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구상한 유신헌법 개헌안 발표 후 입대, 5·18 주동자로 체포

주모자, 내란죄, 간첩죄바뀌는 죄명 아래 지속된 고초

눈 감으면 그때 기억 떠올라"5·18 생존자 정신적 피해 보상, 국가 존립 이유"

 

“박정희 군부 독재를 지적, 국가 체제를 바로잡기 위한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젊은이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유신헌법 개정안을 만들어 <영대신문>에 기고했다. 영남대학교 강당에서 공청회를 열고 그 내용을 설명했다.”

1980년 4월 30일 <영대신문>에 유신헌법 개헌안을 실었다. 제목은 '학생들이 구상한 개헌안'. 당시 대구의 한 스터디그룹은 1년간 공부해 이 원고를 완성했다. 영남대학교(영남대) 행정학과 77학번, 현재 대구대학교 행정학과 조덕호 교수(64)는 <영대신문>에 유신헌법 개정안 원고를 게재한 이후 군에 입대했지만 5·18민중항쟁(5·18) 주동자로 몰리며 고문을 당했다.

일, 술, 운동에 중독되어 40년을 살아온 그는 번아웃과 공황장애를 겪었다. 이것이 군에서 겪은 고문으로 인한 트라우마라는 것을 깨닫고 조 교수는 올해 광주트라우마센터를 찾았다. 기자는 지난 1일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조 교수를 만나 1980년 당시 일과 이후 삶에 대해 들었다.

Q. 1980년 당시 유신헌법 개정안을 만들게 된 계기는?
“유신헌법 개정안을 만들기 전 행정고시 공부를 했다. 시대를 뒤로 한 채 공부하는 모습이 비겁해 보였다. 그래서 4학년을 등록하지 않고 그 등록금을 가지고 유신헌법 개정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학생 운동보다는 헌법 개정안을 만들고 국가에 대안을 제시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기숙사에서 연구를 시작해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하나, 둘 모았다. 처음에는 함께 모이기도 어려웠다. 시작한 지 6개월 정도 됐을 때 10·26 사태가 발생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연구에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헌법 개정 작업을 서둘렀지만, 다시 전두환으로 인해 연구가 더 어려워졌다.”

Q. 유신헌법 개정안을 <영대신문>에 기고하게 된 배경은?
“유신헌법 개정안을 만들고 <영대신문>에 이를 기고했다. 해당 내용을 일간지에 싣고 싶었지만, 어떤 일간지도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영남대 신문사에 찾아가 편집국장과 이야기했다. 당시 <영대신문> 편집국장이 자신의 자리를 걸고 신문에 싣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인쇄되자마자 계엄군에 걸려 배포가 금지됐다. 편집국장의 묵인하에 신문을 밤에 훔쳐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유신헌법 개정안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됐다.

<영대신문>에 기고한 내용이 유신헌법 개정안의 전문은 아니다. 개정안 전문은 양이 많아 신문에는 일부만 실었다. 세계 50개국 헌법을 연구해서 조문마다 논문을 다 붙였다. 논문 자료를 후배에게 맡기고 군대에 갔는데 이후 후배와 연락이 되지 않아 현재는 자료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영대신문>에 실린 유신헌법 개정안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다.”

Q. <영대신문>에 유신헌법 개정안을 기고했을 때 대학 분위기는?
“<영대신문>에 기고한 뒤 영남대 강당에서 유신헌법 개정안 공청회를 했다. 강당이 수용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대구·경북 지역의 학생들이 공청회를 보기 위해 영남대에 왔다. 궁금증 때문이었을 것이다. 학생이 헌법을 개정해 발표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데모만 한 것이 아니라 대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다. 공청회가 끝난 후 학생들과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며 학교를 돌았다. 이를 계기로 영남대 내 민주화운동에 불이 붙었다.”

Q. <영대신문> 기고 후 입대했는데 군 생활은 어땠는지?
“1980년 5월 23일 입대했다. 훈련소에 들어가기 전 대기하는 수용 연대에서 26일쯤 5·18 주동자로 체포됐다. 유신헌법 개정안을 <영대신문>에 기고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조사를 해도 증거가 안 나오니까 죄명이 5·18 주모자로 바뀌었다. 이후 또 바뀐 죄명은 내란죄였다. 그때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돈을 얼마 받았냐고 집중적으로 추궁당했다. 마지막에는 간첩죄로 몰려서 죽을 뻔했다.

