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방향성을 가진다. 높은 곳을 오르는 것은 힘들지만, 그 반대는 너무 쉽다. 고층빌딩에서 지상으로 내려오고 싶다면 허공으로 한 발을 내딛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다음에는 아무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이 그저 지구의 중력이 알아서 해주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만한 높이를 올라가려면 상황은 정반대이다.

이번에는 중력이 자꾸 당신의 사라진 꼬리를 잡아당긴다. 위로 오르려는 노력은 아래로 내려가려는 노력에 비해 더 많은 힘이 들어가고, 어려움과 고통을 동반한다. 또 어린아이는 자궁에서 태어나 무덤으로 이동한다. 노인이 무덤에서 태어나 어린아이의 자궁으로 들어가는 것은 영화 속 주인공 벤자민 버튼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폐쇄된 계에서 열운동은 평균화되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어느 한쪽이 더 뜨거워지고 반대편은 차가워지는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전자는 ‘시간의 화살’로 후자는 ‘엔트로피’라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생명 현상은 매우 복잡한 질서들의 구축이라는 점에서 예외적인 현상처럼 보이지만, 이 국소적 성격을 포함하는 비국소적인 세계 일반은 여전히 두 가지 원칙을 관철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현대 자연과학의 상식이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지금껏 당연하게 생각했던 많은 것을 의식하게 된다. 전체로서의 우주에 방향성이 있다면, 그 속에 살고 있는 부분으로서 인간의 영역에도 같은 것이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놀기 위한 결정과 그 활동은 논문을 쓰기 위한 결정 및 활동과 비교했을 때 일반적으로 쉬운 축에 속한다. 굶주림을 느꼈을 때 한 끼의 밥을 먹으면서 왜 우리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일까?

밥을 먹기 위해 지불해야 할 돈을 버는 활동은 밥을 먹는 것보다 더 어렵고 따라서 고통은 거의 편재적이다. 이것은 근원적으로 인간사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생물학적 조건이 함축하는 방향성으로 움직이는 인간 행동이 있고 그렇지 않은 쪽으로 움직이는 인간 행동이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날 수 없다. 새와 같은 날개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신체가 비행이 아닌 지상에서의 보행이라는 방향으로 진화되었다는 뜻이다. 팔을 날개처럼 흔들어 날려는 시도를 묘사한 이카루스의 비행은 비극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의 신체로 날 수 없기에 비행기를 발명해서 거기에 자신의 몸을 실었다. 제약이 ‘불가능’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만이 요점인 것은 아니다. 인간이 비행기를 발명하기까지의 시간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매우 길고 복잡한 과정과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필요로 했다. 한 마디로 그것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우리가 숙고해봐야 할 삶의 문제가 하나 있다. 강요된 삶이 아니라면 삶의 선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더 쉽다. 그것은 우리의 생물학적 조건과 일치하고 거기에 적응하는 방식이다. 달리기보다는 걷고, 걷기보다는 서있으며, 서있기보다는 앉고, 앉기 보다는 누우며, 그냥 눕기 보다는 배를 바닥에 대고 눕는 식이다. 다른 하나는 더 어렵다. 눕기에서 달리기를 넘어, 뛰어넘기에서 비행에 이르는 방식이 그것이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이 두 가지가 한 번의 결정으로 명확하게 나뉘는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논문쓰기에서 표절이 함께 나타나는 것은 그래서이다. 표절의 정황을 발견하고도 표절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이다. 표절이 자유로운 품격있는 시절이 있었노라고 강변하는 누군가가 나타나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 속에서도 일관된 방향성이 드러난다. 왜 이렇게 어렵게 쓸 필요가 있는가? 왜 표절을 문제 삼는 곤란한 행동을 해야만 하는가? 왜 규정의 유무와 상관없이 표절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어렵게 말할 필요가 있는가? 왜 삶에는 쉬운 길이 있는데 굳이 어려운 길을 가야할 필요가 있는가? 물론 그런 법칙은 없다.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더 ‘좋다’거나 ‘바람직하다’라는 보장도 없다. 

할 수 있는 말은 겨우 이런 것이다. 인간이 새의 날개와 비행을 목격하고 자신에게는 그런 것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자각한 이래로, 그 사실에 순응했더라면 비행기는 영원히 발명되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에 어떤 법칙이 없다는 이유로 주어진 제약을 그저 받아들이고, 이것을 ‘자연스러움’으로 개념화하며 여기에 기반한 삶의 태도를 ‘정당한’ 양식이라고 주장했더라면, 애초에 인간 사회는 결코 동물로부터 구별되지 못했을 것이다. 

대학이란 원래 겨우 이런 이념에 목을 매는 곳이었다.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