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급 조선인 전범 문제 47년간 끈질기게 파헤쳐…미래 세대 후속 연구 기대
“태면 철도 전체상 그려내는 작업 이어갈 것…전범 당사자 증언집도 내고파”
“한일간 대화로 과거사 바라보는 여러 인식 공유해야”

1941년 12월 하와이 진주만 기습을 시작으로 일본군은 1942년 1월 마닐라, 2월 싱가포르, 3월 인도네시아 자바를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26~27만 명의 연합군을 포로로 잡아들였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포로들을 관리할 병력이 필요했던 일본은 1942년 5월 조선에서 포로감시원을 모집했다. 당시 반강제로 모집된 사례가 많았던 조선인 3000여 명은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은 뒤 1942년 8월, 타이·싱가포르·인도네시아·필리핀·말레이시아 등지로 보내졌다. 조선인들은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을 직접 관리하는 일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연합국은 전쟁 기간에 벌어진 독일과 일본의 ‘전쟁범죄’를 묻기 위해 군사 재판을 열었다. 1945년 12월 연합군 총사령부가 규정한 내용으로 전범 재판은 진행됐는데 군사재판조례에 따라 전쟁범죄의 형태는 3가지로 구분됐다. ‘A급 전범’은 ‘평화에 대한 죄’를 물어 전쟁의 결정 및 수행을 직접 담당한 전쟁 지도자를 대상으로 했다. B항은 포로 학대 등 ‘통상의 전쟁범죄’를 말하고 C항은 ‘인도에 관한 범죄’였다. B급과 C급은 ‘BC급 전범’으로 분류되었고 이들은 A급 전범 이외의 ‘통상의 전쟁범죄’로 기소된 사람들이었다.

군사 재판을 통해 현지 군사령관, 하사관, 일반 병사, 통역 및 포로 감시원(군속) 약 5700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중 984명은 사형판결을 받았다. 이중 조선인은 148명이었고 23명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여기에서 포로감시원은 129명이었고, 연합군 포로 학대 혐의를 받은 조선인 감시원 129명 중 14명에게는 사형이 집행됐다.

우쓰미 아이코(内海愛子, 81)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역사사회학자, 평화운동가)는 BC급 조선인 전범 당사자와 유가족을 직접 만나 구술조사를 실시하고 당시의 연합군의 재판기록을 분석하는 등 40년 넘게 집요하고 끈질긴 전범 연구를 해오고 있다. 조선인 전범 문제가 세상에 알려진 것도 그의 구술 및 재판자료를 토대로 한 연구가 발표된 이후부터였다. 그전까지 조선인 전범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외면받았다. 일본은 조선인을 전범으로 만들었지만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을 모른척했다. 일본은 조선인 전범을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보상에서 제외했다. 우쓰미 교수는 "동원은 일본인으로 하고 재판도 일본인으로 받고 보상은 조선인이라고 배제하는 이것이야말로 일본 전쟁의 부조리이다"고 말했다.

전범이 된 조선인들은 조국으로부터도 손가락질받았다. 조국에게 그들은 일제의 협조자였을 뿐이었다. 한국 정부가 BC급 조선인 전범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로 공식 인정한 것은 2006년 5월의 일이었다.(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우쓰미 교수는 『조선인 BC급 전범의 기록』(朝鮮人 BC級 戰犯の記錄, 1982)을 통해 연구 내용을 정리했고, 책은 2007년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으로 국내에 뒤늦게 번역, 출판되었다. 우쓰미 교수는 BC급 전범 문제를 일본군의 포로정책 문제로 접근했다. 그 내용은 그의 책 『일본군의 포로정책』(2005)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포로감시원들이 전범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가 존재했고, 그러한 모순을 책은 세밀하게 파헤쳐 짚고 있다.

장기형을 받은 전범들은 일본의 ‘스가모 형무소’로 이감돼 수감생활을 하다 1950년대 중반, 석방됐다. 1955년, 이들은 ‘동진회’를 결성했다. 동진회는 재일조선인 및 한국인 BC급 전범과 유가족 70여 명이 만든 모임으로, 조선인 전범의 구제조치를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동진회 회장으로 활동하던 한국인 전범 마지막 생존자 이학래 씨(전남 보성 태생의 태국 포로감시원, 재판 당시 22세)는 지난해 3월 28일 96세의 일기로 눈을 감았다.

