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림동에 위치한 3·1만세운동길.

3·1운동이 발생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년이 흘렀다. 1919년, 우리 민족은 ‘독립’을 향한 바람 하나로 거리에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고 그 외침은 만주, 연해주 등 우리 민족이 있는 모든 곳으로 방대하게 퍼져나갔다. 광주 역시 다를 바 없었다.
특히 광주는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개함으로써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인 전국적인 항일운동 발생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1919년의 광주는 어땠을까? 광주 곳곳에 남아있는 그날의 흔적을 찾아 함께 떠나보자.

 

▲ 양림동에 있는 정율성 생가 집터. 이 근방에 사립측량학교가 있었고 그곳에서 신문잡지종람소 모임이 진행됐다.

▲ 광주3·1운동의 시발점- 신문잡지종람소
신문잡지종람소는 1917년 당시 지식인 집단의 20대 청년들이 모여 신문이나 잡지를 읽으며 일제강점기의 정세에 대해 토론하던 비밀 독서회 모임이었다. 1년쯤 지나 일제가 모임의 존재를 알아채자 충장로 4가로 옮기고 ‘삼합양조장’으로 위장해 활동을 지속했다. 이들은 정광호가 일본에서 가져온 2·8독립선언서와 김복현이 서울에서 가지고 온 3·1독립선언서 등을 인쇄·배포하고 3·10만세시위 행진을 주도하는 등 광주3·1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장소는 과거 사립측량학교가 있던 곳으로 현재는 서남대부속병원 뒤편, 정율성 생가 집터 근방이라고 대략적인 위치만 가늠할 수 있다.

▲ 양림동에 있는 남궁혁 가옥터. 현재는 아파트 어린이 놀이터로 변했다.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정비 작업이 진행 중이다.

▲ 독립운동을 모의하다- 남궁혁 가옥터
1919년 3월 6일, 광주3·1운동을 준비하던 김복현, 최병준, 송흥진 등 10명은 지금의 양림동에 있는 남궁혁 집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은 8일 큰 장날 독립만세운동 개시, 독립선언서, 구한국 국기 등의 인쇄 담당자 등 구체적인 사항을 정했다.
일제가 움직임을 눈치 채고 남궁혁의 집을 주목하자 김언수, 최한영, 이강호 등의 집으로 옮겨가며 일을 추진했다. 인쇄에 난항이 있어 독립만세 시위는 10일 오후 3시 30분으로 미뤄졌다.

▲ 수피아홀 지하에서는 당시 학생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준비했다.

▲ 학생들의 움직임- 수피아여고
박영자, 홍순남, 최경애 등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3월 7일, 8일경 수피아홀 지하에서 치마를 잘라 구한국 깃발을 제작하는 등 독립만세 시위를 준비했다. 수피아여고 교사 박애순은 3월 3일 부근부터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며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3월 10일 아침, 광주3·1운동 당일에는 김강으로부터 독립선언서 50여 장을 받아 학생들에게 분배하도록 하기도 했다.
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은 앞장서서 만세를 불렀으며 2명의 교사와 21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끌려가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 과거 광주 작은 장이 열렸던 부동교 아래의 현재 모습

▲ “조선독립만세”- 광주천 큰 장, 작은 장
3월 10일, 3시 무렵부터 독립운동 주도자들은 장터로 오는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와 구한국 국기를 나누어주고 운동 참가를 권유했다. 3시 30분, 수백 명의 군중이 모이자 김복현, 김강, 서정희 등은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운동 개시를 선언했다.
이들이 작은 장으로 이동하는 중에 양림리 방면에서 숭일학교 학생 100여명과 수피아여고 학생 30여명이 무리에 합세했다. 작은 시장에 모인 시민 수백 명까지 합쳐지자 시위 군중은 천 여명에 달했다.

▲ 시위 군중이 행진했던 우편국은 현재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충장 우체국 장소다. 당시 시위대는 충장로 근방을 돌며 만세를 외쳤다.

▲ 시위대의 행진- 충장 우체국
시위 군중은 작은 장을 출발해 지금의 충장 우체국인 우편국을 향해 행진했다. 송흥진이 대형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의 선두에 섰고 김복현, 서정희, 최병준 등이 지위했다. 지금의 충장로 근방을 돌며 만세를 외치며 행진해온 농업학교 학생들 및 농민들과 어우러져 그 규모는 천 수백명으로 커졌다. 석유를 파는 상인, 식육점 주인, 대장장이, 목수 등 독립을 열망하는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시위대에 합류했다.
시위 군중이 우체국 앞에 이르자 기마헌병대가 출동해 주모자를 체포하기 시작했다. 시위 군중들은 “우리가 자진해 경찰서로 가겠다”고 외치며 광주경찰서 앞마당으로 몰려 들어가며 더욱 큰 소리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이때부터 진압대는 총검을 휘두르며 무자비한 구타와 폭행을 자행했다. 유혈진압으로 경찰서 앞마당은 피로 물들었다. 수피아여학교 윤형숙은 일본 헌병이 내리친 칼에 왼쪽 팔이 짤렸으나 끝까지 만세를 불러 일본진압병력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진다.
이날 60여명의 시민과 학생이 체포됐고 이 중 43명은 감옥으로 압송됐다.

참고 문헌= 노성태 교사(국제고 수석교사/역사) <광주3·1운동의 재구성-판결문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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