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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부문 가작> 쌀독2017전대신문 문예작품현상공모 단편소설 가작 입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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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04  11: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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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독

송은유(대학본부 기획조정과)

밤새 웅크린 몸은 저리다 못해 굳은 듯하다. 등으로 번지는 통증이 강약약으로 오르다 내리기를 반복한다. 화란이 숨을 들이켜며 아픈 곳에 손을 받친다. 천천히 상체를 오른쪽 방향으로 틀어 본다. 살짝, 대번에 허리를 끊을 듯 강렬한 통증이 인다. 이불을 다급하게 끌어당긴다. 가슴이 답답해 도로 이불을 홱 젖힌다. 손에 땀이 배고 몸이 떨린다. 다시 조심스럽게 다리를 뻗어 본다. 순간, 쨍한 통증이 온몸을 훑는다. 생각과 몸이 철저하게 이분화 된 느낌이다. 화란이 내뱉은 숨이 방바닥을 부딪고 올라 콧잔등과 볼을 스친다. 이게 돌덩어리가 아니고 뭔가.

잠을 잔 건지 만 건지 화란 자신도 모를 지경이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려본다. 시간이 갈수록 더 먹먹해질 뿐 굽은 허리는 그대로다. 어둑한 사위가 차츰 검푸른 색으로 변해간다. 그녀는 이불을 그러쥐고 일어나 한 쪽 다리를 세워 턱을 괴고 앉는다. 머리가 무겁고 어지럽다. 아이고, 이 무슨 해괴한 꼴이야. 무슨 악몽이냐고, 내 살다 살다 별일을 다 보네. 꺼져버려. 당장! 꺼지라고.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망나니를 나무라듯 큰 소리로 뭔가를 꾸짖는다. 어수선하고 흉측한 꿈을 꾼 건 아닌가, 생각도 해본다. 분명, 어제 병원을 나와 옥주랑 먹었던 꽃게 맛, 입안이 아직도 얼얼한 그 꽃게 장, 화란은 홀딱 벗겨진 입안을 혀로 더듬는다.
어제 동서 의원에서 묻어온 냄새가 여전히 코끝에 남아있다. 화란은 방석이나 쿠션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에 숨을 고르기 힘들 정도였다. 냄새 때문에 두통까지 생겼다. 하지만 눕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허리가 동강날 듯 뻐근하고 맘처럼 따라주지 않아 눈시울이 붉어지곤 했다. 등을 대고 누우면 다리가 허공으로 번쩍 들리고 다리를 바닥으로 내려놓으면 상체가 벌떡 일어나곤 했다. 이 몸으로 비행기를 탈 수나 있겠는가. 우리문화답사회의 분위기가 아니더라도 얼마나 기다렸는가. 답사에 참여하기 위해 성규 결혼식을 당기며 애먹은 기억도 생생했다. 그녀는 적의에 찬 눈으로 어둠을 바라보다 입을 벌린 채 까무룩 고른 숨을 내쉬곤 했다. 혀 끝에 까칠한 입천장이 느껴진다. 자려했던 것인지 잤던 것인지 그녀 자신도 모르는 밤이 지나고 있다.

희붐한 새벽빛과 함께 방 문틈으로 미역국 냄새가 흘러든다. 기다렸다는 듯이 꼬르륵 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저녁을 먹지 않은 배가 푹 꺼진 느낌이다. 평소 같으면 이런 정도의 배고픔에는 어떤 음식이건 달게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꿀을 먹어본들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나 있을까.
옥돔미역국, 생각해보니 성규가 유난히 좋아하는 음식이다. 화란도 좋아하긴 마찬가지다. 참기름을 듬뿍 넣고 끓인 옥돔미역국에 하얀 쌀밥은 어떤 성찬보다 훌륭한 밥상이 되곤 했다. 시원하면서도 담백한 국물을 넘길 땐 충만한 평화, 그 자체였다. 화란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번진 웃음을 거두고 표정을 구긴다. 뱃속에서 또 한 번 꿀렁 소리가 나자 순식간에 머리에 열이 1도 정도 오르는 느낌이다.
화란이 거실로 나와 스틱을 찾아 든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잠시 머뭇거리다 주방으로 들어선다. 싱크대 위에 밥통과 전자레인지 그 옆에 냉장고와 쌀통이 한눈에 들어온다.
싱크대 하단 수납장 내부는 조리 도구들과 얼룩진 냄비로 빼곡하다. 화란이 문을 닫고 왼쪽으로 몸을 튼다. 냉장고와 쌀통을 보자 가슴이 불에 덴 듯 화끈거리고 현기증이 난다. 손을 더듬거려 냉장고 손잡이를 붙잡자 헐거워진 냉장고가 가볍게 열린다. 구부린 등 위로 냉기가 쏟아진다. 그녀는 고개를 떨 군 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고추장과 된장통과 자질구레한 반찬통들 그리고 감귤 김치와 감귤 젤리 등 감귤로 만든 음식들, 저게 다 뭐란 말인가. 썩을 것들….