우쓰미 교수는 지난 6월 8일 우리 대학이 주관하는 제15회 후광학술상 민주인권평화분야 수상자로 선정됐다. 지난 8월에는 제26회 만해대상 평화대상을 수상했다. 그는 “이 상이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하나의 전환기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후광학술상금을 일본의 다음 학문 세대에 기부하며 “후광학술상을 받게 되어 무척 영광으로 생각하고 김대중 대통령의 유지를 계승하고 한일간의 학술 연구를 지속해가는 젊은 인재들에게 이러한 기부금이 지원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읽고 조선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고.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를 했다. 이 시기는 ‘내 삶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였다. 일본이 1960년대 소위 ‘안보투쟁’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고, 운동의 혼란 시기이기도 했다. 그때 그 책을 읽게 되었고, 책을 읽으면서 일본의 근현대사를 전혀 몰랐던 나를 반성했다. 교사를 그만두고 다시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국 유학을 포기하게 된 사정은.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했고, 그때 재일조선인 차별 문제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당시 와세다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서울대 사회학과 유학을 고민하고 있었다. 1971년 서울대 교수의 편지를 가지고 재일동포 유학생이 내 집을 방문했다. 그 유학생이 한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한국에서 체포되었다. 그 유학생은 한국에 잘 알려진 서승 씨였다.

군사정권 하에 일본 학생들이 체포되는 걸 보면서 한국으로 갈 수 있는 유학 조건들은 점점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나도 생활을 해야 했기에 인도네시아에 있는 일본어를 가르치는 교사를 지망했고 1975년 인도네시아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연구의 발단은 인도네시아에서였다.

“1975년 유학을 떠난 지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인도네시아의 독립투쟁에 참여한 일본인 군인 3명의 이장식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장식에는 저의 남편인 무라이 요시노리(村井吉敬)가 통역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 독립투쟁에 참여한 3명의 일본인 군인 중에서 2명은 유족과 연결되었고, 분골 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남은 한 유골은 유족을 몰라 분골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인도네시아에 매장하게 됐다. 그 한 명의 유골에는 인도네시아 이름으로 ‘코마르딘’이라는 이름이 적혀져 있었고, 또 다른 일본 이름으로 ‘야나가와 시치세이(梁川七星)’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어느 일본인이 나에게 “야나가와 시치세이라는 이름은 드물죠?”라고 이야기하면서 “저 사람은 조선인”이라고 가르쳐주었다.

1975년 당시에는 이미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한국 대사관이 있었다. 한국인 유족에게 연락을 했냐고 물었을 때 그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우리는 이것을 아주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명부에는 주소도 있었고 본적지도 적혀 있었지만 일본 당국은 유족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야나가와 시치세이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야나가와 시치세이 등은 네덜란드군에 잡혀 인도네시아 독립군으로 처형을 당했고 이 때문에 네덜란드 기록에 남아 있었다. 다른 조선인 출신의 독립군들도 있었다. 우리는 조사를 통해 인도네시아 독립군 속에 일본군으로 동원된 조선인이 야나가와 시치세이를 포함하여 8명이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그중 한 사람은 마츠모토 길동이라고 적혀있었는데, 본명은 이길동이다. 그의 사촌 동생이 자기 삼촌인 이길동을 찾고 있었다. 우리가 조금만 알아보려고 해도 8명에 이르는 이들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조사를 통해 야나가와 시치세이, 그의 본명을 당시에는 알아내지 못했다.

1978년 일본으로 돌아와 인도네시아 독립투쟁에 참여한 조선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삼천리」라는 잡지에 기고했다. 「삼천리」는 조선인들의 잡지이기도 했는데, 우리가 투고한 글을 보고 “야나가와 시치세이는 내가 찾고 있는 나의 사촌”이라고 하는 독자가 나타났다. 야나가와 시치세이의 본명은 ‘양칠성’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그의 여동생은 아직도 한국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78년 우리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양칠성의 여동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여동생의 “왜 좀 더 빨리 연락하지 않았나” 하는 반응이 인상에 남았다. 양칠성의 어머니는 해방 직후부터 귀국 열차가 올 때마다 남원역에 나가서 마지막까지 아들을 기다렸고 결국 눈물과 한탄 속에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구를 통해 인도네시아 자바에 동원된 조선인 군속이 만든 항일단체 고려독립청년당의 존재도 드러났는데.

