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악한 기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공중을 갖고 있었다.

- 가브리엘 타르드, 『여론과 군중』 -

타르드(1843~1904)는 신문이 발명되기 전과 후의 사회집단을 군중과 공중으로 구분하고 있다. 군중은 물리적 공간에서 여러 사람들이 단지 모여 있는 것이라면 공중은 서로 마주치지도 않으며 앞으로 만날 가능성도 없는 사람들이 같은 신문을 읽고 수많은 사람들과 똑같은 믿음이나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고 의식하는 사람들로 개념화했다.

그는 공중을 15세기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성경의 보급에서 기원을 찾으며 프랑스대혁명기를 거쳐 폭발적으로 형성되었고 드레퓌스 사건을 통해 저널리스트와 공중의 위험한 밀착도를 감지해냈다. 불과 십여 년 만에 팬덤정치, 진영정치, 혐오정치의 갈라치기와 엎치락뒤치락하며 세대간, 성별간, 지역간 극단의 대결구도로 가고 있는 한국의 살풍경은 타르드가 포착한 저널리즘과 공중의 관계를 돌아보게 만든다.

마침 전남대 개교 70주년을 기념하며 전남대 신문방송사의 《말하라, 시대의 목소리로》 아카이브 전시가 지난 5월 주간에 열렸다. 1954년 6월 1일 창간해 현재에 이르는 ‘전대신문’과 1980년 5월 15일과 16일 민족민주화 성회대회, 1991년 4월 30일 박승희 열사의 분신을 보도하는 ‘CUB전대방송’의 긴박했던 스크립터 등이 처음 공개되었다.

무엇보다 1980년 5월 15일자로 발행한 <전대신문> 713호를 재배포한 것이 압권이었다. ‘광장에 메아리친 민주 함성’이 헤드라인으로, 조속한 민주화 이행조치를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학생·시민들에게 배포되었다는 <전대신문> 713호는 이후 계엄군에게 중요 취재자료와 신문 원본 등이 압수당해 5·18관련 연구에서조차 사라진 신문이었다. 그렇게 중요한 신문을 발굴해 특별판으로 재배포하며 전시장에 당시의 방식으로 전지에 매직으로 자보를 써 붙였다.

자보는 713호를 끝으로 118일 동안 폐간되어야 했던 전대신문의 수난을 기록하고 5월항쟁에서 “죽어간 시민들의 이름을 외치지 못하고 ‘광주폭동’이라는 이름에 갇혀 본질을 훼손당한 비애”의 응어리를 풀기 위해 “그들이 체납한 부정의 대가를 추징해야”하며, 그것이 지금의 책무임을 “기억하기 위한 기억”이라고 썼다. 그리고 신문의 역할을 “피 흘려 움직인 민주주의의 초침을 계속해서 움직이도록 하는데 있"음을 강변하며 끝냈다.

타르드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자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며 저널리즘과 공중의 혁명적 가능성을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헌신적이거나 매수된 저널리스트 20명만 있으면 그 대의명분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승리할 수 있다’며 저널리즘이 만들어낸 공중의 부정적 영향을 경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1980년 5월항쟁 기간 한국의 저널리즘은 침묵했다. 그 침묵은 신군부의 검열과 강압이라는 핑계로 변명이라도 댈 수 있었다. 그러나 형식적 민주주의가 30여년이나 지난 한국 저널리즘의 형국은 어떠한가. 종이신문만이 아니라 SNS와 유튜브의 탐사뉴스를 자처한다는 수많은 채널들의 운영자와 팔로우는 어떤 관계로 움직이고 있는가.

맹목에 가까울 정도로 ‘헌신적이고’ 슈퍼챗에 ‘매수된’ 사이비 저널리스트들이 일방향의 수직적 위계 구조였던 신문방송시대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여겨졌던 쌍방향 소통으로 무장하고 1인 미디어의 시대를 주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기레기’라 비아냥 거려지는 기존 저널리스트들의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공교롭게 타르드가 공중의 출현을 성경의 확산에서 찾았듯이 이는 쌍방향 소통이라기보다 사이비 종교의 교시와 복종으로 이뤄진 교주와 광신도의 관계로 보인다.

대학신문으로 ‘전대신문’의 영향력은 미비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 구성원들에게 전대신문은 유일한 신문이며 이곳의 기자들이 과연 얼마나 ‘시대를 바로 보는 청년의 눈빛’을 갖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민주주의의 초침’을 계속 움직일 수 있느냐 마냐가 갈릴 것이다.

한재섭(씬1980 편집장)
한재섭(씬1980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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