아크릴 통에 든 생선들이 냉기 속에서 갈팡질팡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녀가 힘없이 문을 닫고 돌아선다. 성규가 결혼하고 겨우 한 달 지났는데 몇 년이 흐른 것만 같다.

가슴이 뜨겁고 둔탁한 울림이 계속돼 숨이 턱턱 막힌다. 그것은 허리의 통증마저 삼켜버린 듯하다. 몸은 굳어가고 가슴은 녹고, 그래 잘난 아들은 며느리 거라더니 더 잘난 아들이 아니어서 다행인 건가. 화란의 얼굴이 영산홍처럼 달아오른다. 성규가 홀린 것인가, 자신이 농락을 당한 걸까. 생각만 해도 울화가 치민다.
성규와 며느리가 오는 모양이다. 계단을 밟고 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화란이 서둘러 거실에서 안방으로 들어간다.
“엄마, 좀 괜찮아요?”
성규가 실내로 들어서며 큰 소리로 묻는다. 화란은 대꾸하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는다. 성규 뒤로 혜성이 따라 들어온다. 활기찬 성규를 보자 눈물이 날 것 같다.
“출근하지, 여긴 왜?”
화란은 목울대를 누르며 말한다.
“좀 괜찮냐구?”
성규가 넥타이를 매만지며 화란을 살핀다.
“밤새 일하니까 그런 거야. 뭐가 급하다고… 혜성이 있잖아.”
성규가 혜성을 쳐다보며 눈을 찡긋한다.
“속 시끄런 소리 말고 출근이나 해.”
화란의 목소리에 역정이 묻어난다.
성규가 방을 나서며 그래 출근 하죠 근데 인상 쓰지 말고 혜성이랑 동서의원에나 다녀오라며 계단을 급히 내려간다. 성규는 중학교 동창인 오정을 누구보다 명의라고 믿고 있다. 화란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은 말이다. 화란은 바깥 출입문 쪽으로 걸어가며 성규가 내려간 빈 계단을 바라본다. 층층마다 햇살을 받고 있는 회백색 계단이 먼 나라의 한적한 시골에 버려진 건물을 떠올리게 한다.
혜성은 그때까지 들고 있던 뚝배기를 주방으로 가져간다. 어머니 식사 하셔야죠. 간이 맞을지 모르겠어요. 어머니도 좋아한다고 그래서…. 혜성은 화란을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말한다. 거실을 오가던 화란이 너도 가봐, 병원에는 같이 갈 사람이 오니까. 관둬라. 툭 쏘지만 생각보다 다정한 자신의 말투가 못마땅하게 느껴진다.
산전 검사는 간단하대요. 시간 많아요. 외출복으로 갈아입을 때 불러주세요. 혜성의 목소리가 방으로 들어서는 화란의 등을 따라온다. 화란의 손에 들린 지팡이가 떨린다. 혜성이 화란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갑자기 이렇게 편찮아서 큰일이에요. 티 없이 맑은 목소리로 말한다.
“일도 없다.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화란은 욕실로 들어가 문을 쾅 소리가 나게 닫는다. 거울에 희끗한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한 여자의 얼굴, 눈을 부릅뜨니 이마에 주름이 골을 낸다. 이게 꿈은 아닌가 하는 생각…, 각진 턱에서 성규의 얼굴을 본다. 끝없는 회한이 밀려든다.
그녀가 파자마와 팬티를 내리고 변기에 걸터앉는다. 미쳐 덜 내려진 팬티에 소변이 튄다. 변기는 흘림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내용물을 삼키느라 요란한 소리를 낸다. 뭐? 따뜻할 때 드세요? 한단 소리가 따뜻할 때 드세요? 뻔뻔한 것 같으니. 말을 삼키며 팬티를 벗어 먼지 낀 구석에 던진다.
샤워 꼭지를 올리자 차츰 물줄기가 따뜻해진다. 뜨거운 물이 얼굴과 정수리를 적시고 굽은 등에서부터 서혜부와 무릎과 발목까지 적셔준다. 욕실은 금세 수증기로 꽉 차고 잠시,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얼굴에 흐르는 수돗물을 연신 쓸어낸다. 화란이 입을 벌리고 깊은 숨을 들이켠다. 입 속으로 물이 흘러든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뜨거운 샤워는 늘 개운함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녀는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대퇴부를 아래서 위로 훑고 아랫배와 가슴과 겨드랑이를 차례로 닦는다. 욕실을 나와 냉수를 들이켠다. 아찔한 냉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이내 답답해진다. 뚝배기가 눈에 거슬린다. 뚜껑을 여니 기름 냄새가 훅 끼친다. 국물에 뜬 참기름이 군데군데 흩어져있다. 희미하게 계단을 밟고 오르는 소리에 화란은 도로 뚜껑을 닫는다.