“우리가 한국을 방문해 유족을 찾을 때 우리를 도와줬던 이들은 양칠성과 똑같이 인도네시아 자바 지역에서 조선인으로서 독립운동을 했던 즉, 고려독립청년당(일본 군정 치하의 자바에서 조직된 조선인 군무원의 항일 비밀결사체)을 만들었다. 우리가 만났던 이상문, 박창원은 고려독립청년당 소속이었는데 서울에서 만났고, 이들을 통해 일본 식민지 시기 이들은 동남아시아로 보내졌고 여기에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조직을 만드는 등 새로운 움직임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당시 일본군 내에서 무장봉기를 기획했고, 비밀 조직 고려독립청년당을 만들었는데 무장봉기 직전, 조직의 실체가 탄로 나 당원들은 체포됐다. 이들은 인도네시아 해방 직후 귀국을 위한 재자바조선인민회라는 것을 만들어 귀국 준비를 했다. 언어를 쟁취했고 역사를 공부하면서 조선인으로서의 정신을 육성하고자 했다. 재자바조선인민회 사람들은 고려독립청년당원으로 잡혀있던 이상문 등을 지원했고 이들의 석방을 도와서 그들을 보살펴 주었다.

인도네시아에서의 일본 식민지 지배는 끝났지만, 다시 네덜란드가 식민지 정책을 하려 했고, 인도네시아인들은 독립투쟁을 준비했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재자바조선인들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현지인들의 외침에 그들의 독립투쟁을 지원하려는 일본군 출신들도 있었다. 약 20명 이상의 사람들이었는데 그중에 조선인 일본 군인들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 일본군 부재자 명부는 한국 정부에게 전달돼 있었고 이 명부를 한국 시민운동가를 통해 다시 입수하여 보니 양칠성을 포함한 부재된 조선인 일본 군인 8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양칠성은 네덜란드군에게 처형당해 공식적으로 기록이 남아 있지만, 나머지 7명은 언제 어디서 사망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파악한 명부 중 ‘수바르조’라고 하는 한국인 본명 이종렬이라는 사람은 당시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인도네시아 현지 여성에게 보낸 편지들도 있었지만 네덜란드군의 습격으로 이러한 기록들이 다 불살라져 버렸다는 증언을 들었다.”

양칠성을 제외한 나머지 7명의 가족을 찾는 일은.

“이 부재자 명부는 일본에서 지금도 볼 수 없다.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게 전달한 명부를 확인한 때는 1990년대이다. 한국의 민족문제연구소의 협조를 받았다. 이 명부로 이들의 본명과 본적 등을 알아냈고, 신문 인터뷰와 방송을 통해 이 내용을 알려왔다. 그중 한 사람이 이길동 씨였고, 이 씨는 전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외에 분들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큰 진척이 없다. 오늘 이 8명의 명단을 가져왔는데 <전대신문>에도 이들의 상세 내용이 실렸으면 좋겠다.”

인도네시아 독립운동과 조선인 군속(자바포로수용소 부재자 명부 인용)

赤城正交(본명: 우정수/본적: 경상남도 함양군/비고: 납치), 松本吉童(본명: 이길동/본적: 전라남도 화순군/비고: 기재 없음), 城山鐘烈(본명: 이종렬/본적: 경상남도 창원군/비고: 인정불능, 인도네시아 납치), 梁川七星(본명: 양칠성/본적: 전라북도 완주군/비고: 기재 없음), 大島一起(본적: 전라남도 제주도/비고: 인정불능, 종전 후 독립운동에 참가 후 납치 @@@(문자불명)), 永江清雄(본적: 황해도 황해주군/비고: 종전 후 인도네시아군에 잡혀 투옥, 그 후 상황불명), 西門萬初(본적: 전라북도 @@(문자불명)/비고: 인정불능 납치), 国本星龍(본적: 전라남도 화순군/비고:인정불능 인도네시아 납치) -우쓰미 아이코 작성-

 

식민 지배 하에 동원된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일본인으로 재판을 받았다.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주최로 전범 재판을 개최했고, 이 전범 재판에 한해서는 조선인이라도 일본인으로서 재판을 실시한다는 방침을 내렸다. 영국도 똑같은 방침을 세웠다. 미국과 호주의 연합군도 같은 방침이었다. 일본의 패전 이후 다시 동남아시아의 식민지 재침략을 시작한 연합군들은 일본이 아시아를 식민 지배하고 있다는 문제를 일체 무시했다. 이것은 식민 지배를 시작한 연합군의 국가들이 일본의 식민 지배 문제를 재판에서 거론하지 않았던 것이고, 이는 한일 국교 정상화에 있어서도 일본이 식민지 인식을 하지 못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연합군이 주최했던 도쿄 재판(극동군사재판)에서도 이는 거론되지 않았다. 당시 도쿄 재판의 피고석에서는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 고이소 구나아키가 앉아 있었다. 기소장에는 식민 지배에 관련된 문제는 기록되지 않았다. 조선군 사령관 기소장에도 식민 지배에 관한 것은 기록돼 있지 않았다. 조선인들은 일본인으로 재판을 받았다. 그렇다면 연합군들은 무엇을 재판했던 것인가?

