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제작된 장예모 감독의 작품 '홍등 紅燈'은 1920년대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송련은 대학을 중퇴하고 지극히 봉건적인 가문인 진 어른댁에 넷째 첩으로 들어간다. 그날 밤의 잠자리에 선택된 부인의 처소에는 그날 밤 홍등을 밝히는 가풍 속에서 네 명의 부인들이 서로 시기하고 모략하는 집안의 모습을 그려낸다. 이 상황에서 끝내 송련은 미쳐버리지만 진대감은 다섯째부인을 새로 맞아들이고 중국 봉건 사회의 폐습은 수레바퀴 돌 듯 지속된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지붕 위의 작은 방은 금기시되고 있다. 송련이 집안사람들에게 방의 존재를 물어보자, 그저 알 필요가 없다며 묵살해버린다. 작은 방은 영화 전개 내내 잘 등장하지 않다가 셋째 부인의 외도가 들통 났을 때, 그 방의 의미가 공개된다. 그리고 송련이 그 방에서 셋째 부인이 살해되어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녀는 미치게 된다. 아무도 들어가지 않고 열쇠로 굳게 닫혀있는 문은 그 존재로 동화 '푸른 수염'을 떠올리게 한다.

 동화 '푸른 수염'의 주인공인 푸른 수염은 돈 많은 귀족으로 그와 결혼했던 아내들의 소재는 하나같이 모호하다. 그는 다섯 번째 부인과 결혼하면서, 그녀에게 성의 방 열쇠들을 주고 단 한 곳만은 열어 보지 말라고 하고 잠시 떠나게 된다. 하지만 이 부인이 호기심에 금지된 방문을 열어보게 되고, 거기에 지금까지의 부인들이 죽어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 열쇠를 떨어뜨리면서 생긴 핏자국은 절대 지워지지 않아서 나중에 돌아온 푸른 수염에게 발각된다. 그러자 부인은 성의 꼭대기 탑으로 도망가고, 위급한 순간에 그녀의 형제들이 달려와 푸른 수염을 죽이고 그녀를 성에서 구해내게 된다.

'푸른 수염'에서 다섯 번째 부인이 금기를 어긴 죄로 죽음의 위기에 처한 것은 과연 그녀의 잘못일까? 하지만 푸른 수염은 이미 아내가 지하실 문을 열 것을 예상하고 있어 보인다. 오히려 그녀의 지하실 방문을 의도한 것으로 보이기까지 하다. 푸른 수염이 돌아온다는 날짜보다 일찍 돌아왔다는 점과 피가 묻으면 지워지지 않는 마술 열쇠를 아내에게 맡긴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죽임 당한 전 부인들도 같은 방식으로 살해당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하고 그 의문은 앞서 언급한 것을 통해 근거 없어 보이지 않는다. 애초부터 억제가 불가능한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호기심을 누르라는 과제를 던져주고 자신의 말을 들으면 살려주고 그렇지 않으면 죽이고 있는 모습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런 모습은 자신의 뜻에 반항하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절대 권력자의 폭력이라 할 수 있다.

'홍등'에서 비슷한 모습이 보여 지는데, 가부장제를 바탕으로 네 명의 부인이 집안의 규율에 의해 성적 욕망을 억압당하고 있는 모습이 그러하다. 인간의 본능인 성적 욕망을 가부장제의 약자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억압당한다. 그 본능을 이겨내지 못했을 때는 규율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런 권력자의, 사회의 폭력이 두 작품에서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푸른 수염'은 14세기이후 고전문예부흥운동이었던 르네상스를 거친 1697년에 쓰여 졌다. 이 시기는 중세 신중심의 사회에 반발하여 사람들이 각성하는 시기라는 점을 생각하면 권력을 쥐고 있는 푸른 수염과 절대적 약자인 다섯 번째 부인의 모습은 신과 인간의 대결을 교묘히 묘사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과연 저자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의 승리자를 누구로 본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은 결국 형제들에 의해서 구조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홍등'에서 마지막 등장하는 다섯 번째 부인도 '푸른 수염'에서 마지막 부인이 다섯 번째 부이라는 것과 비슷하다. '홍등'에서는 중국 전통의 순환하는 역사에 따라 새로 등장하는 다섯 번째 부인도 좋지 않은 결과를 예상하게 하지만 '푸른 수염'과의 비교를 통해 혹여나 있을 기적에 의해 희망적인 결말을 가져오지도 않을까 하는 신선한 기대를 가지게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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