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자신의 믿음을 바탕으로 말하고 행동한다. 갓 태어난 아이는 엄마 품이 안전하다는 것을 믿고 그 품에 안겨 엄마 젖을 먹는다.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할 때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걷고, 혹여 넘어지더라도 괜찮다는 믿음이 있기에 걸음을 걷는다.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약속을 하는 것도 상대방이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와의 약속을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믿음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무엇도 말할 수 없고 행동할 수 없다. 믿음을 의미하는 신(信)이라는 한자어는 ‘사람(人)+말씀(言)’으로 만들어져 있다. 그만큼 우리의 언행에 따라 자신 혹은 상대에 대한 신뢰도는 달라진다. 입에서 나오는 말에 진정성이 없다면 모든 관계는 결국 무너지게 된다.

음양오행설 가운데 흙(土)은 믿음(信)을 그 속성으로 한다. 흙은 만물을 길러내고 거두며 포용하는 속성이 있다. 땅이 움직이면 지진(地震)이 나고, 지진이 나면 땅에 뿌리 내린 만물은 똑바로 서 있을 수 없고, 결국 무너져 내리고 만다. 흙이 믿음을 가지고 만물을 포용하기 때문에, 이 모든 만물이 태어나고 자라며 거둬져 저장될 수 있는 것이다. 흙의 고요함이 만물을 살아 움직이게 하고 변화시킨다는 점에서 정중동(靜中動)의 원리를 본다. 또한 믿음은 인체의 소화계통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믿음이 두터우면 심신(心身)의 안정이 찾아오고 소화도 잘 되지만, 믿음이 없으면 근심·걱정이 생기고 몸의 균형이 깨진다. 무속인들이 접신(接神) 혹은 빙의(憑依)를 하여 ‘사자(死者)의 영혼’이나 귀신을 불러들일 때에도 그를 받아들이기가 힘겨우면 몸살이 나고 토악질을 한다. 무언가를 받아들이지 못하니 몸에서 밀어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 즉 한 편이 된다는 것, 소통한다는 것, 함께 간다는 것 등의 의미를 동반한다.

믿음이 사라진 사회는 인간관계를 소원하게 만들고,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 불신(不信) 사회가 얼마나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무기력하게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나라를 망치는 죄악이 될 수 있는지 우리는 역사적으로 수없이 경험했다. 과거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이 서울로 남하할 때 이미 대전으로 피신한 후, 서울시민들에게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등 거짓선동을 하여 많은 국민들의 희생을 야기했다. 특히 나라의 통수권자는 국민들로부터 믿음을 받을 수 있는 언행을 보여주어야 한다. 국민들에게 믿음을 받지 못한 지도자는 말로가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진정성과 책임감을 보여주지 않으면 결과적으로는 권좌에서 물러나, 추방당할 수밖에 없다. 취임도 하기 전에 대통령 집무실 이전, 선제타격, 공약파기, 정치보복 등과 같은 일로 국민의 신뢰를 저버리는 언행 등은 오히려 불신을 키울 우려가 크다.

그릇된 믿음의 강요로 많은 희생자를 낳은 2014년 세월호 침몰 역시 불신을 낳았다.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을 들은 아이들은 그 말만 믿고 세월호 선체 안에 머물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는가. 매번 선거 때면 대선 후보들이 남발하는 지키지 못할 공약들은 어떤가. 공공의 약속인 공약(公約)이 지키지 못할 허망한 약속으로서의 공약(空約)이 되어 버린 경우를 또 보고 있다. 이런 언행들이 반복되면 불신 사회가 되고 국가는 야만적인 과거로 퇴보하게 될 것이며, 인간관계 역시 소원해져서 반목만 깊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믿음은 자신의 삶을 바꾸는 태도를 의미한다.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감을 가짐으로써 신뢰를 회복하면 사회는 보다 윤택하고 풍요로워질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현실을 창조한다. 혼자만의 믿음은 감당하기 어려운 꿈일 수 있지만 함께 꿈꾸는 믿음은 우리가 사는 현실을 만든다.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우리가 상상하고 믿는 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속여가면서 진정한 행복을 느끼거나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겠는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자는 타인도 믿지 못한다.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면 된다. 상대방에게 신뢰를 받으려면 내가 먼저 상대방을 믿고 자신의 언행에 책임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곧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 이송희(시인,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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