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군사 쿠데타로 민주화 또 한 번 위협
5·18 당시 군인들, 취재 자료 가져가

 

5·18민주화운동(5·18)이 일어나고 42년이 흘렀다. 68년의 역사를 가진 <전대신문>도 그 풍파를 피해갈 수 없었다. 5·18 당시 <전대신문> 취재부장이었던 조경완 씨(사학·79)는 “당시 전남대생의 마음속엔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참함과 부끄러움이 부채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조 씨가 <전대신문> 입사 후 취재부장이 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후였다. 유신정권의 붕괴로 민주화를 꿈꾸던 광주 시민들이었지만, 그때는 이미 전두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조 씨는 “삼복서점에서 팔던 뉴스위크지의 커버스토리가 ‘Power Play in Korea’였다”며 “기사는 검정 마카로 전부 칠해져 있었지만, 조명에 비추어보며 전두환이 정권을 탈취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바뀐 것은 학내 민주화 열기였다.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퇴학, 수감되었던 학생들이 복학하면서 학원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심화한 것이다. 당시 신문사로 찾아온 복학생들을 맞이했던 조 씨는 “퀭한 표정에 튀어나온 광대뼈, 눈빛만 시퍼렇게 살아있던 사람들을 잊을 수가 없다”고 언급했다.

새 학기를 맞이한 <전대신문>은 다양한 이슈를 전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어용 교수 퇴진 사건부터 민족 민주화 대성회에 이르기까지 <전대신문>은 그 시기에 일어난 일들을 보도하며 대학언론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다. 특히 5월 15일 자로 발행된 713호 신문은 학내에서 “역사적인 신문”이라는 말이 돌만큼 잘 만든 신문이었다. 조 씨는 713호 신문에 대해 “5·18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당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담아낸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신문”이라고 답했다. 5·18이 일어난 것은 713호 신문을 발행하고 3일이 지난 후였다.

5월 17일 비상계엄이 확대되며 학내 주요 인사들이 연행되거나 도주했다. <전대신문> 기자들은 공터(현재 컨벤션홀)에 계엄군이 텐트 치는 것을 보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조 씨는 “계엄 확대 후 계엄군이 신문사로 찾아왔다”며 “정강이를 발로 차는 등 강압적인 모습을 보이던 그들은 10박스 정도 되는 분량의 취재 자료를 수거해갔다”고 밝혔다. 당시 기자들은 중요한 자료들을 미리 모아 숨겨놓으며 일부라도 지키고자 했지만, 개학 후 찾아보니 자료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학교는 9월 개강과 동시에 당시 <전대신문>에 소속되어 있던 모든 기자를 해고하려 했다. 조 씨와 조사부장이었던 방윤식 씨는 “학보사의 명맥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수습기자들의 해고를 막았다. 이후 <전대신문> 기자들은 입대하는 등 뿔뿔이 흩어졌다.

1년 반의 학생 기자 시절을 돌아본 조 씨는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즐거웠던 시기”라고 답했다. 학생 기자의 본분은 높은 지적 수준을 갖추는 것이라 말하며 마지막으로 “<전대신문>이 중립을 지키는 언론이 되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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