군대에서 잡혀 5·18 주동자, 주모자, 내란죄, 간첩죄로 조사당하며 겪은 고초와 고문들이 트라우마가 됐다. 조사받을 당시 눈을 깜빡일 때마다 맞았다. 눈 깜빡이는 것을 앞에서 세면 눈을 점점 더 깜빡이게 되지만, 눈에 힘을 주고 뜨고 있으면 눈을 덜 깜빡거리게 된다. 맞지 않기 위해서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것이 체화돼 평생 누워서 잔 적이 없다. 지금도 누워서 편하게 잘 수가 없다. 눈을 감으면 그때의 기억이 올라온다. 40년이 넘었지만, 눈을 감으면 두들겨 맞는다는 것이 몸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40년 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아왔다.”

Q. 제대 후 생활은 어땠는지?
“제대하고 4학년을 마친 후 유학을 갔다. 힘든 몸을 끌고 가서 그런지 몸이 더 안 좋아졌다. 4개월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군대에서 겪은 고문으로 간과 폐가 한 번에 고장 났기 때문이다. 간과 폐가 같이 아파 치료를 하지 못했다. 삶의 목표가 없어졌지만, 민간요법으로 몸에 좋다는 것은 다 동원해 다시 유학의 길에 올랐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진 것이었다. 의지와 관계없이 인생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갔다. 트라우마를 잊고 살아가기 위해, 생존 방법으로 3가지에 중독됐다. 일과 술, 운동. 이 세 가지로 받침대를 만들어 단단히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이것들이 순식간에 무너졌고 번아웃과 공황장애로 죽을 뻔했다. 지금도 영화를 못 본다. 영화에서 싸우는 장면이나 총칼 드는 장면이 나오면 그때의 기억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Q. 5·18 당시 계엄군에게 가혹 행위를 당한 생존자들의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생존자들의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한다. 친구에게 돈을 빌리면 갚아야 하는 것처럼 민주화를 이룬 사람들에게 그 빚을 갚아야 한다. 죽은 사람들에게도 최소한의 명예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정신적 피해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육체적인 피해만 보상하고 정신적 피해는 보상하지 않았다. 앞으로는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시간이 너무 오래돼서 어디까지 정신적 피해로 인정할 것인가에 관해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국가의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한 사람에게 국가가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이는 국가 존립의 이유이다.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 스스로가 존립을 부정하는 것이다.”

Q. 5·18을 바라보는 세대 간 인식 차이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세대 간 인식 차이는 일어날 수밖에 없다. 세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세대 간 차이를 교육을 통해서 극복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지금 세대를 역사로 끌어넣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들에게 5·18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나와 미래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교육의 방점을 미래에 두어야 한다.

Q. 대구에서 광주트라우마센터까지의 물리적 거리가 부담일 것 같은데 이를 포함하여 국가폭력 생존자의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서 어떤 부분이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하나?
“번아웃과 공황장애가 트라우마로 인한 것임을 깨닫고 광주트라우마센터를 찾았다. 이런 센터가 광주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일상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본다. 몸을 치료하는 병원은 많다. 그렇지만 정신을 치료하는 병원은 거의 없다. 지금까지 몸만 치료했지 마음 치료는 하지 않은 것이다. 교수가 정신병원에 다닌다고 하면 이상하게 본다. 그래서 치료하지 못한 채 40년 넘게 살아왔다. 국가 폭력으로 일어난 트라우마뿐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인한 트라우마도 마음 놓고 편하게 치료받을 수 있는 기관들이 늘어야 한다.”

Q. 광주 시민이나 전남대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광주 시민을 포함한 1980년 당시 세대들이 반드시 존중받아야 한다. 민주주의의 역동성을 보여주는 게 5·18이다. 5·18은 전국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광주에 유독 집중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5·18을 광주로 국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5·18 정신의 대표적인 상징이 광주인 것은 맞다. 이에 광주 시민들은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

지금까지 경쟁만 하며 산 학생들에게 이제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행복한 삶을 살려면 일만 해서는 안 된다. 노래하고 춤추는 것과 같이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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