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찾아오는 전환점으로부터 길 찾을 수 있어
소수의 편에서 법조인 역할 다할 것

“사회는 항상 변화합니다. 고정된 것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은 항상 세계관이나 가치관에 있어 유연성이 필요합니다.”
익숙한 것은 편하고, 새로운 것은 낯설다. 새로움에 직면할 때, 낯선 것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광주고등검찰청의 박억수 검사(차장검사 직무대리 및 인권보호관)는 세상에 두려움을 느끼는 청년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 마음이 움찔했던 순간
사람은 항상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고민을 가지고 살아간다. 취업에 성공할 수 있을까, 준비하는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이성과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을까.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누구에게나 있다.
박 검사에게도 모든 미래가 불안하게 느껴졌던 시절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을 때, 그도 잠시나마 포기를 떠올렸다. 마치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동굴을 걷는 것만 같았다. 자꾸만 풀리지 않는 다음 문장에 꿈이 아득해졌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군대에 가기 전, 교습학원 강사 일을 시작했다. 학원 선배와 소주 한잔을 기울이던 어느 날, 너는 합격할 가능성이 보이니 다시 도전해보라고 용기를 북돋아 준 그 한마디가 문득 가슴에 박혔다.
살다 보면 순간마다 전환점이 찾아온다. 그 순간은 그에게 용기를 주었고, 박 검사는 다시 일어나 도전을 시작했다. 결국 그는, 이뤄냈다.

삶의 방향 고민하던 청년, 성장통 딛다
언제부터 법조인의 꿈을 꾸게 된 것인지 명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고등학생 때 가끔 적곤 했던 일기장을 읽어보면, 그 시절 즈음 법대 진학을 꿈꿨던 흔적이 보인다.
처음엔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1987년, 박 검사가 고등학생일 적은 민주화를 향한 역동적인 사회운동의 필요성이 남아있던 시기였다. 자연스레 그는 사회문제, 교육 문제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변호사를 꿈꾸게 됐다.
꿈을 향해 한발 한발 나아가던 그는 고려대학교에 입학했다. 사회변혁에 제 몫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감돌았던 당시, 시대적 요구에 맞춰 어떤 대학 생활을 할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때로는 종로 대로에 나가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방황도 했다. 어느 날엔가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선배 동기들과 모여 시간을 보냈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런 날이면 학교 강의실에서 잠을 자다 아침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들을 보고 황급히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가던 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고, 스스로에게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나를 마주했을 때 비로소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원 생활을 하며 적성에 더 맞을 것 같은 검사를 택했다. 처음 검사가 되었을 땐 막연했다. 사건 처리에 대한 책임감이 중압감으로 다가왔고, 실무에 익숙하지 않아 실수도 했다. 그렇게 상사로부터 지적을 받은 날엔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있는 것은 있는 대로 없는 것은 없는 대로 임하자’는 마음을 지니고 견뎌냈다. 성장통이었다.
“맷집으로 버텨낸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들은 저를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죠. 돌아보면, 그 과정은 성장의 시간이었어요.”

‘뚜벅뚜벅’ 기억을 걷는 시간
어느덧 검사 생활을 시작한 지 햇수로 19년째. 박 검사에게 검사라는 직업은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됐다. 박 검사에게 “그간의 삶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이라고 물었다. 그는 아직 살아야 할 날이 많이 있다고 웃어 보였다.
“그간의 삶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표현한다면 ‘뚜벅뚜벅’이 아닌가 싶어요.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삶의 순간마다 희망을 품고 뚜벅뚜벅 걸어온 것.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것으로 표현하고 싶네요.”

법조인을 꿈꾸는 청년들에게
“거창하지만, ‘정의’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 가장 쉽게 다가온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상황에 따라 정의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법조인의 관점으로 보아, 개별 사건에서 법과 원칙에 따른 합리적 결론이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박 검사는 지난 2019년, 헤이그 국제형사재판소 당사자국 회의에 외교부와 함께 한국 대표단으로 다녀왔다. 박 검사는 그곳에서 법을 통해 국제 평화를 이루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을 마주했다.
박 검사는 검사 생활을 하며 ‘사회와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 것이 가장 큰 보람이었다고 말한다. 사회가 일정 수준의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법조인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소수의 편에서 그들의 힘이 되고자 했다. 살인사건이나 장애인, 노약자 등에 대한 폭력·사기 범죄 증거를 잘 수집하고, 법정에서 진상을 낱낱이 밝힌다. 이렇게 피해자와 유족이 느낀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풀어주었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
법조인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박 검사는 전한다.
“법조인은 다른 사람의 인생에 유독 많이 관여하는 직업입니다. 보람 있으나 고충도 따르죠. 타인의 인생 이면을 보게 되고, 사회로부터 상처받은 사람을 치유해줄 수도 있습니다.”
그는 청년들이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법조인으로서 자격을 갖춰 나가기를 응원한다. “저도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아직 성장 중입니다. 검사 생활에서 또, 여러 사회적 관계 속에서 계속 성장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꽃의 아름다움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자신이 활짝 피어난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름답게 피어나는 청년들은 삶에 치여 아직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뿐이다.
“요즘 청년들이 많이 힘들다고 합니다. 취업, 결혼, 출산 등에서 그전 세대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죠. 그래도 여러분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청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상처를 입더라도 청춘의 힘으로 원하는 곳에 용기 있게 도전한다면 결국 이룰 것입니다.”

포기하고 도망가고 싶은 청년들에게, 박 검사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전했다.
“나는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살 것이다.”
- 故 장영희 교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

저작권자 © 전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