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광산군 서방면 용봉리, 1951년 전남대 설립 당시의 행정 지명이다. 전남대의 설립을 위해 헌신한 (故)이을식 지사는 이곳에 30만평 규모의 캠퍼스 조성을 계획했다. (현)광주교대 부지와 용봉리 두 곳 중 현재의 용봉캠퍼스 자리를 선택했다고 한다. 이곳에 농대가 있었고, (현)인문대 3호관과 도서관 사이에 충분한 수량의 지하수 관정이 있었으며, 부지가 더 넓다는 점이 선정 이유였다. 물론 용봉동 일대가 문무백관을 배출할 길지(吉地)라는 풍수지리적 시각도 깔려있었을 것이다.
 
우리 대학 최초의 건물은?
 
우리 대학 최초의 건물은 (현)인문대 1호관인 문리대 문학부 건물로 6ㆍ25전쟁 직후인 1954년에 공사를 착공했다. 이 건물을 시작으로 지난 60여 년 간 수많은 현대식 건물들이 신축되어 현재는 공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득 차있다. 

용봉캠퍼스의 중심부는 구 본부였던 용봉관, 도서관 건물 2동, 학생회관, 그리고 대강당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캠퍼스의 한 중앙에 구 본부와 도서관, 대강당, 그리고 학생회관이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우리 대학 최초의 마스터플랜에 기초한 까닭인데, 이는 제6대 유기춘 총장 취임 약 1년 후인 1970년에 작성되었다.
 
당시 광주여객 박인천 사장이 기증한 중앙도서관 금호각이 소장도서의 하중을 지탱하지 못하자 우리 대학은 도서관을 신축하기로 하고, 설계를 건축학과의 임영배 교수에게 부탁하게 된다. 임 교수는 도서관 설계를 구상하며 위치 선정을 고민하다가, 유 총장에게 “건물 한두 개 더 짓는 것보다 대학캠퍼스의 향후 발전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문제입니다.”(전남대 50년 남기고 싶은 이야기. 169쪽)라며 캠퍼스 마스터플랜의 중요성을 제기하였다. 유 총장은 이 제안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는데, 그 결과 캠퍼스를 대학본부·도서관·학생회관·대강당의 교육지원지역, 단과대학 지역, 발전유보지의 외곽 지역 등 3개 구역이 설정되었다. 그리고 여기에 체육관, 운동장, 부속학교, 용지(龍池) 등의 부속시설이 배치되었던 것이다.

1971년 우리 대학 정문이 세워진다. 1972년 우리 대학에서 국립대학교 체육대회를 개최하기로 함에 따라, 논바닥 같던 대운동장에 군부대의 지원을 받아 트럭 600대 분량의 모래를 쏟아 부었다. 군부대에 모래 600톤을 요청하였는데, 군부대는 트럭 600대의 모래로 잘못 이해하고 600대를 수송하여 왔다는 후문이다. 당시 31사단장이 우리 대학의 동문이어서 군부대의 도움으로 용지 연못도 조성되었다. 정문으로 들어올 때 좌측에 있었던 용봉마을이 1975년에 추가경정 예산의 편성으로 철거되면서, 그런대로 캠퍼스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캠퍼스 100년 마스터플랜 필요
 
오늘날 전남대는 광주캠퍼스, 여수캠퍼스, 학동캠퍼스, 화순병원(캠퍼스), 국동캠퍼스 등 여러 곳에 캠퍼스를 갖고 있다. 그런데 광주캠퍼스는 과밀하여 더 이상 건물을 세울 공간이 부족하고, 교내 도로망과 주차장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차량과 도보자들이 뒤엉켜 차도와 인도를 구별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교내 도로망에 대한 장기 마스터플랜도 없다. 학동 의과대학의 화순 이전 문제, 국동 캠퍼스의 활성화 방안도 서둘러 풀어야 할 숙제이다.

오늘의 이러한 현실을 바라볼 때, 우리는 65년 전 우리 대학 설립자들의 장기적 비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52년 전남대 출범 당시, 입학 정원은 총 800명, 인가된 학생정원은 3360명,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0만평의 캠퍼스 부지를 확보하는 설립자들의 혜안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는 우리들에게 전남대 캠퍼스 100년 마스터플랜을 요구함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래야 100년 뒤 우리 후배들도 또 다른 비전을 꿈꿀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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