옥주가 종이 박스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온다.
“뭔데 이렇게 무거워?”
“이게 그 유명한 건강 떡 이래잖아.”
옥주가 택배 박스에 붙은 테이프를 뜯어낸다. 화란이 떡 하나를 손가락으로 누르자 표면에 붙은 견과가 쑥 밀려들어간다. 화란은 옥주 앞으로 박스를 밀어주고 앉아서 머리에 물기를 닦는다.
자긴 했어? 옥주가 텁텁한 목소리로 물으며 화란의 허리를 주무른다. 가슴이 타고 몸은 돌덩이가 되는 줄 알았어. 허리가 끊어지는 줄 알았다구. 그리고 동네 창피해서. 어떡하냐? 이제, 꼬박 샜다. 화란은 붉어진 눈시울을 깜박거린다. 옥주가 비닐 포장을 벗겨 떡 하나를 화란에게 건넨다. 속을 좀 채워. 병원 가야할 거 아니야. 저기 저거에다가 좀 먹어봐.
오십년을 한결같이 곁이 되어주는 친구다. 화란은 문득 자신의 옹진 처지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다.
옥주가 거실 한편에 놓여있던 화채 그릇을 바닥에 놓으려 하자 화란이 손등으로 막는다. 유리볼에서 얼음조각이 찰그락 소리를 낸다. 혜성이 집을 나서기 전, 들여 놓은 수박화채인 모양이다. 이팝꽃이 지고 연둣빛이 오를 즈음이면 수박 맛이 최고다. 화란은 이때의 수박을 좋아한다. 셈에 밝은 혜성의 태도가 화란의 속을 후빈다. 자기 좋아한 거잖아, 며느리가 이런 것 까지 챙기는 게 뭔가 생각은 있네. 그러지 말고 좀 먹어. 잘됐네, 떡에는 이게 좋지. 잘됐다니 뭐가 잘됐어? 화란이 화채를 들이켜는 옥주를 못마땅하게 쳐다본다. 그러면서 떡을 입 속으로 밀어 넣는다. 옥주가 입가를 닦으며 그래도 좀 잤어야지 얼굴이 쓰겠어? 걱정 섞인 말투다. 화란은 속이 녹는 줄 알았다구. 내가 저절로 타 죽겠다. 얼굴이 다 뭐야. 허리가 90도로 꺾여서. 화란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젓는다. 그러더니 손바닥으로 명치를 탁탁 치고는 지팡이를 짚고 일어난다. 자세를 곧게 하려는 듯 지팡이를 높게 잡아보지만 구부정한 허리에 통증만 심해진다.
“이 꼴로 못 살아.”
화란은 떡 하나를 입속에 욱여넣으며 앞장선다.

동서 의원 도수실에 도착했을 때 교정기에서 환자가 막 일어난다.
“자 오른 팔 들어봐요, 어때요?”
오원장이 환자에게 묻는다. 오십대로 보이는 남자 환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팔을 조금씩 높게 들어올린다. 귀 옆을 스쳐 올라간 팔이 믿기지 않는 듯 놀란 눈으로 자신의 손끝을 바라본다. 아, 선생님 고맙습니다. 거의 감격하는 목소리다. 오원장이 이젠 됐어요. 자, 고향 앞으로, 다른 병원 갔으면 수술하고 평생 병신 됐을 텐데 고물차 신차로 만들어 놨으니 잘 굴러갈 겁니다. 하면서 나가는 환자 뒤통수에 한 마디 더 한다.
“다음엔 여기까지 오는 거 힘드니까 한강물에 빠져버려요.”
광대뼈가 파묻힌 오원장의 누런 얼굴에 볼 살이 실룩거린다. 움푹 들어간 눈 두덩이와 눈 밑은 기미가 잔뜩 덮고 있다.
화란은 오원장의 말이 시껍게 느껴진다. 자리에서 뭉그적뭉그적 엉덩이가 떨어지지 않는다. 옥주가 오원장의 말을 잽싸게 가로챈다.
“한강물이 말랐어도 그러면 될까? 여긴 원장님 유머가 좋아 환자가 많은가요?”
“아니 그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오원장은 아무렇지도 않는 듯 웃으며 화란을 향해 손짓한다.
“자, 어제처럼 누워 보세요.”
오원장이 교정기 앞에 서서 손목으로 허리 밴드를 추켜올리며 화란이 다가오는 걸 지켜본다.