일본이 수락했다는 포츠담 선언에는 연합군의 포로를 학대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일본의 범죄를 재판한다는 항목이 있다. 일본은 전쟁 중에 획득한 포로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이 포로관리인들로 조선인이나 대만인들을 고용했다. 결국 이 포로감시원으로 일본의 전쟁에 동원되어 포로수용소에서 일했던 조선인 중 129명이 일본 전범으로 기소당했다.”

당시 재판을 통해 처형당한 사람이 야스쿠니 신사 명단에 올라갔는데, 처형당한 전범 가족들도 마찬가지로 원호금은 받지 못한 것인가?

“지적한 그대로다. 야스쿠니 원호금 대상에서 배제되었다. 합산은 일본인으로 하고, 보상은 한국인 취급을 하는 것이다.

129명 중 사형을 받은 사람이 23명이다. 사형을 받은 사람 중 포로감시원이 14명이다. 나머지 9명 중 홍사익은 포로수용소 소장이었고 8명은 중국 지역에서 통역을 담당했던 사람들이다. 유가족 중에서 변광수라는 분이 있다. 그는 고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유골을 찾으러 일본에 왔었다. 하지만 유골은 창고에 방치되어 있었고, 결국 대응에 문제가 있다고 화를 내며 유골을 받지 않고 돌아갔다.

한국에도 동진회가 있다. 일본 정부가 유골을 반환하지도 않아서, 동진회 당사자들이 일본 정부에 유골 반환 운동을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유골을 돌려주면서도 유족 연금에 대해서는 일체 지불이 없었다. 조의금 몇만 원만을 보낸 것이 다였다. 동진회원들은 이러한 푸대접에 반발했다. 보통 최소한의 인간으로서의 성의를 가지라고 제안했고, 일본 사회당의 무라야마 등 의원들도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일본 NHK에서도 반환 운동에 대해서 보도하기도 했지만 현재까지도 유골은 유족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다.”

2006년 한국 정부는 BC급 조선인 전범이 강제 동원의 피해자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한일 기본 조약 이후에 한국 정부가 전범 문제에 대해 거론하지 않은 점과 이들을 방치해 왔던 것에 대해서 당사자들은 헌법재판소를 상대로 소원 운동을 하고 있다. 현재 이 문제가 진행 중이다. 전범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이학래 씨가 작년에 돌아가셨고, 조선인 전범 유족이 결성한 동진회 2세 모임을 통해 이번 윤석열 신정권에 문제 해결 요청서를 제출해 놓은 상태이다.

전범 당사자들은 1955년부터 일본 정치권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운동을 현재까지 지속해왔다. 내각 총리가 바뀔 때마다 매번 총리에게 사죄와 보상의 편지를 제출했다. 현재 키시다 수상에게도 서안이 제출되었고, 키시다를 포함한 31명의 일본의 역대 총리 모두에게 이러한 요구를 해왔다.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에 의해 일본 정부는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는 입장이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조약을 통해서 해결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이 급변한 것이다. 이걸 계기로 당사자들의 피해 보상에 대한 요구는 모든 것이 기각되었다. 실제 청원운동을 할 때 이들 당사자들의 요구에 일본 외무성은 ”당신들의 문제는 1965년 한일조약에 의해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일관된 입장만을 보였다. 당시만 해도 한일조약의 문서가 공개되지 않았다. 이 문서도 한국 측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문서를 보면 한일조약 속에 전범 문제는 조약의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론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우리가 그 내용을 볼 수 없다고 전제하고 조약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고 우리는 거기에 반론을 해오지 못했던 것이다.

부재자 명부를 한국 정부와 시민사회의 협력으로 보게 되고 한일 문서 공개도 한국 시민사회의 노력에 의해서 일본 시민사회와 공유하게 됨으로써 전후보상문제가 한 발 한 발 전진하고 있다. 결국 이 분야는 한일과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선인 전범 문제를 연구한 이유는.

