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는 전쟁 이후 4·19혁명, 5·16군사쿠데타와 같은 급변의 시기를 경험한 한국 사회가 마주한 근대화의 시작이었다. 정통성이 없던 박정희 군사 정부가 내세운 근대화 담론은 국가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게 되고 이것은 사회·경제적 현실이 한국인들의 일상적인 삶에 침투해 들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에서 경험하게 되는 산업화, 도시화, 핵가족화, 소비, 새로운 형식의 시공간적 규범 등과 같은 근대적 경험은 여성들의 삶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동시에 국가와 사회는 사적 영역에 머물던 여성을 끊임없이 공적 영역으로 이끌었다. 경제성장을 위한 국민동원체제가 작동하기 시작한 이 시기에 많은 여성들이 사회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국가 주도의 노동집약적 산업화는 대규모의 여성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여성은 고유하고 본질적인 속성으로 전통적인 모성을 갖춰야 하는 것에 더해 때로는 남성, 국가, 사회에 의해 근대화의 일꾼으로 즉각 호명되어야 하는 가부장적 전통과 근대화의 조화를 지향해야 하는 이중적 의미의 근대성을 경험하게 된다. 여성의 근대성은 남성의 근대성과는 다른 방식으로 때로는 그것에 저항하면서 여성의 삶과 경험은 사회적 역사적 시기와 상황에 반응해 왔다. 그럼에도 욕망하는 주체로 드러나는 순간 그 여성은 일탈적 존재로 타자화되고 공포의 대상이 된다. 이와 같은 급속한 근대화의 불안감과 근대적 모순이라는 여성의 경험은 영화에서도 자주 재현되는데, 현재까지도 한국의 대표적 작가 감독으로 불리는 김기영, 이만희 등과 같은 19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에 제작된 그들의 작품에서도  공포의 대상은 항상 여성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제 현실에서 여성은 공포를 넘어 혐오의 대상이다. “다음 생엔 부디 같은 남자로 태어나요”, 한국에서는 그나마 남자로 태어나야만 신체적 안전을 보장 받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자조 섞인 이 말은, 최근 서울에서 가장 번화하고 치안이 좋다는 강남에서 일어난 ‘묻지마 살인’에 희생당한 여성을 추모하기 위해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인 포스트잇에 쓰여진 문구이다. 그런데 “사회생활에서 여성들에게 무시를 당해 범행을 했다”는 범죄자를 언론은 그의 정신 병력을 들먹이며 단순한 묻지마 살인으로 치부하는 것 같다. 최근 들어 급증하는 데이트 폭력이 하루 평균 20건, 강력범죄의 80% 이상이 여성을 상대로 한다는 것은 현실의 공포와 혐오가 여성에게 집중돼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제 대중교통, 직장, 길거리, 심지어 집안에서조차 일상의 어디에서든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공간은 없다.

왜 현재 한국에서 공포와 혐오의 대상은 사회적 약자, 그것도 여성들에게 집중되어 있는가. 증오는 항상 사회적 강자가 아닌 약자 앞에서 폭발하는지, 그 찌질함에 대한 치부를 넘어 이제는 여성, 나아가 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다시 필요한 시점이다. 증오와 혐오의 그 무딘 칼날은 곧 방향을 바꿔 성소수자, 이주 노동자,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에게 향할 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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