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는 모든 논쟁을 잠재우는 주문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자유로운 표현은 민주사회가 지켜야 할 소중한 권리지만, 동시에 타인의 자유를 파괴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매체 환경의 변화는 사적 대화를 공론장으로 끌어냈고, 인터넷 공간 속 주목 경쟁은 더 자극적인 소재 찾기로 이어진다. 원치 않더라도 누구나 여과되지 않은 말과 왜곡된 인식에 노출되는 상황이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혐오(증오)범죄’라는 개념이 주목받으면서 그 기저에 깔린 혐오인식이 조명 받게 되었다. 혐오범죄는 혐오인식이 드러난 극단적 형태이기 때문에 혐오를 막지 못한다면 유사한 범죄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는 것이 당시의 문제의식이었다. 불과 일주일 전(5월 6일) 커밍아웃을 한 가수 홀랜드가 게이라는 이유로 폭행당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황은 6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혐오범죄의 심각성을 인정한다면 범죄의 저변에 깔린 혐오와 혐오를 자극하는 혐오표현의 심각성에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혐오(hate)’라는 단어에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연구자들은 혐오를 미움이나 증오, 역겨움의 감정을 넘어 차별을 동반한 복합적인 감정으로 이해한다. 이 맥락에서 ‘혐오표현(hate speech)’은 ‘인종, 민족, 종교, 성별, 성적지향 등을 근거로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 모욕, 위협, 폭력을 조장하는 표현’으로 정의될 수 있다.

혐오는 감정을 넘어 현실에 차별을 만들고 정당화한다. 『정글북』을 쓴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이 1899년 발표한 시 「백인의 짐」(The White Man’s Burden)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는 미국의 필리핀 침략을 문명세계의 백인이 “반은 악마, 반인 아이인” 아시아인데 대해 져야 할 소명으로 둔갑시킨다. 문명과 비문명의 대비는 서구의 식민지 건설을 정당화시킨 이분법이었고,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 신념이었다. 그 이분법은 한 세기도 훨씬 지난 현재, 공당 대표의 입을 통해 다른 모습의 차별에 적용되고 있다.

20세기 중반 일상언어학파 철학자들은 언어의 수행적(performative) 기능을 연구했다. ‘언어가 곧 행위’라는 오스틴(John Austin)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야구의 풀카운트 상황에서 “스트라이크”라는 심판의 말은 단순히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지났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것을 넘어 아웃카운트를 결정하는 힘을 갖는다. 특정 상황에서 말에는 현실을 바꾸는 힘이 있다. 왜 전장연의 시위를 비판하는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주요 정당의 대표가 특정 집단을 ‘비문명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 표현에는 상대가 나와 동등한 시민이 아니라는 인식이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백인의 짐」에서 볼 수 있듯 역사적으로 ‘문명’은 ‘야만’의 반대어로 사용됐다. 공당 대표의 말에는 그렇지 않아도 두터운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고착화시킬 힘이 있다. 언어의 파괴력은 이론뿐 아니라 경험적으로도 입증되는데, 인간의 뇌는 모욕과 차별의 경험을 물리적 통증의 경험과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

혐오표현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혐오표현의 규제는 쉬운 일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 때문이다. 철학자 밀(John Stuart Mill)은 『자유론』에서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사회의 이익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억누르려는 의견이 옳은 것일 수 있다는 것, 대립되는 주장 모두가 어느 정도씩 진리인 경우가 많다는 것, 시험받지 않는 의견은 생명력을 잃는다는 것 등의 이유로 표현의 자유가 필요한 것이다. 밀 이후 표현의 자유는 제한할 수 없는 기본권으로 인식되었기에 표현을 규제하는 데 반발이 크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가 마법의 주문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만큼이나 혐오 당하지 않을 자유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 존엄성과 표현의 자유가 충돌하는 경우, 표현의 자유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근대국가에서 표현의 자유가 중요해진 이유는 시민의 정치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표현의 자유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써 중요하다.

‘자유’라는 추상적인 가치에 대해 말할 때 보통은 단일하고 보편적인 자유를 상정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파편화되고 개별적인 ‘자유들’만 있을 뿐이다. 그 자유들이 충돌할 때 우리는 어떤 자유가 더 중요한지 가치 판단을 해야 한다. 혐오할 자유가 혐오를 당하지 않을 자유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최근 논란이 되는 ‘차별금지법’과 연결해서도 생각해볼 점이 많은 주제다.

▲ (조선대 정치외교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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