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1893년 11월에 봉기를 모의하며 썼던 사발통문 서문의 일부분이다. 따라서 이 통문은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알리는 첫 번째 통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통문은 오랫동안 잠들어 있다가 75년 후 1968년 12월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송준섭의 집 마루 밑에 묻혀 있던 족보 속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 집에 발의된 그 내용은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명이 서명한 것으로써,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하고,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하고, 군수에게 아첨하여 인민을 침어한 탐리를 격징하며, 전주영을 함락시키고 서울을 향해 곧바로 나아갈 것[直向]”을 결의한 것이다.


계사년(癸巳年, 1893) 11월에 써진 이 통문은 주모자를 알 수 없도록 사발[그릇]을 한지에 대고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 둘레에 썼다고 해서 사발통문이라 이름 붙여졌다. 한편 서명한 둘레의 모양으로 보아 그들이 동학의 평등 세상을 꿈꾸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조정의 처지에서 보면 분명 반란이지만 민중들의 입장에선 혁명이었다.


간단한 4개의 조항은 고부 군수 조병갑이 저지른 적폐를 적시한 결의이기는 하지만 이는 전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향할 것을 결정한 것으로 보아 이미 고부 군민을 비롯한 전국의 민중들이 조선의 적폐를 자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 것이다.


이듬해 봉기한 동학농민군의 강령은 “군대를 몰고 서울로 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없앤다.”하였고,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은 “노비문서를 소각하고, 과부가 된 여성의 개가를 허용하고, 지벌을 타파하고, 토지를 균등히 나누어 경작”하게 한다고 하였으므로 이는 봉건 질서를 부정한 혁명이었던 것이다.


또 그들이 농민군이라 하여 우매한 정도의 시선으로 지켜봤던 조선의 적폐 세력들의 수준보다 농민군의 근대적 인식은 아주 높았다. 이후 조선의 갑오개혁은 기실 동학농민봉기가 선도한 셈이다.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공사노비를 혁파함으로써 신분제를 폐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결국 갑오개혁을 주도한 세력들은 조선을 근대로 올려놓고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에 역부족이었다. 갑오개혁은 실패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조선이 오래된 적폐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의 개항 이후 18년 만에 이루어진 정부의 개혁 정책은 비록 뒤늦은 감이 없진 않았지만, 동학농민군의 동력을 제대로 이어갔다면 조선이 그리 쉽게 일본에 병합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1894년 같은 해, 조선은 국제 전쟁터로 내주고 말았다. 청일전쟁이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 앞바다에서는 일본과 러시아가 대판 붙었지만 모두 일본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일본이 승기를 잡았던 데는 동학농민군의 패배와 무관치 않다.


일본의 조선 정벌 논의는 메이지 유신 시절부터 있어 왔다. 일본도 근대의 길로 들어서기까지 만만찮은 내홍을 겪었다. 메이지 정권을 성공시킨 사이고 다카모리는 무사계급의 반발을 무마시키고자 조선 정벌을 주장했다. 무사 계급의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고 있었던 사이고 다카모리를 토벌했던 전쟁이 1877년 서남[세이난]전쟁이었다. 이 사건이 조선의 개항 이후의 일이었던 점은 오히려 조선에게 있어서 반면 교사였을 법한데, 조선은 이를 주목하지 않았다. 적폐 세력과 전쟁을 해서라도 그 적폐를 도려내지 못하면 개혁은 성공하지 못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동학농민군의 봉기가 우리에게 주었던 교훈은 적폐를 청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평등 세상을 꿈꿨다. 1894년 이루지 못한 전봉준의 꿈이 2017년 촛불 혁명으로 이어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서금석(전남대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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