“나는 1970년대부터 일본 최초의 조선 문제를 연구하는 ‘일본조선연구소’에도 소속되어 있었다. 조선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 공부를 했지만, 전범 문제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조선인 전범 문제를 누구에게 이야기했을 때 조선인이 전쟁 범죄자가 되었다고 하면, 언어의 뉘앙스 때문인지, 사람들은 그들이 나쁜 일을 했고 악질적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인식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조선인이 왜 일본인으로 전쟁 재판을 받아야 하는가? 그중에서는 사형선고를 받아 집행된 사람도 있었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당국은 이들의 유골을 유족들에게 전달해주지도 않았다. 일본 정부는 일본군 또는 일본 군속들의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보상을 해왔지만 조선인들은 일체 배제했다. 동원은 일본인으로 하고 재판도 일본인으로 받고 보상은 조선인이라고 배제하는 이것이야말로 일본 전쟁의 부조리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 분야를 연구했다.

연구를 진행할 당시에는 재판기록이 공개되어 있지 않아 당사자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후에 미국, 영국, 호주, 네덜란드 등의 재판기록을 보기 위해 해당국을 방문했다. 재판기록을 통해 이들이 무엇을 재판받았고, 무엇이 재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는가를 밝혀내고자 했다. 재판기록을 봤을 때 전범이라는 당사자들의 증언과 기록 사이에는 너무나 큰 격차가 있었다. 증언을 들었고 증언과 재판기록과의 격차를 확인했기에 이 간극을 만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일본에는 정치가들 포함 조선인들이 왜 일본인으로서 형을 받았는지, 왜 전범이 되었는지, 왜 사형까지 집행했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1958년에 조선인 전범은 일본에서 가석방 당했고, 일반 사회에 내팽개쳐졌다. ‘누가 이 문제에 책임이 있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1991년부터는 재판을 통해 이들의 부조리한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다. 우리는 최고 재판에서 패배했지만, 최고 재판 판결문을 통해 이 문제는 국회에서 입법 조치가 필요하다는 부언을 쟁취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외면당한 조선인 전범 문제를 연구하면서 느낀 점은.

“조선인 전범 문제를 연구했을 때 왜 그런 문제를 연구하는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무관심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 증언을 연구했고 이 문제의 본질과 특성이 보였을 때 매우 복잡하고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인식했다. 일부지만 정치가들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시민운동도 이전보다는 많이 확대되어 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 문제를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이 문제의 복잡성과 중요성을 이해하게 되면 함께 동참하는 운동도 늘어나는 것 같다. 그래서 신문과 방송에 협조하고 있고 실천운동도 하고 있다. BC급 조선인 문제를 통해서 일본의 식민 지배의 책임 문제가 보인다. 이 문제가 한일 간의 새로운 협력내용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이학래 씨는 사형을 면제받은 전범이었고 관련 글을 한겨례 신문에 투고하기도 했다. 개인의 세밀한 역사를 들여다보는 것은 한국인 스스로도 이를 자신의 문제라고 느끼거나, ‘내가 그 당시에 태어났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하는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도 되는 것 같다.”

앞으로 어떤 주제를 연구하고 싶은지.

“작년에 돌아가신, 마지막으로 생존해 있던 BC급 조선인 전범 피해자 이학래 님은 태국과 미얀마를 연결하는 태면철도라는 곳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많은 조선인 전범 피해자들이 나왔다. 여기서는 포로들의 증언도 다르게 나온다. 객관적인 자료를 포함하여 많은 전범과 피해자들을 낳은 태면 철도 전체상을 그려내는 연구 작업을 하고 싶다. 두 번째는, 조선인 BC급 전범 148명 중 129명이 포로 간수였다. 이들을 숫자로 보지 않기 위해 개개인의 증언집, 그들의 육성을 수기집으로 만들고 싶다.”

우쓰미 아이코 교수가 지난달 11일 우리 대학을 방문했다. 사진은 우쓰미 교수와 우리 대학 5·18연구소의 기념 사진.
우쓰미 아이코 교수가 지난달 11일 우리 대학을 방문했다. 사진은 우쓰미 교수와 우리 대학 5·18연구소의 기념 사진.

자료수집 및 기록작업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데.