옥주가 쿠션과 방석을 교정기 윗부분에 올린다. 그러곤 화란의 손을 잡고 오른 손으로는 머리를 받쳐 눕힌다. 역시나 방석과 쿠션을 이용해 정강이를 받친다. 화란의 미간에 깊게 골이 팬다.
“어머니, 마음이 좀 어떠세요.”
오원장이 화란의 표정을 살핀다. 언제였던가 싶게 장난기가 싹 가신 얼굴이다. 그는 교정기 하단으로 걸음을 옮겨 화란의 발을 잡아 모은다.
“골반이 틀어져 다리 길이가 맞지 않아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급한 건 허리가 왜 이렇게 됐는지 그걸 찾아야 해요.”
오원장은 화란의 양 손등에 하나씩, 배꼽 주변에는 스무 개의 침을 놓는다. 허리가 교정기에 닿아 몸의 힘을 받아내고 있다. 허리로 새로운 통증이 일어 심호흡을 한다. 쿠션만 아니라면 금방이라도 교정기에서 굴러 떨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이 밀려든다. 화란은 자신의 몸이 불안을 담고 있는 그릇이 돼버린 건 아닐까 생각한다.
“하룻밤 사이에 허리가 이렇게 휜 건 처음 봐요. 이건 뼈가 틀어져서 이런 게 아니에요. 골반이야 누구나 조금씩 틀어져 있기 때문에 몇 번 잡고 운동을 하면 되죠. 근데 어머니는 좀 달라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성규도 결혼했고, 큰일은 다 지난 거잖아요?”
화란은 눈물을 싹 닦고 오원장과 옥주를 차례로 바라본다.
“아, 선생님. 그러니까 엊그제까지 멀쩡했는데 무슨 날벼락인지 모르겠어요.”
옥주가 안타까운 눈으로 하소연하듯 말한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화가 꽉 찼어요.”
오원장은 혼잣말을 하며 침 하나를 빼더니 그 자리에 다시 놓는다.
“아무튼 눕혔으니 이제 원장님만 믿어요.”
어제 오원장이 본인으로선 도저히 치료할 수 없으니 다른 병원으로 가라했다. 화란은 머릿속이 하얘지고 말문이 막혔다. 간신히 입을 열어 성규는 네가 도수치료 명의라던데 어디로 가라는 것이냐. 울음 섞인 말을 더듬었다. 오원장은 고심하다가 그렇다면 천정을 똑바로 보고 눕거나 눕힐 수만 있다면 고쳐보겠습니다, 고 말했다. 오원장으로선 치료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화란은 옥주의 도움을 받으며 좁은 교정기 위에서 안간힘을 썼다. 눕다가 옆으로 몇 번을 나동그라졌다. 머리카락이 이마에 난 땀에 들러붙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을 때 천장을 보고 뜨거운 숨을 밭았다. 의자나 구석에 던져진 방석과 쿠션으로 등과 다리를 받쳐야 했다. 오원장은 화란에게 막말을 하거나 냉정하게 굴지는 않았다. 어쩌면, 어쩌면 아주 쉽게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고쳐 말했다.
오원장이 다시 교정기 하단에서 화란의 두발을 잡고 길이를 비교한다. 치료실 문이 빼꼼히 열리며 혜성이 얼굴을 들이민다.
“아, 어서 오세요. 며느님 보시면 절로 힘이 날 텐데….”
오원장이 화란의 표정을 보며 말끝을 흐린다. 화란이 다가오는 혜성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어머닌 좀 어떠세요? 건강하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왜 이런 걸까요?”
“무슨 일이 있었어요?”
혜성의 물음에 오원장은 화란과 혜성에게 되묻는다.
“일이란 게 있긴 했지만 인부 불러서 다 한걸요.”
침을 빼는 오원장에게 혜성이 2층으로 살림을 옮겨주었다고 말한다. 어머니가 여행에서 돌아오시기 전 날이었는데, 찬데서 주무신 게 좀 무리였을까요? 찬데 입을 대고 자면 입이 틀어진다잖아요. 오원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 믿어지지 않아요.”
혜성의 목소리가 떨린다.
혜성은 며칠 전, 화란의 손때 묻은 살림들을 이층으로 마저 옮겼다. 짐을 나르다가 가파른 계단에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회벽의 계단 가장자리에 이끼가 끼어 미끄러웠다. 시멘트 계단을 밟을 때마다 발밑에서 짜그락 소리가 났다. 덩치 큰 물건들을 올리고 점심을 먹었다. 직업소개소에서 불러온 인부들이 입가에 남은 짬뽕밥 국물을 휴지로 닦아내며 무심하게 말했다. 생활력 강한 사람인가 봐요. 간혹 이렇게 안채를 월세 내 놓고 주인이 이층에 사는 사람들이 꽤 있더라구요. 그러게 요즘같이 팍팍할 땐 한 푼이라도 나올 데가 있는 건 복받은 거요. 하며 자기들끼리 소탈한 대화를 이어갔다.
