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신문은 대학 구성원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발로 뛰었고 전남대의 역사의 순간들을 담기 위해 펜을 들었다. ‘시대를 바로 보는 청년의 눈빛’이라는 기치를 가지고 대학언론으로서 시대정신을 전달하기 위해 기꺼이 전면에 섰던 <전대신문>의 역대 ‘편집국장’들을 만나봤다. 1986년 편집국장 염민호 교수(교육), 2008년 편집국장 김수지 변호사, 2013년 편집국장 연합뉴스 나보배 기자, 2020년 편집국장 박세은 씨(신문방송·18)가 그 주인공들이다.

 

 

전대신문 기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는?
염민호 1985년 당시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전대신문에 지원했어요. “유능하고 책임감이 투철한 학생기자가 필요하다”는 신문사의 요구가 있었다고 기억해요.
김수지 매일 신문을 읽는 습관이 있어서, 언론에 관심이 많았어요. 글쓰기를 좋아하고, 세상일에 호기심이 많아, 신문사 활동을 하면 저에게 잘 맞으리라 생각했어요.

편집국장의 자리에 앉았을 때 들었던 생각은?
김수지 당시 저는 기자가 천직이라고 생각했어요. 단신이나 인터뷰 기사가 아닌, 기획 기사 에 재미를 느끼게 되던 차에, 편집장으로 추천을 받게 됐죠. 편집장을 맡게 되는 건 개인적으로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염민호 당시엔 신문을 매주 8면, 격주 12면으로 제작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감’ 뿐이었죠. 독자들이 기다리는 신문을 제시간에 제작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1980년대 중반의 시국 상황을 반영하려고 노력했던 거 같아요.
박세은 편집국장이라는 자리를 잘 해낼 수 있을지 너무 떨렸어요. 설렘이라는 떨림이 아니라 정말 두려움의 떨림이었어요. 한편으로는 이 일이 너무나 매력적인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진짜 좋은 신문을 만들어봐야겠다’라는 패기도 있었답니다.

전대신문 기자로 활동하며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나?
염민호 인쇄된 신문 1면에서 날짜 오기를 발견한 후, 기자 15명이 모여 2만 5천 부를 직접 펜으로 수정한 사건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구석기 시대(86년 또는 87년) 낭만적 사건’이었죠.
나보배 매주 월요일 7시마다 진행하던 아이템 회의와 목요일 밤 마감의 공기, 밤을 꼬박 새우고 신문 교열을 마친 뒤 신문사 선후배가 모두 모여 치킨을 먹던 순간들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그때가 무언가에 가장 열중하던 순간이었어요.
김수지 당시 부산대, 경북대, 전남대 편집장이 만나 ‘대학 신문사의 미래’에 대해 토론을 했던 기억이 나요. 이후 인터넷 뉴스를 강화시켜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전대신문>, <전대방송>, <Chonnam Tribune> 3사 통합 뉴스 페이지인 ‘Cong’을 만들어 열심히 운영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박세은 제일 기억에 남는 건 맥모닝이에요. 맥모닝은 밤샘 마감의 증거이자 훈장이라고 해야 하나. 사실 그 당시에는 밤샘 마감 상황까지 오는 게 정말 힘들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너무 추억이더라고요. 후배 기자들과 함께 먹은 맥모닝은 함께 했던 그 순간에 동지애의 상징이기도 해요.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가 있다면?
염민호 1984년에 학원 자율화 조치가 시행되면서 총학생회가 부활하게 됐어요. 학생회가 부활해서 대중 연설도 진행되고 후보자들과 인터뷰도 했습니다. 그전에는 통제됐던 학생운동 이야기. 학생회 사람들의 이야기가 신문에 실리게 된 것은 정말 큰 변화였죠.
김수지 우리 대학 미술대학이 전국적으로 유명하지만 그에 비해 시설이 열악하다는 기사를 쓴 적이 있어요. 타 대학 사례를 비교해가며 문제점을 지적하는 해설 기사를 썼고, 편집장이 되어서는 편집장 칼럼에도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했었죠. 그러던 중 누군가 저에게 ‘미대에 남자친구가 있는지’를 묻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어요. 그렇게 의심받을 정도로 열정적으로 취재에 임했다는 방증이었던 것이죠.

전대신문 활동이 현재의 삶에 끼친 영향은?
나보배 현재 기자로 일을 하고 있으니 신문사는 제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해요. 사회를 예민하고 불편하게 바라보는 습관과 때론 따뜻하게 바라보는 관점 두 가지를 동시에 기를 수 있었어요.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기본적인 기술을 기른 것도 물론이고요. 신문사 기자로서의 3년은 잃은 것보다 얻은 게 훨씬 많았어요.
김수지 이 사회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어요. ‘펜은 힘이 강하다’는 것과 그러므로 함부로 펜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잃은 것은 없어요. 오히려, 전대신문에서 활동했던 역사를 잃으면, 제 대학 생활을 잃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염민호 비판적 사고력과 논증적 글쓰기는 저의 지적 활동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비판적 문제의식과 원고 마감 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깡다구’, 적극적으로 묻고 답할 수 있는 용기와 역량도 그때 배운 것이에요.
박세은 리더로서의 역량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취재하며 맞이하는 여러 상황에 대처하면서 순발력, 위기 대처 능력이 길러졌어요. 언론인이 되고자 하는 꿈에 확신을 얻게 됐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KBS 현장실습에 도전했어요. 밤샘이 잦고 기사 마감을 위해 바삐 보내다 보니 체력이 많이 떨어졌지만 얻은 것에 비하면 싸게 배운 것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전대신문 면접 날로 다시 돌아간다면?
염민호 다시 지원합니다. 더 진하고 더 알차게 편집장 역할을 하고 싶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땐 나의 능력 부족을 용기로 버텨낸 것 같기도 하네요.
박세은 무조건 지원해야죠! 다시 돌아간다면 전대신문에 몰두해서 더 좋은 신문을 만들고 싶어요.
김수지 당연히 다시 지원할 것 같아요. 전대신문에서 활동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보배 당연히 다시 지원할 것 같아요. 다만 3년간 신문에만 열중했는데 그게 때로는 아쉽기도 해요. 아이템은 어디에나 있고 모든 것이 기사가 될 수 있으니까, 신문사 외에 또 다른 활동을 하는 균형을 찾았다면 대학생활이 더더욱 풍성했겠다는 생각을 아주 가끔 해요.

나에게 전대신문이란?
염민호 내 청춘의 모든 것입니다. 20대와 30대를 전대신문에 바쳤어요. 학생기자, 대학원생 기자, 편집위원까지 12년 동안 일했습니다. 무지와 무능을 매일 매주 확인했던 시간이었고 좋은 신문 만들기 위해 ‘투쟁’이라는 단어를 평상어로 사용했던 시절이었죠.
김수지 저에게 전대 신문은, 제 인생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게 한 실험실이자, 늘 비춰보는 거울이에요.
박세은 내 대학 생활의 전부예요. 주변 사람들이 ‘너 아직도 전대신문 해?’라고 물어볼 정도로 대학 생활에 많은 부분을 전대신문에 쏟아부었죠. ‘안전 이별한 전 남친’ 같아요. 분명 괴로웠고 힘들었지만 좋은 기억만 자꾸 떠오른 존재예요.
나보배 신문이 힘을 잃어가고 있는 시대인 만큼 대학 신문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뉴스’에 대한 가치는 여전히 중요한 만큼 중심을 잃지 않고 제 역할을 해나가길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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