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국가기념박물관의 '수난자의 벽'. 당시 경제상황이 좋은 사람만 사진이 있고 농민, 노동자, 학생계층은 사진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947년 그날 이후 대만의 상황은 어떨까?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2·28국립기념관, 징메이 국가인권박물관 등을 찾았다. 관련자들을 만나 2·28 사건(2·28)뿐 아니라 이후 백색테러 등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봤다.

시작은 사소하다면 사소하다고 볼 수 있는 충돌이었다. 국가 전매 품목인 담배를 몰래 팔던 여인이 단속원에게 붙잡혀 개머리판으로 가격 당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항의하는 군중에게 발포했고 경찰이 쏜 총에 학생 한 명이 사망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2·28은 피해 양상에 따라 구분이 가능한데 1947년 2월 28일부터 3월 8일까지는 외성인(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사람)의 피해가 컸고, 이후에는 중국에서 건너온 국민당 정부의 진압으로 대만 본성인의 피해가 커져갔다. 이 때문에 대만 사람들 사이에는 2·28에 대한 인식차가 존재하게 된다. 사건을 바라보는 중심이 달라져 외성인은 초기를, 본성인은 후에 피해 상황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  

이러한 2·28과 관련한 전반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곳이 있다. 타이페이(대만의 수도)에 위치한 2·28국립기념관이다. 박물관은 1995년 만들어진 2·28배상조례에 의해서 설립된 것으로 피해자 배상 업무, 기념행사, 기념비 설립 등을 담당한다. 박물관이 위치한 건물의 경우 2·28 당시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 대만 유명 미술가 천 청-포 씨(Chen Cheng-po)가 전시를 한 곳이며 이후 대만성참의회, 미국신문처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박물관 안에는 사건 발생 및 전개 과정을 비롯해 사건 이후까지 여러 전시물을 통해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 그 가운데 인상 깊었던 곳은 ‘수난자의 벽’이었다. ‘수난자의 벽’은 피해자들의 사진을 붙여놓은 것인데 당시 경제상황이 좋았던 이들의 사진은 있지만 벽 뒤쪽으로 갈수록 농민, 노동자, 학생 계층은 사진이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2‧28 발생 전 대만의 사회적 상황의 일면이기도 하다. 일제 식민 통치가 끝난 뒤 외성인들은 사회 고위층을 차지했지만 본성인은 그러지 못했고 물가, 실업난 등의 문제가 있었다. 또한 여전히 피해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만 있고 가해자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현실을 짚은 전시물도 있었다. 가해자들에 대한 최종적인 법적 책임에 대한 판결을 놓고 의견이 나뉘고 있기 때문이다. 장개석 주석(Chiang Kai-shek)에게 공문서를 보내 군대 파견을 요구한 당시 행정장관인지, 아니면 군대를 파병한 장 주석이 책임자인지 등에 대한 논란이다.

이밖에도 징메이 국가인권박물관에서 2·28 이후 정부가 자행한 백색테러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감옥, 법정 등을 박물관으로 바꿔 대만의 역사와 인권에 관련된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 2·28 사건이란? 5·18민주화운동의 경우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진압했지만 2·28은 정치적 숙청 의도가 강하다. 앞서 말한 담배 사건 발생 후 당시 행정장관이 장개석에게 파병을 요구했고 군인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늘었다. 군인에게 잡힌 사람들은 9인 1조로 손목과 발목을 엮은 뒤 총살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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