“조선인 전범 재판과 관련해서는 미국, 영국, 네덜란드 각 국의 국공립 도서관에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은 인터넷에서도 볼 수 있다. 기록을 보면 조선인과 일본인이 포로 학대에 얼마나 잔인하고 잔혹했는지가 그대로 적혀있다. 하지만 이것을 액면 그대로 보는 게 아니고 누가 이 자료를 만들었고 어떻게 이 자료가 만들어졌는가를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이 자료의 신빙성을 검증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당사자의 증언이 필요했다. 이 재판은 군사재판으로, 일반 민간인 재판과는 달랐기 때문에 군사재판이라는 것이 어떤 특성이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당시 조선인들은 변호사나 통역도 제대로 붙어 있지 않았다. 특히 조선인들은 일본어로 재판을 받았다. 이런 의미에서 당사자의 증언은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당사자의 기록도 모아야 했고, 재판을 담당했던 측의 기록도 모아서 비교해야 했다. 저는 포로들을 연구하는 모임도 함께 해왔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누가 이 재판의 책임이 있는가, 구체적인 조사를 통해서 하나하나 증명해 가는 작업을 지금도 하고 있고 내가 기록을 관리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사편찬위원회와의 작업도 진행 중이라고.

“한국의 국사편찬위원회가 나의 자료를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자료는 개인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고 공유가 최고의 목표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작업을 통해서 한국을 포함에 어디에서나 이 자료를 볼 수 있도록 해나갈 생각이다. 여기에는 일본의 젊은 연구자들도 동참하고 있다. 나는 자료를 모았던 사람이고 연구 분석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자료를 한국에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이영채 교수와 같은 중간 연구자들이 함께할 필요가 있다.”

본인이 생각하는 평화의 의미와 내용은 무엇인가?

“평화라는 게 분쟁이 없는 상태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으로서 존재를 인정하는 것, 상호의 인격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 평화의 한 모습이라고 본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 평화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평화는 차별을 없애는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오늘 인터뷰에 참여하신 분들(4명)이 다 여성분이시기도 한데, 일본에는 많은 여성 차별이 있었다. 거기에 호소도 했고 싸우기도 했다. 일본에서는 재일조선인 차별 문제도 있다. 또한 신분 차별 폐지 운동도 있다. 이러한 차별들을 없애기 위해 다양하게 노력하는 것도 내가 생각하는 평화의 한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문제의식을 가졌을 때 이게 부조리하고 부정의라고 한다면 이를 생각해보고 문제를 직면해 나가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누구든지 문제의식은 가지고 있지만 이것을 직접 해결하기 위해 깊게 파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파고들면 자신과 똑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만나게 된다. 무엇이 옮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감성을 갖게 되는 것은 중요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동지들을 만들고 연대해 가는 것도 중요하다. 새로운 만남을 중요시하고 또한 자신의 동료들을 중요시하는 것이 인생의 새로운 전환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통역 이영채 케이센대학 국제사회학과 교수

우쓰미 아이코(内海愛子)는 ▶1941년 일본 도쿄 출생 ▶1967년 와세다대학 사회학 전공 ▶1974년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1970-1980년 일본조선연구소 연구원 ▶1975-1977년 인도네시아 국립파자자란대학 문학부 강사 ▶1988-2007년 게이센여학원대학 교수 ▶2005년 강제동원 진상규명 네트워크 공동대표, 유골반환 공동대표 ▶2012년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특임교수 ▶2006-2008년 일본평화학회 회장 ▶현 와세다대학 아시아평화학연구소 초대연구원 ▶1991년 다타 요우코 반권력 인권상 수상 ▶지은 책으로 『신세타령-재일 조선 여성의 반평생』(공저, 1972), 『적도하의 조선인 반란』(공저, 1980), 『조선인 B·C급 전범의 기록(1982)』, 『조선인 차별과 말』(공저, 1986), 『타이-미얀마 철도와 일본의 전쟁 책임-포로·노무자·조선인』(공저, 1994), 『자바, 네덜란드인 소년 억류소』(공저, 1997), 『전후 보상으로 생각하는 일본과 아시아』(2002), 『스가모 프리즌-전범들의 평화 운동』(2004), 『일본군의 포로 정책』(2005), 『김은 왜 재판받아을까, 조선인 B·C급 전범의 궤적』(2008) 등이 있다. ▶그의 저서 중 일부는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2007), 『전후보상으로 생각하는 일본과 아시아』(2010), 『적도에 묻히다: 독립영웅 혹은 전범이 된 조선인들 이야기』(2012) 등의 제목으로 한국에 번역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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