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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의 힘으로 건립된 용봉탑■ 전남대 역사를 찾아서 ④ 용봉탑
전남대역사연구회  |  news@cnumedi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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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08  16:4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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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대를 대표하는 상징물은 무엇인가? 질문을 받는다면 대부분의 용봉인들은 용봉탑을 떠올린다. 정문에서 관현로길을 따라 걷다보면 용봉관 앞 회전교차로에 우아한 자태의 용봉탑이 보인다. 이 용봉탑은 누가 언제 만들었을까?

1976년 11월 9일, 호국단 간부들이 민준식 총장(8,9대 총장)에게 용봉탑 건립을 건의했다고 전해진다. 1952년에 문을 연 전남대가 개교 24년이 지났지만 학교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없으니, 용봉인의 애교심과 기상을 고취시키고 학풍을 조성하기 위한 상징물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용봉탑 건립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83%가 동의했다고 한다. 학생 48%의 지지를 얻어 건립기금을 모금하기 시작했는데, 모금액은 77년 전학기 9백69만원, 후학기 9백21만원, 78년 전학기 1천1백21만원으로 총 3천11만원이었다.

용봉탑 건립될 장소는 학생들의 50% 이상이 도서관 앞에 세워지길 희망했다. 그러나 탑의 규모가 커야 하고 분수대 공사까지 병행해야 하는 등 예산의 제약이 따른다는 이유로 지금의 장소인 본부 앞 회전교차로로 결정했다.

   
 


1977년 3월 23일자 조선일보에 용봉탑 건립 현상모집 공고가 나갔다. 공고문에는 “개교 25주년을 맞이하여 용봉인들의 애교심 배양과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전남대학을 상징할 수 있는 Monument를 제작하겠다”는 건립 목적이 명시되어 있었다. 2건의 작품이 접수되었으나, 상징탑설계심사위원회는 접수된 작품이 상징탑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K씨 작품을 가작으로 선정하여 30만원을 지불하고 다른 조각가를 물색하였다. 최종적으로 용봉탑 조각은 당시 UN종군기자상을 조각했던 홍익대 미술대 학장 최기원 교수가 맡게 된다.

용봉탑 건립 추진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중, 1977년 9월 문교부의 잡부금징수금지 처분으로 진행상황이 주춤하게 된다. 탑 건립운영위원과 각 단체 반장, 전 호국단부서장, 교내 언론기관 대표들은 학생들의 힘으로라도 탑 건립을 계속 추진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다행히 탑 건립 추진은 꾸준히 계속되어 1978년 2월, 최기원 교수와 총 2천7백50만원의 용봉탑 건립 계약을 맺고 4월 초부터 작업에 착수하여 6월 8일 정오에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용봉탑은 높이 13.63m, 반경 4.45m 규모로 용봉인의 진리에 불타는 정열과 진취적 기상의 상징물이며, 총 예산은 3천1백39만원이 들었다. 받침돌 중앙하단 표지석의 “우리 슬기와 웅지를 모아 창조와 봉사의 횃불을 길이 길이 타오르게 하자”는 글이 탑의건립 취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용봉탑은 화강석으로 제작된 하부좌대, 청동으로 제작된 중간 기둥, 상부는 스테인레스 구조물로 이루어졌다. 화강암의 좌대 3개가 우리 대학 교시인 진리, 창조, 봉사의 의미를 띠고 안정감 있는 모습으로 청동부분을 떠받치고 있다. 청동으로 된 부분에서는 용이 휘감고 올라가는 형상으로 웅장한 젊은이들의 힘찬 기상과 건장한 체력을 뜻하고 있으며, 상부의 스테인레스로 제작된 봉황은 모빌로 만들어져 바람의 방향에 따라 돌아가도록 설계되어 웅장한 뜻을 갖고 창공을 비상하는 느낌을 표현했다. 당시로서는 다른 상징탑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수법인 모빌의 형태를 사용해 바람이 불면 방향을 바꾸며 돌아가고, 햇빛을 받으면 강한 반사광을 내는 독특한 설계였다.

용봉탑의 원작자인 최기원 교수는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두 가닥이 엮어 올라가는 모습으로 설계하였으나, 보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 세 가닥으로 수정하였다. 스테인레스로 제작한 봉황은 대학본부에서 요구하여 수정 추가되었다고 한다.

   
 

용봉탑과 관련된 전설이 구전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진정한 사랑을 하는 연인이 용봉탑에 올라가면 봉황이 진짜 새가 되어 날아간다거나, 자정에 사랑하는 연인이 용봉탑 밑에 있으면 봉황이 내려와 커플을 감싸 안으며 사랑이 영원해진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1980년 5·18 시절에는 봉황이 눈물을 흘렀다고 한다.

봉황은 모빌로 설계되어 바람이 불면 돌아가도록 되어 있는데 해마다 3월이면 봉황이 가리키는 단과대학이 그 해 가장 취업률이 높다는 전설도 있다. 짓궂은 학생들이 한밤중에 몰래 용봉탑에 올라가 자기 단과대학을 향하도록 봉황의 머리를 돌려놓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올해 3월, 용봉탑 상부에 자리 잡은 봉황의 보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봉황 조형물의 날개 부분이 부서진 것을 알아본 예술대 정금희 학장의 건의로 미술학과 박정용 교수와 아트와이 이형표 대표가 대대적인 봉황 복원 작업을 진행한 것이다. 4월 28일, 복원 작업을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온 봉황은 더 멀리, 더 힘찬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완성된 용봉탑은 오늘도 여전히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용봉동 캠퍼스를 지키고 있다. 탑 건립의 태동이 학생의 힘에서 유래됐다는 점에서 용봉탑의 의미는 더욱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전남대인의 기상을 상징하는 조형물인 용봉탑이 개교 25주년을 기념하여 학생들의 순수한 모금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참고문헌> 전남대 50년 남기고 싶은 이야기, 전남대학교 60년사, 전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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