오후에 접어들면서 혜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인부가 옮겨 놓은 고무 다라이에 담긴 여러 가지 반찬통과 조리기구들을 손 빠르게 정리했다. 쌀통은 냉장고 옆으로 옮기고 쌀을 배달시켜 가득 채우고 생수를 사왔다. 때마침 제주도 친정에서 보낸 감귤 잼과 젤리와 김치도 냉장고에 선반에 챙겨 넣었다. 일은 저녁의 푸른빛이 난간에 내리기 시작할 즈음에야 끝났다. 계단을 내려딛을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마음만은 가뿐했다. 혜성은 신접살림을 하면서부터 가급적 빨리 화란이 쓰던 물품을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짠 음식을 좋아하는 성규의 입맛은 천천히 고쳐나가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화란의 식습관이나 음식 취향을 고려해서다. 물론 자유롭게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게 우선이었다.

화란이 여행지에서 돌아와 집으로 들어설 때였다. 딱히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느껴졌다. 화란이 여행 가방을 놓고 1층으로 내려갔다. 식탁에 앉아 성규와 혜성이 마주보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서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것들이 다 어떻게 된 거냐?”
혜성이 커피 잔을 내려놓고 튀어나왔다.
“엄마 힘드실까봐. 혜성이가 오늘 사람을 불러서 종일 일했어요. 그러지 말고 들어오세요.”
성규가 다가와 팔을 잡았다.
“밥도 따로 먹자는 것이냐?
화란은 성규의 손에서 팔을 빼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어머니, 들어오세요. 어떻게 그렇기만 하겠어요. 언제든 같이 할 수 있죠.”
혜성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높낮이가 없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규야, 네가 말을 좀 해봐. 뭐니 이게?”
“혜성이가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거예요.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요. 혜성이가 얼마나 엄마를 좋아하는데요.”
“아이고 남부끄러워 말도 못하게 생겼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
화란은 버럭 소리를 지르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화란은 그날 뜬눈으로 밤을 샜다. 사지가 떨리고 입안이 바짝 탔다. 계속 물을 마셔도 혓바닥과 목구멍은 찢어질 듯한 통증이 올라 가라앉지 않았다. 머리가 흔들려 눈을 떴을 때 오원장의 손이 화란의 뒷목으로 들어온다. 머리에 힘을 빼세요. 오원장은 머리를 미미하게 움직여서 무게를 빼도록 한다. 곧 화란의 머리가 오원장의 손바닥에 묵직한 무게로 실린다. 의식이 먼데까지 풀어지는 것 같이 좀 아득해진다. 오원장이 한쪽 무릎을 데코타일 바닥에 대고 앉는다. 오원장의 숨결이 화란의 얼굴에 닿는다. 오원장은 자신의 가슴 가까이 화란의 머리를 감싸고 자, 가만 계세요. 의례적인 말을 뱉으며 팔의 리듬을 살린다. 화란은 눈을 질끈 감는다. 오원장이 화란의 얼굴을 오른 쪽으로 그런 다음 왼쪽으로 한 번씩 틀었다가 제자리에 놓는다. 머리가 틀어질 때에는 경추 관절에서 나는 또도독 소리가 너무 커 심장 박동 소리가 귓전에서 쿵쾅대고 얼굴이 빨개진다. 화란이 감았던 눈을 크게 떴다가 더 질끈 감는다.
“아니, 어머니 괜찮으세요?”
그때까지 줄곧 지켜보던 혜성은 다급하게 화란의 손을 잡는다.
“괜찮겠니? 아휴 이것 좀 놔라.”
화란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혜성의 손을 뿌리친다.
어디선가 탁한 멜로디가 들린다. 혜성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찾아 꺼낸다.
“그건 정말 안된다니까요. 엄마.”
혜성은 통화를 하며 치료실을 나간다.

오원장의 부축을 받고 화란이 일어나 앉는다.
“부엌살림을 이층으로 옮겼다니 무슨 말이세요?”
“글쎄, 내가 쓰던 부엌살림을 이층으로 다 옮겨 놓았지 뭐냐. 상의 한마디 없이. 그날 밤 내속이 꽉 막히고 불덩어리가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더라. 눈은 침침해지고 다음날 보니 콧속이 다 헐어버렸지 뭐야.”
화란은 거기까지 말하고 이마에 손을 갖다 댄다. 옥주가 다가가 화란의 소매부리를 잡아끌어 환자용 의자에 앉힌다.
“어머니, 제 생각인데 근육이 뭉친 거 아닐까요?”
“근육이 뭉쳤다고?”
