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을 위한 행진곡>이 사십 주년이다. 1982년 황석영이 기획하고 김종률 작곡, 백기완의 시를 가사로 만들어 ‘일군의 젊은이들’이 하룻밤 만에 녹음을 해 전국에 비밀리에 유포시킨 불법 테이프가 <님을 위한 행진곡>의 탄생이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광주시민들의 억울함과 혼을 달래기 위해 김민기의 노래극 《공장의 불빛》(1978)에 착안해 만든 노래굿으로 앨범 전체의 이름은 《넋풀이》다. 총 7곡의 노래와 무당의 사설, 문병란 시 낭독까지 아홉 개의 트랙이 있는 《넋풀이》의 마지막 곡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억압받고 소외된, 이름도 제 목소리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애국가로 또, 전 세계 민주주의 현장에서 불러지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지만 우리는 이 노래를 잘 알지 못한다. 기념비와 같은 노래라고 입이 마르도록 상찬하지만 도대체 몇 월 며칠 녹음되었는지도 밝혀져 있지 않다. 연구자의 미욱함을 반성하고 한편으로 촉구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한두 사람의 독점적 소유물로 전락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첫 문장의 유명한 씨들과 ‘일군의 젊은이들’의 대비가 그것이고 젊은이들 중에서도 여자들의 목소리는 더욱 들리지 않는다. 녹음에 참여한 ‘일군의 젊은이들’은 홍희윤, 임영희, 임희숙, 김영희, 김은경, 김옥기, 윤만식, 오정묵, 전용호, 김선출, 故이훈우였다. 모두들 대학 2학년생부터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서른이 채 되지 않은 사회초년생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선배들이 5월 17일 자정의 계엄령으로 체포 도피한 상황에서 YWCA와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5월 항쟁의 방향과 성격을 이끈 젊은이들이었다. 그리고 항쟁에서 살아남은 자로써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문화운동을 선택한다. 노래를 빼앗기면 모든 것을 빼앗긴다는 사실을 항쟁을 겪은 몸뚱아리에 너무 똑똑히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려진 대로 노래를 녹음한 곳은 황석영의 운암동 154-5번지(현 광주문예회관 국악당 앞) 2층 주택이다. 그러나 그 집은 황석영의 집만이 아닌 홍희윤의 집이기도 하다. 홍희윤은 당시 여성민주운동단체 송백회 회장이자 YWCA 이사였고 녹음하러 온 젊은이들을 돌보았다. 후에 홍희윤은 홍희담이란 필명으로 5월항쟁을 최초로 전면으로 다룬 소설 「깃발」을 1988년 발표한다. 임영희는 송백회 창립멤버였고 YWCA 농촌부 위원이자 문화패 광대와 갈릴리의 단원으로 항쟁 마지막 날 서울로 피신해 자신이 참여하고 겪은 5월 항쟁의 진실을 테이프에 녹음해 배포하였다.

녹음에 참여한 젊은이들 중 막내로 전남대 음악학과 2학년이었던 김옥기는 중앙여고 시절 겪은 항쟁에 대한 마음의 빚이 있었고 엄혹한 시절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데 광주 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당연한 일을 했다는 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전한다. 어떤 5월 기관도 연구자도 40년 동안 찾아주지 않은 서운함도 그 때의 시대정신을 생각하면 대수롭지 않다고 한다.

사십년 전의 ‘일군의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정치권에서 서로 잡으려고 난리 난 ‘2030’이니 ‘이대남’이니 하는 말들이 떠오른다. 이미 스무 살이 넘은 성인들을 굳이 ‘청년’이라고 부르며 자꾸 사회적 미숙아로 응석받이와 지원의 대상으로만 전락시키는 요 몇 년간의 흐름도 거북스럽다. 청년이란 주체는 사라지고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청년’을 이용해 그럴싸한 이미지 메이킹만 하는 정치인들의 얼굴만 보인다. <님을 위한 행진곡>에 함께 참여했지만 유명한 씨들 말고 사라진 ‘여자’들처럼 말이다. 2027년에는 제발 우리도 칠레처럼 내각의 60%을 여성으로 채운 30대 젊은 대통령이 나오길 간절히 바라는 이유이다.

*이 글은, 특히 김옥기 선생님 부분은 2월 18일 임영희 선생님과 대화에 기초해 썼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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