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는 주변의 어느 것도 허투루 보이지가 않는다. 내 몸과 마음의 감각이 온통 이 세계를 향해 충만하게 열리는 것이다. 오늘은 산책을 하는데 ‘비행준비’를 완료한 채 옹기종기 손을 잡고 모여 있는 민들레 씨앗이 눈에 들어왔다. 이 민들레 씨앗은 과연 이 세계의 어디로 날아가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유구한 생명을 이어가려나.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 마주친 민들레 씨앗은 글이 세상에 나올 즈음엔 이미 꽃으로 피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5·18을 연구하시는 어느 선생님께서 쓰신 논문 한 편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대학신문에 나타난 ‘5·18’의 보도 형태 연구>라는 제목을 단 논문 안에는 1981년 5월 7일 전남대학교 신문에 대한 대목이 있었다. 옛 전남도청 분수대 사진 옆에는 5월의 주요 일정을 알리는 ‘5월의 메모’가 있는데 그걸 발견하고 거기에 방점을 찍을 수 있었던 연구자 선생님의 눈썰미에 탄복했다. 그리고 논문에 등장하는 문장을 인용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5월 5일 어린이날, 5월 6일 성년의 날, 5월 11일 석가탄신일 그리고 그다음 일정 한 줄이 빈칸으로 남겨 있다는 것이다. (중략) 이 덧붙이는 글은 “우리는 이제 향불을 피우리라, 뜨겁게 뜨겁게 기원하리라... 다시 떠오를 태양을 맞기 위해, 지칠 줄 모르는 젊음으로 엄숙했던 그만큼 활력을 갖으리라”라고 끝맺음을 맺고 있어 그날의 항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다시 언제든 힘을 찾을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박진우, 2022)

기성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막힌 진실의 언로를 뚫기 위해 애썼던 사람들. 엄혹한 정치현실과 입이 있어도 차마 말을 할 수 없는 살아남은 자의 참담함으로 남겨진 빈 칸. 그 빈 칸을 우리는 어떤 상상력과 어떤 실천으로 메워갈 수 있을까? 새로운 오월을 맞이하며 수십 년 전 그들이 침묵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빈 공간을 나는 이어받아 쓴다.

오늘 오후 산책길 민들레 씨앗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새로운 세계를 도래하게 하는 것은 언젠가는 땅에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 위해서, 그 가능성에 의지해 그것을 믿고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스스로를 하늘로 쏘아 올리며 소용돌이 비행을 감행하는 작은 존재들의 힘, 그 ‘모험의 축적’이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새로운 싸움을 결의하는 애도의 장소는 권력이 눈엣가시로 여기는 곳일 수밖에 없다. 이 새로운 싸움을 결의하는 애도의 장소를 민들레 씨앗처럼 우리는 끊임없이 확장해가고 새 운동의 진지가 될 수 있도록 세계의 곳곳에 계속해서 지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광주에서 대학생활을 했던 이들은 한국사회의 다른 사람들과는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의미로 각자의 삶 속에서 매년 다가오는 오월을 맞이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존재들을 통해서 5·18이 향후 어떤 새로운 의제를 스스로의 과제로 삼으며 뻗어나갈지가 기대된다. 침묵과 여백으로 도착한 1981년의 편지를, 그리고 거기에 덧붙인 편지처럼 나에게 온 논문 한 편, 또 그것을 이어받아 쓰는 나의 편지가, 여러분 각자의 오월 편지와 함께 민들레처럼 이 세계에서 생명을 이어가며 꽃을 피워가기를 염원하면서 민들레씨앗처럼 이 연서를 쏘아 올린다.

애니메이션 <마루 밑 아리에티>에서 “너희는 멸망해가는 종족이야”라고 말하는 쇼에게 소인족 아리에티는 “우린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아”라고 울며 항변한다. “우린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아”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세계에서 오월 광주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확장되는 현장에 서 계신 동지들을 앞으로 더 많이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한다.  

이다솜(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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