“골반이 조금 틀어지긴 했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고요. 척추도 이상이 없어요. 어쩌면 아주 빨리 좋아질 수도 있어요.”
화란은 원인이 뭐냐고 이렇게 어찌 살 수 있겠느냐고 말하며 오원장을 바라본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
“몸도 그렇지만 마음도 긴장상태예요. 힘드시겠지만 놓으셔야 해요. 노여움을 푸세요.”
“그게 어디 억지로 되니? 성규가 야속하다.”
화란의 두 눈에 급기야 눈물이 흐른다. 훌쩍이기 시작한 울음은 끝내 엉엉 소리로 이어진다.
“어머니, 속상하신 것 알겠어요. 어쩌겠어요. 혜성씨 착한 사람 같던데. 설마 다른 생각이 있겠어요.”
오원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시계를 바라본다. 옥주가 화란의 정강이를 툭툭 건드린다.
혜성은 그때까지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옥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화란도 뒤따라 일어선다. 오원장은 출입구까지 따라 나오며 잘 주무시고 어렵겠지만 마음을 편히 가지라며 진지하게 말한다. 화란은 그게 말처럼 쉽다면야, 대꾸하고 지팡이를 집어 든다.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길에 계절에 맞지 않게 햇살이 뜨겁다. 길섶에 선 이팝나무에서 꽃잎이 바람을 타고 떨어진다. 수백 번 뒤채이며 떨어진 꽃잎은 화란의 등과 머리를 스치고 땅바닥으로 흘러내린다. 멀리 혜성이 아직 통화중이다.
“얘,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점심이라도 같이…”
옥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란은 일촉즉발로 쏜다.
“무슨 소리야. 부엌을 따로 쓰는 사이야. 관둬.”
화란은 지팡이로 땅을 꾹꾹 찍으며 걷는다. 가끔씩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얼굴을 쳐든다. 어느 틈에 혜성이 다가와 어머니 점심 같이 해요, 친근한 얼굴로 말한다. 꽃잎을 헤적이다 말고 옥주가 한마디 한다. 둘이서 가야할 데가 있는데 어쩌냐? 고 묻는다.
“근데 치료를 받았는데도 달라진 게 없네요.”
목소리가 딱딱하고 살짝 높은 톤이다.
“모르는 소리만 한다. 나도 모르겠다.”
화란이 무심하고 퉁명스러운 음성으로 귀찮다는 듯이 말을 자른다.
“이게 치료한 거래요? 이렇게 해서 언제 나아요. 아이, 참!”
혜성은 억울하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치료실을 쏘듯 바라본다.
“네가 그런다고 낫겠니? 네 일이나 보거라. 크흠.”
화란이 큰 소리로 말하며 등을 돌린다. 혜성은 화란의 등에 대고 묵례를 한 다음 목소리를 조금 키워 말한다.
“맛있는 거드세요. 어머니.”
이팝꽃 사이로 혜성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내가 쟤 꼴을 보고 살아야 하다니…….”
화란이 눈바래기로 혜성을 보며 열뜬 숨을 뱉는다.
“걷뛰멈에서 제주도 티켓팅을 다 한 것 같던데 괜찮겠어?”
옥주가 머리카락에 붙어있는 꽃잎을 털어낸다.
“여기 있으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하겠냐. 당장 가고 싶은 걸.”
걷뛰멈을 결성한 지 벌써 이 년이 되었다. 오랜 지인들과 만든 여행을 동반한 우리문화답사 모임이다. 7명의 회원 중 화란과 옥주는 거의 빠지는 일이 없었다. 회원들의 나이가 서로 비슷해서인지 늘 화기애애하다. 주말 오후나 공휴일에 예고 없는 번개팅에도 잘 모였다. 즉석에서 제안한 것들에 엇나간 회원들이 없었다. 이를테면 도심 인근에 해안을 간다거나 미술 전시회 관람 같은 거였다. 신기할 정도였다. 제주도 답사는 신년 모임에서 결정됐다. 화란이 제주도 아가씨를 며느리로 맞이하는 게 이유이기도 했다. 제주 토박이의 세시풍속 답사 계획에 회원들은 들떴다. 더욱이 화란은 이 여행을 위해 성규의 결혼식을 당겨서 치르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화란과 옥주는 식사를 하고 나와 챙이 있는 모자를 구입한다.
화란이 어깨가 뻐근할 만큼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계단을 오른다. 손이 떨리고 손잡이에서 손이 자꾸 미끄러져 내린다. 어둠이 두터워질수록 몸은 바다 밑바닥에 빠진 듯 무겁다. 눈을 감고 수평선을 떠올리거나 눈동자를 가운데로 모아 보지만 헛수고다. 명치 위에 놓인 것이 내려가는 듯하다가 심해진다. 화란은 여러 번 냉수를 들이켜고 베개를 끌어다 다리를 고인다. 버려진 듯한 방으로 가녀린 빛이 새어들고 천정에서는 이따금 알 수 없는 소리가 난다. 화란은 허리를 펴려 안간힘을 쓸수록 통증만 심해져 관둔다.
