한 학내 환경을 지적하는 기사를 냈다. 이대학보는 직접 여성학과 관련된 질문을 받고 그에 대한 답변을 전문가로부터 듣는 칼럼코너 ‘똑똑, 여성학에게 묻습니다’를 지난해 4월부터 운영해 긍정적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언론계, 성차별 표현 지적 받아들여

잘못된 성적 고정관념은 미디어를 통해 답습되고 재생산된다. 유태현 씨(물리·19)는 “아직도 직업 앞에 ‘여’자를 붙이는 표현을 쓰는 걸 본다”면서도 “2018년 이후에는 뉴스에서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단어가 많이 들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사건 피해자를 특정한다거나 조회수를 위해 자극적인 제목을 쓰는 걸 지양하자는 기사를 봤다”며 “확실히 언론이 느리지만 변화하긴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정정 보도나 사과보도에 인색한 한국이지만 실제로 달라진 성인지 감수성에 따라 기사를 수정하는 일도 잇따르고 있다. 2020년 한 기자는 당초 ‘개발자 꿈꾸던 모범생, ‘부따’ 강훈의 이중생활’이었던 기사 제목을 ‘‘부따’ 강훈 동창 증언...“음담패설에, 체육복 탈의 훔쳐보려 해”’라고 수정했다. 게재된 사과문에는 “모범생이라 할 수 없고, 가해자에 이입할 수 있는 우려 등 독자분들 의견에 깊이 공감”한다며 “이름 모를 피해자들을 위한 기사를 쓰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에서는 지난 7월 한 학생이 인하대에서 사망한 사건에 대해 선정적·성차별적 표현을 사용한 언론사를 조사하여 밝혔다. 이에 ‘한겨레’에서는 민언련에서 조사한 언론에 이름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정적·성차별적 제목, 고백합니다’라는 칼럼을 통해 인하대 사건을 처음 보도할 때 ‘여대생’과 ‘알몸’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몇 분 뒤 수정했다고 고백했다.

황 씨는 미투 운동 이후 성범죄 피해에 대한 분노, 연대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일이 늘었다. 그는 “폭력 범죄를 다룰 때 유독 여성을 강조하는 헤드라인이 많았다”며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이 지적을 받아들인 기사가 늘어나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보도에 대한 지적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도 성평등센터나 연구소를 개설하는 등 균형 있는 젠더 보도를 위한 언론의 구조적 움직임도 보였다. KBS는 2018년 10월 언론사 처음으로 성평등센터를 갖추었다. 센터는 사내 성범죄 신고를 접수하여 피해자를 지원하고 보호하는 업무를 갖는다. 이후 성폭력 피해자 중심의 보도를 원칙으로 하는 기본 틀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에 최수연 씨(신문방송·22)는 “언론이 성평등센터나 젠더데스크 등을 신설하는 걸 보면 사회의 흐름을 잘 반영한 움직임 같다”고 말했다. 그는 “미투나 페미니즘, 동성애와 같이 나의 생각과 달라 불편하더라도 계속해서 ‘인지부조화’를 마주하는 게 필요하다”며 “언론도 독자가 사회현상을 외면하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출판계, 여성주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작업 이어져

“건우가 손을 잡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소라는 세 번은 거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자들은 너무 쉬운 여자는 좋아하지 않는다나.”(「너도 하늘말나리야」(1999년) 中)

「너도 하늘말나리야」를 쓴 이금이 작가는 1999년 출간된 책 속 위 문장을 “건우가 손을 잡자고 하면 어떻게 하지? 소라는 전적으로 내 마음에 달린 거라고 했다. 내가 잡고 싶으면 잡고 싫으면 말고”로 수정했다. 이 작가는 2021년 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그 사이 변화한 농촌 환경이나 개선된 인권 의식, 성인지 감수성 등을 다시금 살펴보고 반영할 수 있어 다행이고 기쁘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자신의 대표작인 「유진과 유진」, 「소희의 방」, 「숨은 길 찾기」의 성차별 표현들도 개선된 인식에 맞게 직접 고쳤다.

널리 알려진 작품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다시 바라보고 비트는 작업도 있었다. ‘민음사’의 문학잡지 ‘릿터’ 13호에선 현대 작가들이 고전 소설 다시 쓰기를 시도했다. 김이설 작가는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서 주인공의 아내에게 살아있는 목소리를 부여하여 「운발 없는 생」을 선보였고 이상의 「날개」 또한 김보현 작가가 주인공의 아내 시점으로 「미망기」를 썼다.

달라진 성인지 감수성을 반영한 개정 사례도 있다. 출판사 ‘열린책들’은 2021년 5월 SNS를 통해 ‘중쇄 혹은 판갈이 때마다 수정을 한다’며 세 가지 수정사항을 설명했다. 이는 처녀작은 데뷔작으로, 남자는 반말 여자는 높임말을 쓰던 관행은 원문에 따라 쌍방 반말, 쌍방 높임말로, 여류라는 단어는 삭제하는 것을 말한다. 이 세 가지 수정사항을 모두 적용한 것으로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1992년 출간, 2021년 전자책 개정)을 소개했다.

젠더나 성인지 감수성을 다룬 책이 나오는 분야도 다양해졌다. 2015년부터 ‘동네책방 숨’을 운영해온 이진숙 사장(51)은 “미투 운동 이전엔 페미니즘 관련 책이 학문 영역에서만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책은 생각보다 트렌드에 민감해서 사회 주제가 나타나면 빠르게 출간된다”며 “이제는 그림책, 청소년 도서, 에세이같이 다양한 분야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성범죄 피해자들이 출판을 통해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경우도 늘었다. ‘산수책방’ 김미순 사장(55)은 “미투 이후 출판을 통한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며 “그들은 자신이 당했던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글을 쓴다”고 말했다. 그는 “광주 연극계 미투 보도를 통해 알 수 있듯 예전에 비해 피해자들과 연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며 “피해자들이 좀 더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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