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위해 희생한 이들 위한 책으로 기억되길”

5·18 당시 평화봉사단원으로 활동한 데이비드 돌린저 씨(David Lee Dolinger). 그는 5월 12일 국·영문 동시 출간되는 자신의 회고록과 함께 3년 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코로나로 한동안 왕래하지 못했지만, 그전까지는 매년 한국을 방문했다. 돌린저 씨에게 광주와 영암이란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또 하나의 고향”이다.

나에 관한 책이 아닌, 그들을 위한 책이길
돌린저 씨는 처음 책을 쓰던 날을 회고하며 “솔직히 확신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자신이 경험한 것들이 책으로 쓰기에는 부족하다고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이 책을 쓰고 출판하는 일로 5·18과 광주의 기억을 이어갈 수 있다고 설득하자 그는 오랜 고민 끝에 펜을 들었다. 그때 든 생각은 하나였다고 말한다.

“나에 관한 책이 아닌,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위한 책이다.”

책의 번역한 최용주 씨는 “회고록 제작에 참여하게 되어 개인적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한다”며 “5·18을 기억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록을 발굴해낸 것 같아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다.

회고록을 작성하며 가장 힘들었던 점으로 돌린저 씨는 “기억을 따라오던 고통”을 꼽았다. 당시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생사조차 모른다는 사실이 그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돌린저 씨는 “내가 거기서 행하고, 본 일들이 옳음을 향한 걸음이라고 믿었기에 집필을 끝마칠 수 있었다”며 “책을 통해 시민들의 희생이 인정받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매일 밤을 기록한 평화봉사단원들

▲ 데이비드 돌린저(사진 맨 우측) 씨가 5·18 당시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와 전남대병원 옥상에서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다. 사진제공=호하스

돌린저 씨는 5·18 전까지 전남 영암의 보건소에서 결핵 환자를 돌봤다. 5·18 당시 광주에 있던 것도 동료의 결혼식을 다녀오던 길에 우연히 머무른 것이었다. 그는 이후 운영이 재개된 버스를 타고 영암으로 돌아오지만, 친구와 동료들이 걱정되어 다시 광주로 향했다.

당시 광주에 함께 있었던 평화봉사단원들은 매일 저녁에 모여 각자 겪었던 일들을 공유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밤마다 기록해 미 대사관에 제공했다. 그들이 기록을 이어간 이유는 평화봉사단 본부에서 광주의 상황을 알고자 했고, 미 대사관을 비롯한 미 정부도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돌린저 씨가 미 대사관에 자료 제공을 요청했을 땐, 그러한 자료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돌린저 씨는 “그때 미 정부가 광주의 진실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며 미 정부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어 그는 “진실이야말로 역사를 추진하는 힘”이라며 “기록은 당대의 진실을 가장 잘 보존할 수 있는 방식이고, 그렇게 이어진 기록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한다”고 말했다. 최 번역가도 돌린저 씨의 말에 동감하며 “외국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5월 광주의 객관적인 기록은 무엇보다 귀중한 자료”라고 덧붙였다.

전남도청에 묵었던 유일한 외국인
“토요일 큰 집회가 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돌아다니는 기자들이 진짜 기자인지 분별하는 일을 했다. 그때 ‘장’이라는 인물이 도청으로 들어와 도와주지 않겠냐고 물었다.”

도청 밖에서 시민들을 돕던 돌린저 씨는 도청으로 들어가 군 라디오 방송을 듣는 일을 했다. 계엄군은 시민들이 도청해도 알아들을 수 없게끔 영어로 방송을 하고 있었기에 영어를 사용하는 돌린저 씨는 시민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그를 도청으로 불러들인 장 씨는 이후 등에 연필이 꽂힌 채로 발견되었다. 돌린저 씨는 “연필이 칼처럼 등에 꽂혀있었다”며 “그 장면이 5·18이라는 강렬한 기억을 대표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항쟁이 끝나고 돌린저 씨는 파견국의 정치적 상황에 중립을 지킨다는 평화봉사단의 규율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해임된 단원은 그가 유일했다. 그는 당시 도청에 들어간 것을 두고 “증인이 되기 위함이었다”고 말한다. 역사적 순간을 지켜보는 증인으로서 그는 도청으로 들어가 생생한 5월의 광주를 기억 속에 간직했다.

“우리에겐 모두 각자의 역할이 있다”
돌린저 씨는 당시의 대학생들을 “시대의 양심”이라고 표현한다. 부조리한 현실에 대항해 학생들이 열심히 움직여 주었기에 시민들도 그 열정에 응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5·18을 경험한 학생들을 향해 “학생들은 불만 지펴놓고 떠났다”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우리에겐 모두 각자의 역할이 있다”고 설명했다.

5·18 당시 돌린저 씨의 역할은 현장을 목격하는 것이었다. 광주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만큼 열성적으로 시위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당시의 상황을 기록하고 간직했다. 간직한 기억은 회고록이 되어 다시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왔다. 돌린저 씨는 “이제 우리는 변화가 지속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살아남은 이들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이 5·18에 대한 자부심을 품었으면 좋겠다”는 돌린저 씨.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인 순간이자, 학생들이 시민들과 연대해 독재의 탄압과 야만에 맞섰던 순간이었다. 최 번역가는 “회고록 안에는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시민들이 얼마나 투쟁하고 희생하였는가가 드러나 있다”며 “귀중한 역사의 장면을 후배들도 기억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마지막으로 돌린저 씨는 “5·18을 통해 새로운 세대가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며 “사회의 지성으로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전남대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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