새벽녘엔 날벌레 한 마리가 날아와 손등에 앉는다. 회갈색의 작은 날개를 접고 앉아 움직이지 않는다. 화란은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금 잠을 잔 것도 같다.

그렇게 날이 밝았다. 일층과 대문을 함께 쓰지만 정말 다른 식구가 되어버린 것일까. 어제도 성규를 보지 못했다.
동서 의원 치료가 일주일째다. 오늘도 배꼽 주변에 스무 방의 침이 꽂힌다. 오원장이 조금은 머뭇거리는 듯 입을 연다.
“어머니 얼른 나으셔야죠. 낫고 난 다음에도 재발하지 않으려면 내말을 듣고 꼭 그렇게 하셔야 하는데 그러실 수 있겠어요?”
“당연하지.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는데.”
화란은 왜 이제야 말하느냐는 듯이 재촉한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마음을 푸세요. 그러지 않으면 낫기 힘들어요.”
화란은 뭘 자꾸 풀라고는 것이냐 내가 성규를 어떻게 키웠는데 저런 무례한 아이를 어쩌라고? 속말을 한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혜성씨가 어머니 걱정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화란은 성규 얼굴 보기도 힘들어졌는데 그게 될 것 같으냐, 고 분통을 터트린다. 혜성의 괘씸함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갑자기 제주도의 ‘제’자도 떠올리기 싫어 이번 답사를 포기할까 생각한다.
화란은 병원을 나와 터덜터덜 걷는다. 윤기 잃은 머리카락이 자꾸만 뺨으로 흘러내린다. 가슴을 훑고 지나는 바람이 차기만 하고 긴 그림자는 화란 앞으로 계속 따라붙는다. 그림자가 흔들리다 어느 사이 어둠에 녹아버린다. 어둠과 하나가 되기는 화란도 마찬가지다. 골목 어귀에 접어들자 고소한 냄새가 코끝에 달라붙는다. 사골 끓이는 냄새는 집이 가까워질수록 한층 더 심해진다. 일층에 들를까 하다가 계단으로 몸을 돌린다. 많이 걸었던 탓에 계단을 딛는 발등에 쇳덩어리가 앉은 듯하다. 여행 가방도 챙겨야 하고 빨래 뭉치도 정리해야 하는데 더는 움직이고 싶지가 않다. 냄새 때문인지 밥 생각이 간절하다.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 못내 서럽게 느껴진다.
그녀는 신발을 벗어던지고 주방으로 걸어간다. 식탁에 못 보던 냄비와 약병이 놓여있다. 약병에 인쇄된 한라제약이라는 활자가 선명하다. 모래알처럼 작은 글씨는 말뼈가 주재료라고 밝히고 있다. 그것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간단한 밥상을 차린다. 식사를 하는 동안 어디선가 날벌레가 날아와 식탁 끄트머리에 앉는다. 그것은 화란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화란은 밥이 넘어가다 목에 몇 번 걸리는가 싶기도 해 자주 물을 마신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현지인이 출구에서 피킷을 흔든다. 개버딘 바지와 카키색 점퍼차림의 현지인은 단발머리와 둥근 얼굴에 이목구비가 작아 귀여운 인상이다. 그녀가 혼잡한 틈을 벗어나 회원들을 살핀다. 일일이 눈을 맞추며 인사하고 자신을 소개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돌아볼 만큼 놀라운 목청이다. 일정을 변경하는 게 좋겠다, 하자 화란이 계획대로 하자고 말한다. 화란이 회원들에게 사려니 숲길 가고 싶어 잠도 설쳤다며 선글라스를 쓴다.
걷뛰멈 일행은 문화해설사와 함께 따라비오름으로 향한다. 사려니 숲길에서 만난 센 바람이 화란의 등허리를 쉴 새 없이 훑고 지난다. 화란은 걷다가 멈추다가 하면서 정상을 향해 걸음을 늦추지 않는다. 숲에는 산부추가 꽃망울을 매달고 산수국이 온통 꽃을 피워내고 있다. 분화구 주위엔 잡초와 고사리가 고개를 올리고 있다. 허리문제만 아니라면 분화구를 뛰어 돌고 싶은 마음이다. 3개의 분화구를 지나 정상에 서니 아득히 우도와 한라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젖은 몸에 바람이 스치자 명치에 무거운 것이 좀 걷히는 기분이다.
일행은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성읍민속촌으로 이동한다. 민속촌으로 들어서서 해설사가 화란 옆으로 다가온다.
