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이맘때쯤 ‘바보같은 눈’이라는 수필을 썼다.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때였다. 어린 남자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했었다. 당시에 정신이 없었던 나는 그저 어린 아이의 장난이겠거니 하며 넘어갔다. 그러나 그 아이는 주문했던 빵을 찾으러 온 손님이었다. 후에 함께 일을 하던 언니에게 좀 더 주의깊게 일하라고 꾸중을 들었다. 섣부른 판단과 편협한 생각, 좁은 시야로 생긴 일이었다.

코로나19로 마스크가 일상화되었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외출을 할 때면 늘 마스크를 착용했다. 작년 학교에 입학했을 때에도 처음 만난 사람들과 마스크를 끼고 마주했다. 그 이후로도 꽤 오래 서로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했다. 화상 강의로 소통을 하는 일이 잦았고, 문자와 SNS를 많이 이용했다. 그리고 마스크와 사기꾼을 합친 신조어 ‘마기꾼’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얼굴을 보지 못하고 비대면으로 진행하는 활동이 늘어나며 나도 모르게 한 사람을 빠르게 정의 내리고 있었다. 기회가 없어 알아갈 수 없었고, 알아가고자 하는 노력을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또 섣부른 판단을 하고 있었다.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에서 영지 선생님은 은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말도 안되는 일들이 너무 많지? 그래도 불쌍하다고 생각 하지마. 함부로 동정할 수 없어. 알 수 없잖아.”

영지 선생님은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은희를 그 자체로 바라본다. 단편적인 모습이 아닌 여러 각도에서 말이다. 은희는 그런 영지 선생님을 통해 누군가를 다각도로 다정하게 바라보는 것을 배운다. 김보라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말한다.

“사람은 날마다 또 성장하고 어떤 한 사람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누군가를 단선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리다고 넘겨짚었던 일. 외모로 타인을 섣불리 판단했던 일. 직접 대면하지 않고 말 한마디로 누군가를 규정했던 일. 이러한 것들을 이제는 보내고자 한다. 사람을 만날 기회가 늘어난 만큼 더 세심하게 한 개인을 바라보는 연습, 다각도로 살피는 연습을 하고자 한다. 하나의 파편으로 유리컵의 모양을 가늠할 수 없듯, 하나의 조각으로 개인을 알 수 없다.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 사회에서 지치지 않고 누군가를 가능하다면 온전히 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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