“괜찮겠어요? 아드님이 제주도 아가씨와 결혼했다고요?”
현지인이 묻는다. 맑은 목소리와 선량한 표정에 화란의 미간에 주름이 느슨해진다.
“착한 앤 줄 알았죠. 아니, 그게 말이죠…”
화란은 무심결에 나온 말에 당황하며 말끝을 얼버무린다. 현지인은 웃으며 화란 옆으로 바짝 다가선다.
“제주도 사람들 생활력이 무지 강해요. 어른 공양도 잘하고요.” 하며 주먹을 쥐고 팔을 들어 흔든다.
걷뛰멈 동인들은 둘, 셋씩 따로 떨어져 초가집을 기웃거린다. 해설사가 제법 큰 초가집 앞으로 가 손뼉을 친다.
“이쪽입니다.” 하는 음성이 그 순간, 상쾌한 울림을 준다. 흩어져 있던 일행이 모여든다.
“자, 오늘 제가 끝까지 잘 해드리겠습니다. 언제든 불편하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들 해주세요.”
일행 중 누군가 네, 우리도 잘해드릴게요, 이집 멋지네요, 부잣집인가요? 라고 소리친다.
“부잣집이라기보다는 제주도 허씨가 살았던 집이에요. 예전엔 대부분 이런 형태로 집을 지었어요. 담은 낮고 대문이 없죠.”
“도둑이 없었다는 건가요? 그럼 가진 게 없거나 가진 게 다 똑같았을까요?”
조금 전 말한 그 사람이다. 현지인은 빙고, 하며 인지와 검지로 링을 만들어 보인다.
“직관이 예사롭지 않는데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한울타리에 집이 두 채죠? 아들이 결혼을 하면 안방을 지켰던 홀어머니는 사랑채로 옮겨갑니다. 가장의 역할을 넘기는 거라고 이해하면 되겠어요.”
현지인은 배낭을 더듬어 물병을 꺼낸다. 그때 옥주가 손을 번쩍 든다.
“혹시 제주도만의 식생활 관습은 없나요?”
“요즘엔 분위기가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살림을 분리한 다음부터는 식사를 따로 했지요. 사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죠.”
그녀는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가장들과 남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제주도 생활풍습에 대해 설명을 덧붙인다.
“그럼 서로 무관심해지지 않았을까요?”
“그게 아니라 미망인이 된 시어머니에 대한 최고의 배려였어요. 그 때의 생활양식을 엿볼 수 있으니 잘 살펴보세요.”
현지인이 집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잇는다. 하지만 화란의 귓전에서 그녀의 말은 뭉개져 내린다.
화란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사랑채로 걸어간다. 토방으로 올라서서 부엌을 살핀다. 정갈하다. 아궁이에 그을음이 가득하고 찬장 유리문을 뒤로 사기그릇이 진열되어 있다. 벽면에 소쿠리도 몇 개 걸려있다. 구석진 자리에 놓인 항아리가 쪽 창으로 흘러든 햇빛을 받고 있다. 화란이 다가가 항아리 뚜껑을 연다. 하나는 쌀이 가득하고 또 하나는 절반이 비었다. 화란은 물러나 뒤로 이어진 통로로 걸음을 옮긴다. 작은 광에 예닐곱 개의 크고 작은 항아리와 빈 시루가 전시되어 있다. 화란의 폐부 깊숙이 서늘한 공기가 파고든다.

화란은 부엌을 나와 일행 곁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곧장 해설사를 에워싸고 있는 일행을 제치고 맨 앞으로 나간다.
“쌀독이 두 개던데 무슨 이유라도….”
화란은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바라본다.
“아, 이 집은 안채에 쌀독이 없죠? 사랑채에 두고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못 먹고 살던 시절이라 쌀이 재산이었죠. 하나는 어머니 것이고 하나는 안채에서 사용했던 것이에요. 항상 어머니의 쌀독에 쌀이 떨어지지 않게 살폈던 거죠.”
화란은 자신의 집 부엌에 있는 쌀통이 떠오른다.
“부엌 안쪽으로 보이는 저 곳은….”
현지인은 팔을 뻗어 손바닥으로 부엌을 가리킨다. 화란은 계속되는 그녀의 말이 조금 전보다 더 멀어지고 있음을,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씩 환해지고 있음을, 명치를 누르고 있던 뜨거운 기운이 쑥 밀려남을 느낀다. 화란은 현지인을 뒤로하고 한발자국씩 물러난다. 한바탕 센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트린다. 화란은 고개를 숙이고 서성인다. 안채와 사랑채를 잇는 마당엔 이끼가 파랗다. 종일 불편했던 새 신발을 벗자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시원한 느낌이 퍼진다. 그녀는 햇볕이 든 이끼 위를 맨발로 걷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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